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에스더와 '성공'에 대하여

이성호 | 2016.04.28 23:19
에스더와 ‘성공’에 대하여

성공(成功)은 ‘목적하는 바를 이룸’이라는 공, 즉 명예를 이루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출세(出世)의 의미에 더 가까운 사회적 통념을 내재한 용어입니다.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면 이 출세의 뜻풀이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최근 우리 교육은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생각보다는 출세 위주의 교육에만 치중하고 있다.” 아마도 높은 자리나 고수입이 보장된 성공을 꿈꾸거나 부추기는 현실을 우려하여 첨가된 내용인 듯싶습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빠짐없이 들어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간구의 내용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요청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성공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 고위 공직자나 전문인, 교수, 의사, 법관 등을 소망하는 것에서 당장의 대학 입시까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중추적인 위치에 올라 이 땅에 혁신과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겠다는 멋진 포부이겠습니다. 그래서 교회 강단에서조차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긍정과 성공’이  자주 인용됩니다. 

그런데 진짜 경건한 이들이 세속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권위와 전통에 구애받지 않으며 순응주의와 맹종, 독점과 알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정의롭고 진실한 방법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받고자 하면 주라”는 식의 황금률을 주장하는데 반해 세상을 역주행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신자들이 세속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은 철저히 세속의 불의한 방식을 따라 충성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요. 오늘과 같은 시대풍조 속에서 진짜 경건한 신자들은 성공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당하기 쉽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구호를 걸고, 공공의 성공을 조장하지만, 열의 아홉은 좋은 자리,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이뤘다고 여기기 십상입니다. ‘입신양명’ 성공한 사회인이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실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우리가 변화와 혁신의 주체가 되기를, 진짜 원한다면 죽어야 됩니다. 그런 분들은 교수사회, 정치사회, 기업의 추구 방향에 역행해야 하는데,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의지만으로도 위험에 더 노출됩니다.

우리는 에스더서의 성공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더는 이방민족, 그것도 포로로 끌려온 민족의 후손으로 제국의 왕후가 된 인물입니다. 그녀는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인이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에 오른 그야말로 성공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스더를 신분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황제의 장식품이나 애완견 같은 에스더의 삶의 태도를 비난합니다. “네가 왕후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더냐”(에 4:14). 동족이 처한 위험보다 자신이 처할 위험을 우선했던 에스더에게 임한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잠잠하면 유다인들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이 먼저라면, 그것을 두고 비전이라거나 소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거창한 구실을 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단지 성공과 출세를 원하고 좇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누가 어떤 자리, 어느 위치에 올랐느냐가 아니라 그 역할과 책임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런 성공에 취해있는 이들을 향해 모르드개의 입을 빌어 심판을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롬 8:14)이 영광과 구정물을 구분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바라기는 자발적인 고민과 성찰을 이루어 소신있는 인생으로 재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운 길을 만나지 않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어려움가운데에서도 굽실거리지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기상과 기백이 충만한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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