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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
이리 가운데 분투하는 양을 위한 콘서트/방선기/브니엘/[강도헌]
“육체는 우리에게 무덤이다.” 라는 유명한 경구는 플라톤이 대화록<<고르기아스>>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데아 세계에서 추방당한 영혼이 인간의 육체안에 감금돼 그것에 영향을 받아 저급화되고 소화되므로 어떡하든지 영혼은 감금의 상태에서 해방돼 자유를 누리며 본향인 이데아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에 육체를 죄악시하고 영혼을 신성시 하는 이원론과 그것에 기초해 고행을 통한 육체의 힘을 쇠약하게 만들거나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금욕주의적 실천을 가져왔다. 그리고 플라톤을 따랐던 사상계에서도 ‘영혼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자살이 칭송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많은 문헌들은 제국 내에 명망있는 문필가나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글에서 자살 행위를 칭송한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 세네카, 루칸, 타키투스, 플리니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세네카, 아리안, 오토, 카시우스 등은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세네카는 ‘산다는 것은 운명의 여신(Fortuna)의 변덕스러움에 복속되는 굴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자실을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요, 인간 의지의 승리’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또 루칸은 자살을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육체에 예속된 노예의 삶에서 탈피하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가르침과는 달리 기독교는 욕망으로 점철된 육체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면서도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는 것처럼 ‘매우 좋은’것으로 본다.
육체와 영혼, 세속과 거룩은 기독교에서 빠질 수 없는 거대한 화두 중의 하나이다.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진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육체적 한계와 영적인 무지를 소유한 인간의 실체이기에 기독교는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룰 수밖에 없다.
본서를 읽어가면서 세상 속에서 생존의 몸부림과 탐욕의 유혹들 그리고 영혼의 갈급함에 대한 갈증들에 대해 저자의 심도 깊은 묵상과 정직한 대답들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것 같은 마음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예전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된다는 부담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안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그리고 직장이나 가정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과 가치기준을 세우지 않음으로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지기도 한다.
본서의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것에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 넘어진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눈에서 떨어져 외진 잘 보이지 않는 곳, 나 혼자만의 공간, 그리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대중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작지만 우리에게는 큰 그 무엇들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끊임없는 질문들에 대해 본서는 우리와 함께 고민하고 있다.
저자 방선기
서울대 공대를 졸업, 미국 리폼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랜드 사목으로 직장사역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등 다수가 있다.
“육체는 우리에게 무덤이다.” 라는 유명한 경구는 플라톤이 대화록<<고르기아스>>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데아 세계에서 추방당한 영혼이 인간의 육체안에 감금돼 그것에 영향을 받아 저급화되고 소화되므로 어떡하든지 영혼은 감금의 상태에서 해방돼 자유를 누리며 본향인 이데아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에 육체를 죄악시하고 영혼을 신성시 하는 이원론과 그것에 기초해 고행을 통한 육체의 힘을 쇠약하게 만들거나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금욕주의적 실천을 가져왔다. 그리고 플라톤을 따랐던 사상계에서도 ‘영혼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키는’ 자살이 칭송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많은 문헌들은 제국 내에 명망있는 문필가나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글에서 자살 행위를 칭송한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 세네카, 루칸, 타키투스, 플리니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세네카, 아리안, 오토, 카시우스 등은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세네카는 ‘산다는 것은 운명의 여신(Fortuna)의 변덕스러움에 복속되는 굴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자실을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요, 인간 의지의 승리’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또 루칸은 자살을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육체에 예속된 노예의 삶에서 탈피하는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가르침과는 달리 기독교는 욕망으로 점철된 육체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면서도 기본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는 것처럼 ‘매우 좋은’것으로 본다.
육체와 영혼, 세속과 거룩은 기독교에서 빠질 수 없는 거대한 화두 중의 하나이다.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진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육체적 한계와 영적인 무지를 소유한 인간의 실체이기에 기독교는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룰 수밖에 없다.
본서를 읽어가면서 세상 속에서 생존의 몸부림과 탐욕의 유혹들 그리고 영혼의 갈급함에 대한 갈증들에 대해 저자의 심도 깊은 묵상과 정직한 대답들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것 같은 마음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예전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된다는 부담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안티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그리고 직장이나 가정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과 가치기준을 세우지 않음으로 작은 유혹 앞에서 무너지기도 한다.
본서의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것에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 넘어진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눈에서 떨어져 외진 잘 보이지 않는 곳, 나 혼자만의 공간, 그리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대중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작지만 우리에게는 큰 그 무엇들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끊임없는 질문들에 대해 본서는 우리와 함께 고민하고 있다.
저자 방선기
서울대 공대를 졸업, 미국 리폼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랜드 사목으로 직장사역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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