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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장수민/대장간/[송광택]
저자 장수민 목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구원의 확신, 구원을 베푸시는 목적, 구원과 회개, 예배의 올바른 동기와 목적, 구원론적인 기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의 목차가 보여주듯이 그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성경신학적 기초 위에 서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원의 확실성은 나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변함없으신 사랑과 열심에 달려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의무적으로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쉽게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선지자적 통찰과 예민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오늘의 영적 기상도를 분석하고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본래 본서는 처음부터 책으로 출판할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 아니라 <개혁교회> 회원들과 나눈 메시지들에서 골라 편집한 것이다.
장 목사에 의하면 성도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능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하다. 하나님께 동행하는 삶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미 언급한대로 성경신학적 바탕 위에서 논의하고 있다.
우선 그는 원죄가 말씀을 가볍게 여김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아담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소하게 여기고 범죄하게 되었다. 하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이해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이 교회 타락의 근본 이유이다. 기타의 다른 요소들이란 여기서 파생되는 결과일 뿐이다. 요즈음은 말씀이 왜곡되는 현상이 도처에서 난무해도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자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에 의하면 교회의 표면적인 타락을 지적하고 질타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타락을 자초하게 된 원인에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개선하는 일이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항상 그 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이해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속사의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과 그 목표점을 파악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이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17쪽).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항상 하나님나라의 속성에 부합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끊임없이 구현해 나가야 하는데,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고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가능하다.
저자는 ‘예배의 올바른 동기와 목적’에서 기도만능주의를 경계한다. 그에 의하면 기도만능주의는 대부분의 경우, 기도를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필자의 생각에 의하면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야베스의 기도>를 이런 수단을 위한 책으로 읽었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독(誤讀)이요 저자의 의도를 크게 벗어난 읽기라고 할 것이다.
저자는 ‘구원의 확신’에서, 복음이 성도의 궁극적 구언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성도의 사랑 때문이 아니고, 성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99쪽). 성도가 진정으로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며 진정한 효과가 있게 된다. 또한 궁극적 구원의 확신 교리는, 성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궁극적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라면,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하고 도움을 입기 마련이며, 따라서 구원을 위협하는 모든 대적과 적극적으로 투쟁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가 개혁파 신학의 중심교리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가능하며, 따라서 성령 안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사를 성취하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셨다. 성도들은 세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것을 통하여 이 새로운 질서에 속하게 된다. 세례는 수세자를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새 질서의 영역에 서 있다.
저자에 의하면,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질서의 세계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이며, 죽음을 극복한 자들이 누리는 영원한 나라”(112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이 땅에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도래시켰다.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그 미래의 때에 도래하게 될 새로운 나라, 바로 그 미래의 나라를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분으로 옷 입게 될 때에, 그의 전 존재는 바로 이 나라로 옮기워지게 된다(골 1:13, 14). 이런 까닭에 여전히 시간의 제한 속에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효력으로 인도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를 주로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믿음은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이 때 영접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 곧 행동으로 나타나는 전인격적인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자는 소위 ‘신앙주의’의 함정을 경계한다. 신앙주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전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즉흥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결단을 촉구하게 되는데, 이런 심리적인 현상을 믿음 혹은 영접의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는 일부 선교회가 주로 캠퍼스에서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이의(異意)를 제기한다.
오늘날 교회원들의 구원이 안전한 것은, 바로 이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친히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통치권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주가 되신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한다고 하거나 영접한다고 할 때, 이것의 의미는 한층 심오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심오한 의미를 배경에 깔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며(롬 10:9),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롬 10:13),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순종을 자원하고 결심하는 심정이 있는 때가 아니고는, 복음이 바르게 전파된 사실이 없고, 구원론적 믿음과 시인은 부재(不在)하다(112쪽).
일부 독자는 이 책의 메시지를 접하면서 당황하거나 거부하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를 깊이 상고하는 자세로 성경을 읽고 진리를 사모하는 심정으로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영적 통찰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독자에게 유익한 신앙서적이기에 강력히 추천한다.
저자 장수민
1975년 홍성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8년 아동문예문학상에서 동화 '콩할머니집 돌담과 호박넝쿨'이 당선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크리스 신화>, <신비한 나무 이야기> 등이 있다.
저자 장수민 목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구원의 확신, 구원을 베푸시는 목적, 구원과 회개, 예배의 올바른 동기와 목적, 구원론적인 기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의 목차가 보여주듯이 그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성경신학적 기초 위에 서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원의 확실성은 나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변함없으신 사랑과 열심에 달려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의무적으로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쉽게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선지자적 통찰과 예민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오늘의 영적 기상도를 분석하고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본래 본서는 처음부터 책으로 출판할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 아니라 <개혁교회> 회원들과 나눈 메시지들에서 골라 편집한 것이다.
장 목사에 의하면 성도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능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하다. 하나님께 동행하는 삶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미 언급한대로 성경신학적 바탕 위에서 논의하고 있다.
우선 그는 원죄가 말씀을 가볍게 여김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아담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소하게 여기고 범죄하게 되었다. 하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이해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이 교회 타락의 근본 이유이다. 기타의 다른 요소들이란 여기서 파생되는 결과일 뿐이다. 요즈음은 말씀이 왜곡되는 현상이 도처에서 난무해도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자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에 의하면 교회의 표면적인 타락을 지적하고 질타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타락을 자초하게 된 원인에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개선하는 일이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항상 그 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이해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속사의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과 그 목표점을 파악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이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17쪽).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항상 하나님나라의 속성에 부합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끊임없이 구현해 나가야 하는데,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고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가능하다.
저자는 ‘예배의 올바른 동기와 목적’에서 기도만능주의를 경계한다. 그에 의하면 기도만능주의는 대부분의 경우, 기도를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필자의 생각에 의하면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야베스의 기도>를 이런 수단을 위한 책으로 읽었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독(誤讀)이요 저자의 의도를 크게 벗어난 읽기라고 할 것이다.
저자는 ‘구원의 확신’에서, 복음이 성도의 궁극적 구언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성도의 사랑 때문이 아니고, 성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99쪽). 성도가 진정으로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며 진정한 효과가 있게 된다. 또한 궁극적 구원의 확신 교리는, 성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궁극적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라면,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하고 도움을 입기 마련이며, 따라서 구원을 위협하는 모든 대적과 적극적으로 투쟁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가 개혁파 신학의 중심교리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가능하며, 따라서 성령 안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사를 성취하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셨다. 성도들은 세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것을 통하여 이 새로운 질서에 속하게 된다. 세례는 수세자를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새 질서의 영역에 서 있다.
저자에 의하면,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질서의 세계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이며, 죽음을 극복한 자들이 누리는 영원한 나라”(112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이 땅에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도래시켰다.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작성하신 그 미래의 때에 도래하게 될 새로운 나라, 바로 그 미래의 나라를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분으로 옷 입게 될 때에, 그의 전 존재는 바로 이 나라로 옮기워지게 된다(골 1:13, 14). 이런 까닭에 여전히 시간의 제한 속에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효력으로 인도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를 주로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믿음은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이 때 영접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 곧 행동으로 나타나는 전인격적인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자는 소위 ‘신앙주의’의 함정을 경계한다. 신앙주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전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즉흥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결단을 촉구하게 되는데, 이런 심리적인 현상을 믿음 혹은 영접의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는 일부 선교회가 주로 캠퍼스에서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이의(異意)를 제기한다.
오늘날 교회원들의 구원이 안전한 것은, 바로 이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친히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통치권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주가 되신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한다고 하거나 영접한다고 할 때, 이것의 의미는 한층 심오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심오한 의미를 배경에 깔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며(롬 10:9),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롬 10:13),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순종을 자원하고 결심하는 심정이 있는 때가 아니고는, 복음이 바르게 전파된 사실이 없고, 구원론적 믿음과 시인은 부재(不在)하다(112쪽).
일부 독자는 이 책의 메시지를 접하면서 당황하거나 거부하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원의 진리를 깊이 상고하는 자세로 성경을 읽고 진리를 사모하는 심정으로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영적 통찰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독자에게 유익한 신앙서적이기에 강력히 추천한다.
저자 장수민
1975년 홍성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8년 아동문예문학상에서 동화 '콩할머니집 돌담과 호박넝쿨'이 당선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크리스 신화>, <신비한 나무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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