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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쇠적 네트워크의 고리를 끊자!
마이너리그/은희경/창작과 비평사/신동수
<마이너리그>는 1998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중편소설을 장편으로 새로이 고쳐쓴 작품으로, 저자의 <그것은 꿈이었을까>(1999)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이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갖가지 허위의식, 즉 패거리주의 학벌주의 지역연고주의 남성우월주의 등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는 가운데, 주인공들의 마이너 인생을 애증으로 포옹한다. 소설, 『마이너리그』는 현실 속에 얽혀진 비주류 인생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운명적인 그 폐쇄적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진정한 칼날은 성경적 진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저자 은희경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동아일보」신춘문예 중편 부문에 「이중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면서 90년대 한국문학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1997년에는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제10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에는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서평
<만수산 사인방!>
마치 역사책의 어느 부분에 나옴직 하지만 그저 하찮은 기운이 역력한 이 패거리는 은희경의 베스트셀러 소설, 『마이너리그』의 주인공들을 묶어주는 연결고리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만수산 드렁칡의 시조 한 가락은 소설속 주인공들의 관계가 얼마나 원치 않는 질김으로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충정가를 높이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은 불온한 패거리로 낙인찍히기 쉬운 이름이다.
일전에 어느 당 총수의 '주류론'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 말에 반색을 하며 좋아라 했던 사람들은 자기를 '주류'로 생각하는 사람들일 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간을 찡그리며 그 말에 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쨌든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고려말과 조선초, [만수산]과 [일편단심]의 작자들은 결코 주류와 비주류의 대표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그들은 모두 시대의 주류들이 아니었던가? 다만 뜨는 주류와 지는 주류에 불과했을 뿐...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주류는 주류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비주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여전히 비주류의 세상에서 놀고 있다. 나도 이런 세상의 모습을 어느 시사평론가의 말을 빌려, "폐쇄적 네트워크"의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한 번 그 써클의 인사이더가 되면 그 강한 연대의식과 세습적 대물림 등으로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네트워크! 학연. 지연. 인맥의 사회가 이루어내는 만수산 드렁칡보다도 강한 그 하나됨은 일편단심의 순수함으로는 좀처럼 깨기 힘든 패거리를 형성한다.
<은희경의 마이너리거>
작가 은희경은 소위 '패거리 문화' 혹은 '주류론'이 판을 치는 시류(時流)에 적절하게도 [마이너리그]라는 제목으로 특유의 독설과 풍자의 칼날로 세태를 비판한다.
주인공들은 '58년 개띠' 고교 동창 4인방이다. 소설은 어느 날 똑같이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나란히 체벌을 받은 하찮은 인연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4인방'으로 얽히게 된 형준 승주 조국 두환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주류가 아닌 '마이너리그'의 삶의 자취를 좇는다. 그들은 서로를 경멸하기도 하고, '그래도 내가 니보다는 낫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마이너리거'였다. 나름대로 그들이 꾸민 거대한 사업들은 언제나 시시콜콜하고 주류에 밀리는 것일 뿐... 순수했던 고등학교 시절 4인방이 하나 같이 사랑했던 이쁘고 똘똘했던 소희는 늘 건수만 생기면 다리를 덜덜 떠는 건달 두환이와 함께 야반도주를 한다. 진정한 사랑을 믿는다는 말을 형준에게 남기지만, 그들의 삶이 비천했음은 30대가 되어 만난 두환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지운 탓에 늦도록 아이도 없이 지내던 소희는 그나마 조그만 가게를 하나 차려 밤낮 없이 일하다가 술 먹은 두환이 몰던 트럭이 사고가 나 죽고 만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두환은 포장마차집을 하다가 단골인 재일교포 학생이 간첩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엉겁결에 '안가'에 들어가 간첩활동을 시인하여 세간을 떠들석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던 두환은 소희가 죽은 뒤 곧이어 새장가를 들고 장인의 사업차 중남미로 갔다가 강도의 총에 맞아 죽는다. 나머지 세 친구의 삶도 그저 그렇다. 늘상 잘 나가는 메이저에 밀려 실력 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세월을 살뿐이다. 그러다 셋은 브라질 교포사업가를 만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또다시 메이저급 기획사에 밀려 돈만 털리고 '새'(?) 되고 만다. 그들의 말대로 "잘난 놈들은 태어날 때부터 따로 있는”것이었을까?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은희경의 소설이 그 숱한 냉소주의와 독설에도 불구하고 10만의 독자층을 확보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을 매우 날카로운 섬세함으로 드러내는 리얼리즘에 있는 것 같다. 제목 자체에서 이미 메이저와 마이너의 구획을 그려 넣고, 마이너리거들의 형편없는 속물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에서 이 땅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그』에는 메이저와 마이너가 공정하게 대조되고 있지 않다. 전반부에서 구조적인 답답함과 문제 속에서 꿈틀대던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저 같은 속물들의 요지경 세상으로 빠져들고 만다. 결국 그녀가 그려주고 싶었던 것은 마이너 인생들의 마이너리그 그 자체였을까?
어느 평론가와 작가와의 인터뷰를 본 일이 있다. "...사회소설이나 세태소설을 쓸 마음은 아니었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다 마이너라는 건데, 그냥 인생을 살다보면 이렇게 쓸쓸하기도 하고 통렬하기도 하고, 여름이 지나간 뒤에 스러지는 가을빛 같은 기분으로 마이너리티라는 얘기를 한 거지, 마이너와 메이저를 갈라 갖고 메이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불평등, 분노, 사회구조의 모순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근데 우리시대에 마이너로 살아야 되는 사람들의 비애라고 다들 읽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녀의 이런 답변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의 글이 인생의 단면인 비주류의 인생을 관조(觀照)하듯 다루었다고 보여지지만은 않는다. 시류에 너무도 적절한 타이틀과 그 안에 담긴 날카로우면서도 통속적인 유머와 재담은 겉으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담지하며 희화(戱畵)를 통한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나-그녀의 소설을 낸 출판사가 '창비'가 아닌가?- 결국은 '읽을 거리'를 찾는 다수의 대중독자들의 구미에 맞춘 얕은 통속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가능한 것이다.
<그럼 무엇? 마이너리그나 메이저리그나!>
소설 속에서는 마이너리거나 메이저리거나 같은 규칙 속에 움직인다. 그 놈이 그 놈이다. 그것은 '류(流)'나 '4인방에서 방(防)' 등에서 나타나는 패거리 혹은 네트워크 현상이다. 우습게도 항상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가는 네 주인공은 그 '만수산 4인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화자인 형준의 일탈의 노력이 옅보이기는 하지만 그도 역시 그 네트워크의 인사이더이다). 서두에 폐쇄적 네트워크의 사회라는 말은 비단 있는 놈들의 패거리 보호용 장치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이너리거들의 생존전략이기도 한 현상이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방어기전'의 역할과 같다. 나만 숙제를 안해 와서 벌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벌을 받는 동료그룹이 있을 때, 우리는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네트워크에 속해있는 친구를 위해서는 윤리를 초월한 특혜와 희생이 요구되고 감행된다. 소위 '친구' 나 '동료' 혹은 '패거리'라는 이름 등으로 불리는 이 사회의 폐쇄적 네트워크는 주류나 비주류나 벗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한 편으로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늘 소속되고 함께 해야 할 동료를 만드는 사회적 존재가 아닌가? 내가 학생일 때는 학생의 입장에서 학교의 예산책정을 '재정비리'라는 명목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내가 학교의 직원이 되거나 교수가 되었을 때는 학교의 입장에서 예산의 '적절한 유용'을 강조한다. 내가 없는 자일 때는 없는 자의 편에서 있는 자를 비판하지만, 있는 자의 축에 낄 때는 없는 자들의 비합리성과 공격성을 비난한다. 전도사로 있었을 때에 나로서는 고생하는 전도사들과 함께 노동조합이라도 결성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되어서도 그런 전도사들을 곱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어디에 속해 있든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이해되고 통용되는 법과 규칙이 있다. 마이너리그나 메이저리그는 모두 같은 야구규칙 속(?)에서 경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동료 그룹과 폐쇄적인 네트워크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동료를 향한 사랑과 기준 없는 봐주기나 특혜는 구분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치 않는 집단 이기주의나 독단적 고립주의는 폐쇄적 네트워크의 전형이다. 내가 주류에 있느냐, 비주류에 있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디에 속해있든지 그 폐쇠성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열린 사회, 건강한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그룹과의 동료애 때문에 그 삶의 방식의 잘잘못을 덮고, 없는 일로 무마하며, 그 네트워크의 존속만이 목표가 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끊어야 고리이다. 메이저들의 드러난 속물근성 못지 않게 은연중에 마이너들을 묶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와 폐쇄성은 아마도 은희경이 이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칼로 도려내고 싶었던 냉소의 대상이 될만한 드렁칡의 얽힘이 아니었을까?
<성경의 대반전>
성경에서는 소위 사회의 주류나 비주류나 모두 한 통속으로 취급된다. 돈을 자랑하고 부를 목표로 삼은 사회적 주류를 향한 냉소적 비유나 돈 많은 한 청년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충격적 명령에 '근심하며 가니라'는 말로 통쾌하게 주류를 능멸하는 말씀들을 주시기도 하지만,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과 같은 주류의 혜택에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시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주류나 비주류 모두에게 충격스러운 '대반전'(great reversal)으로 가득하다. 당신 스스로 주류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에게 충격적인 도전으로 비주류의 삶을 살도록 하실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비주류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주류의 사람들과 어울리심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주 안에서 주류와 비주류는 더 이상 그 악한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 악하고 이기적인 고리에 대해 주님은 진노하신다. 있는 자들의 재산분쟁이나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님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시며 타박하신 분이시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게 낫다고 하는 제자들 앞에서 "이 여자의 행한 일을 기억하라!"시며 그 사치스러운(?) 헌신을 옹호하셨다. 성경은 주류나 비주류 모두에게 충격적이다.
결국 소설, 『마이너리그』는 현실 속에 얽혀진 비주류 인생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사뭇 운명적인 그 폐쇄적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진정한 칼날은 성경적 진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당신이 속할 진정한 네트워크는 주류의 네트워크나 비주류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예수의 네트워크이다. 진실된 예수의 네트워크!
(신동수)
<마이너리그>는 1998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중편소설을 장편으로 새로이 고쳐쓴 작품으로, 저자의 <그것은 꿈이었을까>(1999)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이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갖가지 허위의식, 즉 패거리주의 학벌주의 지역연고주의 남성우월주의 등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는 가운데, 주인공들의 마이너 인생을 애증으로 포옹한다. 소설, 『마이너리그』는 현실 속에 얽혀진 비주류 인생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운명적인 그 폐쇄적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진정한 칼날은 성경적 진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저자 은희경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동아일보」신춘문예 중편 부문에 「이중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면서 90년대 한국문학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1997년에는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제10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에는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서평
<만수산 사인방!>
마치 역사책의 어느 부분에 나옴직 하지만 그저 하찮은 기운이 역력한 이 패거리는 은희경의 베스트셀러 소설, 『마이너리그』의 주인공들을 묶어주는 연결고리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만수산 드렁칡의 시조 한 가락은 소설속 주인공들의 관계가 얼마나 원치 않는 질김으로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충정가를 높이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은 불온한 패거리로 낙인찍히기 쉬운 이름이다.
일전에 어느 당 총수의 '주류론'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 말에 반색을 하며 좋아라 했던 사람들은 자기를 '주류'로 생각하는 사람들일 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간을 찡그리며 그 말에 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쨌든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고려말과 조선초, [만수산]과 [일편단심]의 작자들은 결코 주류와 비주류의 대표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그들은 모두 시대의 주류들이 아니었던가? 다만 뜨는 주류와 지는 주류에 불과했을 뿐...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주류는 주류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비주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여전히 비주류의 세상에서 놀고 있다. 나도 이런 세상의 모습을 어느 시사평론가의 말을 빌려, "폐쇄적 네트워크"의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한 번 그 써클의 인사이더가 되면 그 강한 연대의식과 세습적 대물림 등으로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네트워크! 학연. 지연. 인맥의 사회가 이루어내는 만수산 드렁칡보다도 강한 그 하나됨은 일편단심의 순수함으로는 좀처럼 깨기 힘든 패거리를 형성한다.
<은희경의 마이너리거>
작가 은희경은 소위 '패거리 문화' 혹은 '주류론'이 판을 치는 시류(時流)에 적절하게도 [마이너리그]라는 제목으로 특유의 독설과 풍자의 칼날로 세태를 비판한다.
주인공들은 '58년 개띠' 고교 동창 4인방이다. 소설은 어느 날 똑같이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나란히 체벌을 받은 하찮은 인연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4인방'으로 얽히게 된 형준 승주 조국 두환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주류가 아닌 '마이너리그'의 삶의 자취를 좇는다. 그들은 서로를 경멸하기도 하고, '그래도 내가 니보다는 낫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마이너리거'였다. 나름대로 그들이 꾸민 거대한 사업들은 언제나 시시콜콜하고 주류에 밀리는 것일 뿐... 순수했던 고등학교 시절 4인방이 하나 같이 사랑했던 이쁘고 똘똘했던 소희는 늘 건수만 생기면 다리를 덜덜 떠는 건달 두환이와 함께 야반도주를 한다. 진정한 사랑을 믿는다는 말을 형준에게 남기지만, 그들의 삶이 비천했음은 30대가 되어 만난 두환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지운 탓에 늦도록 아이도 없이 지내던 소희는 그나마 조그만 가게를 하나 차려 밤낮 없이 일하다가 술 먹은 두환이 몰던 트럭이 사고가 나 죽고 만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두환은 포장마차집을 하다가 단골인 재일교포 학생이 간첩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엉겁결에 '안가'에 들어가 간첩활동을 시인하여 세간을 떠들석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던 두환은 소희가 죽은 뒤 곧이어 새장가를 들고 장인의 사업차 중남미로 갔다가 강도의 총에 맞아 죽는다. 나머지 세 친구의 삶도 그저 그렇다. 늘상 잘 나가는 메이저에 밀려 실력 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세월을 살뿐이다. 그러다 셋은 브라질 교포사업가를 만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또다시 메이저급 기획사에 밀려 돈만 털리고 '새'(?) 되고 만다. 그들의 말대로 "잘난 놈들은 태어날 때부터 따로 있는”것이었을까?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은희경의 소설이 그 숱한 냉소주의와 독설에도 불구하고 10만의 독자층을 확보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을 매우 날카로운 섬세함으로 드러내는 리얼리즘에 있는 것 같다. 제목 자체에서 이미 메이저와 마이너의 구획을 그려 넣고, 마이너리거들의 형편없는 속물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에서 이 땅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그』에는 메이저와 마이너가 공정하게 대조되고 있지 않다. 전반부에서 구조적인 답답함과 문제 속에서 꿈틀대던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저 같은 속물들의 요지경 세상으로 빠져들고 만다. 결국 그녀가 그려주고 싶었던 것은 마이너 인생들의 마이너리그 그 자체였을까?
어느 평론가와 작가와의 인터뷰를 본 일이 있다. "...사회소설이나 세태소설을 쓸 마음은 아니었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다 마이너라는 건데, 그냥 인생을 살다보면 이렇게 쓸쓸하기도 하고 통렬하기도 하고, 여름이 지나간 뒤에 스러지는 가을빛 같은 기분으로 마이너리티라는 얘기를 한 거지, 마이너와 메이저를 갈라 갖고 메이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불평등, 분노, 사회구조의 모순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근데 우리시대에 마이너로 살아야 되는 사람들의 비애라고 다들 읽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녀의 이런 답변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의 글이 인생의 단면인 비주류의 인생을 관조(觀照)하듯 다루었다고 보여지지만은 않는다. 시류에 너무도 적절한 타이틀과 그 안에 담긴 날카로우면서도 통속적인 유머와 재담은 겉으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담지하며 희화(戱畵)를 통한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나-그녀의 소설을 낸 출판사가 '창비'가 아닌가?- 결국은 '읽을 거리'를 찾는 다수의 대중독자들의 구미에 맞춘 얕은 통속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가능한 것이다.
<그럼 무엇? 마이너리그나 메이저리그나!>
소설 속에서는 마이너리거나 메이저리거나 같은 규칙 속에 움직인다. 그 놈이 그 놈이다. 그것은 '류(流)'나 '4인방에서 방(防)' 등에서 나타나는 패거리 혹은 네트워크 현상이다. 우습게도 항상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가는 네 주인공은 그 '만수산 4인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화자인 형준의 일탈의 노력이 옅보이기는 하지만 그도 역시 그 네트워크의 인사이더이다). 서두에 폐쇄적 네트워크의 사회라는 말은 비단 있는 놈들의 패거리 보호용 장치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이너리거들의 생존전략이기도 한 현상이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방어기전'의 역할과 같다. 나만 숙제를 안해 와서 벌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벌을 받는 동료그룹이 있을 때, 우리는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네트워크에 속해있는 친구를 위해서는 윤리를 초월한 특혜와 희생이 요구되고 감행된다. 소위 '친구' 나 '동료' 혹은 '패거리'라는 이름 등으로 불리는 이 사회의 폐쇄적 네트워크는 주류나 비주류나 벗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한 편으로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늘 소속되고 함께 해야 할 동료를 만드는 사회적 존재가 아닌가? 내가 학생일 때는 학생의 입장에서 학교의 예산책정을 '재정비리'라는 명목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내가 학교의 직원이 되거나 교수가 되었을 때는 학교의 입장에서 예산의 '적절한 유용'을 강조한다. 내가 없는 자일 때는 없는 자의 편에서 있는 자를 비판하지만, 있는 자의 축에 낄 때는 없는 자들의 비합리성과 공격성을 비난한다. 전도사로 있었을 때에 나로서는 고생하는 전도사들과 함께 노동조합이라도 결성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되어서도 그런 전도사들을 곱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어디에 속해 있든지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이해되고 통용되는 법과 규칙이 있다. 마이너리그나 메이저리그는 모두 같은 야구규칙 속(?)에서 경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동료 그룹과 폐쇄적인 네트워크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동료를 향한 사랑과 기준 없는 봐주기나 특혜는 구분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치 않는 집단 이기주의나 독단적 고립주의는 폐쇄적 네트워크의 전형이다. 내가 주류에 있느냐, 비주류에 있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디에 속해있든지 그 폐쇠성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열린 사회, 건강한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그룹과의 동료애 때문에 그 삶의 방식의 잘잘못을 덮고, 없는 일로 무마하며, 그 네트워크의 존속만이 목표가 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끊어야 고리이다. 메이저들의 드러난 속물근성 못지 않게 은연중에 마이너들을 묶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와 폐쇄성은 아마도 은희경이 이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칼로 도려내고 싶었던 냉소의 대상이 될만한 드렁칡의 얽힘이 아니었을까?
<성경의 대반전>
성경에서는 소위 사회의 주류나 비주류나 모두 한 통속으로 취급된다. 돈을 자랑하고 부를 목표로 삼은 사회적 주류를 향한 냉소적 비유나 돈 많은 한 청년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충격적 명령에 '근심하며 가니라'는 말로 통쾌하게 주류를 능멸하는 말씀들을 주시기도 하지만,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과 같은 주류의 혜택에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시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주류나 비주류 모두에게 충격스러운 '대반전'(great reversal)으로 가득하다. 당신 스스로 주류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에게 충격적인 도전으로 비주류의 삶을 살도록 하실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비주류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주류의 사람들과 어울리심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주 안에서 주류와 비주류는 더 이상 그 악한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 악하고 이기적인 고리에 대해 주님은 진노하신다. 있는 자들의 재산분쟁이나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님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시며 타박하신 분이시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게 낫다고 하는 제자들 앞에서 "이 여자의 행한 일을 기억하라!"시며 그 사치스러운(?) 헌신을 옹호하셨다. 성경은 주류나 비주류 모두에게 충격적이다.
결국 소설, 『마이너리그』는 현실 속에 얽혀진 비주류 인생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사뭇 운명적인 그 폐쇄적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진정한 칼날은 성경적 진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당신이 속할 진정한 네트워크는 주류의 네트워크나 비주류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예수의 네트워크이다. 진실된 예수의 네트워크!
(신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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