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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유혹과 죄,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죄를 이길 것인가/플로이드 맥클랑/예수전도단/[김정완]
성경을 통하면 누구든 한사람의 죄가 초래한 파멸적 결과를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기복 신앙이 여전한 우리 교계에서 그래도 강단을 타고 죄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설교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막는 것에 죄만큼 심각한 것이 더 있을까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그럼에도 아직 축복에 초점을 맞춘 설교가 넘쳐나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 질타하는 설교가 적어진 것 외에 죄란 무엇인지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설교가 많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유혹과 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그것인데, 아무래도 죄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지 않다 보니 불필요한 죄책감과 정죄감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제대로 된 죄책감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죄책감은 좌절과 절망을 강화하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목에 주저앉게 만든다. 유혹을 죄로 알고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을 가지면서 나타나게 된 현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것과 싸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의 정체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무엇이 죄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중략).... 죄는 유혹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와 유혹을 구분하셨다.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은 결코 죄가 아니지만, 흔히들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혼돈 속에 있을 때에는 사탄의 속임수에 쉽게 걸려든다. 사탄은 실제로 우리가 단지 유혹만 받았어도 죄를 지었다고 믿는 것을 아주 기뻐한다.」(p13~p14)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된다. 예수님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셨다.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식으로 죄를 정당화한다든지 죄에 초점을 맞추고 용감하게(!) 싸우려고 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어떤 시험이라도 주님이 피할 길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성경 말씀(고전 10:13)에 주목할 일이다. 어떤 경우든 죄나 유혹 거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피할 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하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질문과 답을 구성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인가?
「죄는 생각으로든 행동으로든 마음이나 양심에서 옳고 참되다고 알고 있는 것들을 고의로 어기는 것이다. 죄는 또한 하나님의 도덕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고통을 안겨 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 죄다. 또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는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하나님도 허락지 않으시는 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원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의적으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죄는 온 인류뿐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p21)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첫째가 회개다. 회개란 단순히 뉘우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회개란 죄의 근본적인 잘못을 깨닫는 것이다. 회개한 사람은 그 다음에 똑같은 유혹을 만나더라도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후회한 사람은 죄의 흔적이 남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할 뿐이다. 참된 회개는 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p28)
둘째, 전적인 헌신이다.
「야고보서 1장 7~8절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고 말한다 ....(중략).... 전적으로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p43~p45)
셋째,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누리게 되는 용서와 치유, 소망, 영생과 같은 축복들을 구하는 자들은 너무나 많지만, 그들의 대다수는 자기 의지가 죽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도록 하는 데 있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지를 꺾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으시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주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의 의지 위에 주님의 뜻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곳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선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 살겠다고 고집하지 않고 그분의 인격과 뜻을 우리 위에 둔다는 말이다.」(p51)
넷째, 빛 가운데 행하라.
「빛에는 능력이 있다. 조명이 잘 설치된 방은 그늘진 곳이 없다. 어둠으로 그늘진 곳이 있는 것은 물체가 빛을 가려서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인 생활에 그림자를 만들게 되고, 죄를 깨닫고 나서도 그림자를 없애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삶에는 빛보다 어둠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p72)
다섯째, 육체에 어떤 기회도 주지 말아야 한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고 바울은 우리에게 권고한다. 달리 말하자면 유혹을 받는 그런 장소에 일부러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기 위해, 또는 특히 어떤 부분이 연약하다는 것을 부인이라도 하듯이 유혹의 장소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지적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유혹을 피해야 한다. 절대로 장난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계속해서 유혹에 내버려두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p81)
예수님이 용서하시지 못할 죄나 죄의 분량이 없음을 기억하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기꺼이 주님께 가져가 그 죄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삶은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달렸다. 가장 확실한 보험, 바로 예수님이다.
성경을 통하면 누구든 한사람의 죄가 초래한 파멸적 결과를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기복 신앙이 여전한 우리 교계에서 그래도 강단을 타고 죄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설교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막는 것에 죄만큼 심각한 것이 더 있을까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그럼에도 아직 축복에 초점을 맞춘 설교가 넘쳐나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 질타하는 설교가 적어진 것 외에 죄란 무엇인지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설교가 많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유혹과 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그것인데, 아무래도 죄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지 않다 보니 불필요한 죄책감과 정죄감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제대로 된 죄책감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죄책감은 좌절과 절망을 강화하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목에 주저앉게 만든다. 유혹을 죄로 알고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을 가지면서 나타나게 된 현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것과 싸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의 정체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무엇이 죄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중략).... 죄는 유혹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와 유혹을 구분하셨다.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은 결코 죄가 아니지만, 흔히들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혼돈 속에 있을 때에는 사탄의 속임수에 쉽게 걸려든다. 사탄은 실제로 우리가 단지 유혹만 받았어도 죄를 지었다고 믿는 것을 아주 기뻐한다.」(p13~p14)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된다. 예수님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셨다.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식으로 죄를 정당화한다든지 죄에 초점을 맞추고 용감하게(!) 싸우려고 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어떤 시험이라도 주님이 피할 길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성경 말씀(고전 10:13)에 주목할 일이다. 어떤 경우든 죄나 유혹 거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피할 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하 책의 내용을 인용하여 질문과 답을 구성했다.
그렇다면 죄는 무엇인가?
「죄는 생각으로든 행동으로든 마음이나 양심에서 옳고 참되다고 알고 있는 것들을 고의로 어기는 것이다. 죄는 또한 하나님의 도덕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고통을 안겨 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 죄다. 또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는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하나님도 허락지 않으시는 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원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의적으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죄는 온 인류뿐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p21)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첫째가 회개다. 회개란 단순히 뉘우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회개란 죄의 근본적인 잘못을 깨닫는 것이다. 회개한 사람은 그 다음에 똑같은 유혹을 만나더라도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후회한 사람은 죄의 흔적이 남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할 뿐이다. 참된 회개는 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p28)
둘째, 전적인 헌신이다.
「야고보서 1장 7~8절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고 말한다 ....(중략).... 전적으로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p43~p45)
셋째,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누리게 되는 용서와 치유, 소망, 영생과 같은 축복들을 구하는 자들은 너무나 많지만, 그들의 대다수는 자기 의지가 죽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도록 하는 데 있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지를 꺾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으시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주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의 의지 위에 주님의 뜻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는 곳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선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 살겠다고 고집하지 않고 그분의 인격과 뜻을 우리 위에 둔다는 말이다.」(p51)
넷째, 빛 가운데 행하라.
「빛에는 능력이 있다. 조명이 잘 설치된 방은 그늘진 곳이 없다. 어둠으로 그늘진 곳이 있는 것은 물체가 빛을 가려서 그림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인 생활에 그림자를 만들게 되고, 죄를 깨닫고 나서도 그림자를 없애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삶에는 빛보다 어둠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p72)
다섯째, 육체에 어떤 기회도 주지 말아야 한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고 바울은 우리에게 권고한다. 달리 말하자면 유혹을 받는 그런 장소에 일부러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기 위해, 또는 특히 어떤 부분이 연약하다는 것을 부인이라도 하듯이 유혹의 장소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지적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유혹을 피해야 한다. 절대로 장난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계속해서 유혹에 내버려두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p81)
예수님이 용서하시지 못할 죄나 죄의 분량이 없음을 기억하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기꺼이 주님께 가져가 그 죄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삶은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달렸다. 가장 확실한 보험, 바로 예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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