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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녀를 성공시킨 어머니들
자녀를 성공시킨 어머니들/엘자앤드 데이비드 혼피셔/박미숙/금토/[북뉴스]
<어머니들- 남자의 제조자>. 이것은 1952년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나온 책의 제목이다(저자는 메이벌 바틀렛과 소피아 베이커). 책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어머니는 남자들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데이비드와 엘자 혼피셔(David & Elsa Hornfischer)가 쓴 [Mother Knew Best]도 이 사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우리말로는 "자녀를 성공시킨 어머니들"로 번역됨).
토머스 에디슨(미국의 발명가, 1847-1931)은 그의 어머니 낸시 엘리엇 에디슨에 대해 회상하면서 "어머니의 도움이 나를 만들었다"고 했다.
에디슨은 어린 시절부터 기계에 몰두하였다. 이런 강렬한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어린 에디슨은 학교와의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였다. 결혼 전 교사였던 어머니 낸시는 정규 교육 세 달만에 그를 자퇴시키고 자신이 가르쳤다.
그녀는 그의 질문들에 대해 격려해주고 그에게 <로마제국흥망사>와 같은 기본적인 고전을 소개했다. 그녀는 노련하게 톰의 교육에 접근하여 그는 이미 아홉 살에 과학 분야에서 광범위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들이미는 어려운 문제들을 큰 소리로 읽어주거나 관심을 보이면서 그의 과학적인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에디슨은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한 소년에게 가장 열정적인 투사였고, 나는 바로 그때 내가 어머니에게 걸 맞는 존재여야 하고 그녀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자립적인 기질을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93개의 특허를 낸 이 발명가는 전기를 기초로 한 2차 산업혁명으로 우리를 인도한 공로자로 널리 추앙을 받는다. 에디슨은 이제 위대한 미국인을 뽑는 여론 조사에서 링컨, 루즈벨트, 워싱턴, 프랭클린과 같은 서열에 놓이고 있다.
지미 카터(미국의 제39대 대통령, 1924- )의 어머니는 릴리언 카터 여사이다. 카터 여사가 아들에게 준 가르침은 이것이다: "네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비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라."
미국의 최고 권위지 <워싱턴 포스트>가 "국가의 할머니"라고 부른 릴리언 카터는 조지아의 플레인스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지미 카터의 전기 작가 브루스 매즐리시와 에드윈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그녀는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냈는데, 그것은 카터네가 조지아 주 어처리 부근의 단 두 집뿐이었던 백인 가정 중 하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독서광"이라고 표현할 만큼 독서에 열중했고 남의 집을 들락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1966년 예순 여덟의 나이에 릴리언은 인도에서 근무하는 평화봉사단에 참가했다. 발랄하며 오랫동안 자아 수련이 되어 있고 생산적인 릴리언 카터는 일찍이 사람은 오직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미 카터는 언제나 어머니의 인생을 본받으려고 했다.
대통령직을 물러난 지미 카터는 영세민의 집을 무료로 고쳐주는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분쟁 중재를 통한 평화유지에 헌신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1910-1997,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의 어머니는 드래나 보쟈슈이다. 테레사의 어머니는 "선행을 할 때는 겸손하게, 마치 바다에 조약돌 하나를 던지듯이 하여라"라고 가르쳤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신부나 고위 성직자들이 자주 그 집을 방문하였다. 가족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과 돈을 주었고, 그들의 문은 항상 음식이나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어느 날 아그네스(테레사의 본명)가 물었다. "날마다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그녀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몇 사람은 친척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우리 가족이란다."
한 전기작가(데이비드 포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드래나는 강한 정신력을 가진 불굴의 여인으로 관대하고 근면하였다. 그녀의 집은 항상 파티와 친절로 알려져 있었다.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진 뒷날에도 그녀의 집은 여전히 친절과 점잖음과 관대함과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등으로 유명했다."
마더 테레사는 박애에 대한 시들 줄 모르는 믿음을 보여 주었으며 그녀의 필생의 일에 대한 개인적인 보상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1979년에 수여된 노벨평화상은 받아들였다. 1997년 마더 테레사는 전세계인의 애도 속에 숭고한 삶을 마쳤다.
노먼 빈센트 필(목사)의 어머니는 애너 필 여사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너는 인생을 사랑해야 한다. 닥치는 대로 읽고, 모든 것을 배우거라.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라. 너는 세계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애너 필은 이야기와 동화를 들려주고, 특히 이름 없는 소년에서 훌륭한 인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강조해 이야기해 줌으로써 노먼의 열정에 불을 지펴 주었다. 신앙심이 깊고, 의지가 굳은 애너는 어린 노먼이 성직자가 되게 해 달라고 꾸준히 기도를 올렸다.
그의 전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어머니의 격려를 받은 노먼은 스스로 자신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노먼 빈센트 필은 그 후 <적극적 사고의 힘>같은 책들이나 자신이 발행하는 <가이드포스트>잡지, 목회활동 등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향상시키도록 격려하는 일을 해 왔다.
마틴 루터 킹(인권운동가, 1929-68, 1964년 노벨평화상)의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은 이렇게 가르쳤다: "너 자신이 누구보다 뒤진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아라. 언제나 너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라."
전기 작가(스티븐 오츠)는 마틴 루터 킹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틴 루터는 재주 있고 영리한 소년으로, 책읽기를 사랑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으며, 때로는 마치 어른처럼 말하는 아이였다."
어머니 앨버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난 마틴 루터는 사람들이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겠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두고 보세요. 난 자라서 뭔가 뛰어난 사람이 될 거예요."
학구적이고 웅변에 능한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역사적인 혼란기에 비폭력과 인종적 정의와 평등 사상의 대변자가 되었다(1955년 12월, 그는 시내버스의 흑인 차별대우에 반대하여 5만의 흑인시민이 벌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주도하여 1년 후에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글 송광택 발행인
<어머니들- 남자의 제조자>. 이것은 1952년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나온 책의 제목이다(저자는 메이벌 바틀렛과 소피아 베이커). 책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어머니는 남자들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데이비드와 엘자 혼피셔(David & Elsa Hornfischer)가 쓴 [Mother Knew Best]도 이 사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우리말로는 "자녀를 성공시킨 어머니들"로 번역됨).
토머스 에디슨(미국의 발명가, 1847-1931)은 그의 어머니 낸시 엘리엇 에디슨에 대해 회상하면서 "어머니의 도움이 나를 만들었다"고 했다.
에디슨은 어린 시절부터 기계에 몰두하였다. 이런 강렬한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어린 에디슨은 학교와의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였다. 결혼 전 교사였던 어머니 낸시는 정규 교육 세 달만에 그를 자퇴시키고 자신이 가르쳤다.
그녀는 그의 질문들에 대해 격려해주고 그에게 <로마제국흥망사>와 같은 기본적인 고전을 소개했다. 그녀는 노련하게 톰의 교육에 접근하여 그는 이미 아홉 살에 과학 분야에서 광범위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들이미는 어려운 문제들을 큰 소리로 읽어주거나 관심을 보이면서 그의 과학적인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에디슨은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한 소년에게 가장 열정적인 투사였고, 나는 바로 그때 내가 어머니에게 걸 맞는 존재여야 하고 그녀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자립적인 기질을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93개의 특허를 낸 이 발명가는 전기를 기초로 한 2차 산업혁명으로 우리를 인도한 공로자로 널리 추앙을 받는다. 에디슨은 이제 위대한 미국인을 뽑는 여론 조사에서 링컨, 루즈벨트, 워싱턴, 프랭클린과 같은 서열에 놓이고 있다.
지미 카터(미국의 제39대 대통령, 1924- )의 어머니는 릴리언 카터 여사이다. 카터 여사가 아들에게 준 가르침은 이것이다: "네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비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라."
미국의 최고 권위지 <워싱턴 포스트>가 "국가의 할머니"라고 부른 릴리언 카터는 조지아의 플레인스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지미 카터의 전기 작가 브루스 매즐리시와 에드윈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그녀는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냈는데, 그것은 카터네가 조지아 주 어처리 부근의 단 두 집뿐이었던 백인 가정 중 하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독서광"이라고 표현할 만큼 독서에 열중했고 남의 집을 들락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1966년 예순 여덟의 나이에 릴리언은 인도에서 근무하는 평화봉사단에 참가했다. 발랄하며 오랫동안 자아 수련이 되어 있고 생산적인 릴리언 카터는 일찍이 사람은 오직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미 카터는 언제나 어머니의 인생을 본받으려고 했다.
대통령직을 물러난 지미 카터는 영세민의 집을 무료로 고쳐주는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분쟁 중재를 통한 평화유지에 헌신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1910-1997,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의 어머니는 드래나 보쟈슈이다. 테레사의 어머니는 "선행을 할 때는 겸손하게, 마치 바다에 조약돌 하나를 던지듯이 하여라"라고 가르쳤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신부나 고위 성직자들이 자주 그 집을 방문하였다. 가족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과 돈을 주었고, 그들의 문은 항상 음식이나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어느 날 아그네스(테레사의 본명)가 물었다. "날마다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오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그녀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몇 사람은 친척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우리 가족이란다."
한 전기작가(데이비드 포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드래나는 강한 정신력을 가진 불굴의 여인으로 관대하고 근면하였다. 그녀의 집은 항상 파티와 친절로 알려져 있었다.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진 뒷날에도 그녀의 집은 여전히 친절과 점잖음과 관대함과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등으로 유명했다."
마더 테레사는 박애에 대한 시들 줄 모르는 믿음을 보여 주었으며 그녀의 필생의 일에 대한 개인적인 보상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1979년에 수여된 노벨평화상은 받아들였다. 1997년 마더 테레사는 전세계인의 애도 속에 숭고한 삶을 마쳤다.
노먼 빈센트 필(목사)의 어머니는 애너 필 여사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너는 인생을 사랑해야 한다. 닥치는 대로 읽고, 모든 것을 배우거라.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라. 너는 세계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애너 필은 이야기와 동화를 들려주고, 특히 이름 없는 소년에서 훌륭한 인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강조해 이야기해 줌으로써 노먼의 열정에 불을 지펴 주었다. 신앙심이 깊고, 의지가 굳은 애너는 어린 노먼이 성직자가 되게 해 달라고 꾸준히 기도를 올렸다.
그의 전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어머니의 격려를 받은 노먼은 스스로 자신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노먼 빈센트 필은 그 후 <적극적 사고의 힘>같은 책들이나 자신이 발행하는 <가이드포스트>잡지, 목회활동 등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향상시키도록 격려하는 일을 해 왔다.
마틴 루터 킹(인권운동가, 1929-68, 1964년 노벨평화상)의 어머니 앨버타 윌리엄스 킹은 이렇게 가르쳤다: "너 자신이 누구보다 뒤진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아라. 언제나 너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라."
전기 작가(스티븐 오츠)는 마틴 루터 킹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틴 루터는 재주 있고 영리한 소년으로, 책읽기를 사랑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으며, 때로는 마치 어른처럼 말하는 아이였다."
어머니 앨버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난 마틴 루터는 사람들이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겠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두고 보세요. 난 자라서 뭔가 뛰어난 사람이 될 거예요."
학구적이고 웅변에 능한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역사적인 혼란기에 비폭력과 인종적 정의와 평등 사상의 대변자가 되었다(1955년 12월, 그는 시내버스의 흑인 차별대우에 반대하여 5만의 흑인시민이 벌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주도하여 1년 후에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글 송광택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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