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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히신)/마틴 로이드 존스/정상윤/복있는사람/[북뉴스]
공부에 맛을 들이면 그것보다 더한 병이 없습니다.
새벽을 벗 삼는 것은 물론이고 때만 되면 관련 책을 사들이느라 지갑 얇아지는 것도 잊습니다. 학습자는 새로운 지식을 하나둘씩 알아가는 재미와 맞바꿀 그런 비용을 어느 때든지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 탓에 지식욕을 성욕에 견주는 이도 있습니다. 그만큼 욕구가 강렬하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지식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의지가 사서와 사적의 태동을 가능케 한 사실을 떠올리면 지식욕의 끝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식 습득에 대한 열망이 이와 같음에도 여기 한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사실 외에는 더 이상 머리 속에 담아두지 않기로 작정한 듯 보입니다. 그렇다고 머리가 아둔하다거나 다혈질적인 성격이어서 공부가 체질에 맞지 않다거나 물질적으로 지원해줄 세력이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최고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시민권을 소지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은데, 사실 그보다는 훨씬 좋은 신분이었습니다. 화려한 가문을 배경으로 두르고 학식 또한 높았으니 그만하면 어디 내놔도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먼 시일 후 아덴에서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과 대등하게 토론을 벌일 때도 학식이 전혀 녹슬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오직 한 가지만 알면 족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알기로 한 것 그 한 가지는 당대 최고의 문화를 꽃피운 그리스인들에게는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상식 이하의 것이었으며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에게는 입에 담기조차 싫은 터부와도 같았습니다.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지식. 그것은 곧 그를 필시 외톨이로 만들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통칭해서 그리스·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완성한 양대 산맥입니다. 그 둘을 모두 얻지 못하면 어느 한쪽이라도 수긍할만한 지식을 신봉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둘에게 환영받지 못할 지식을 최고의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지식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지식으로 세상을 바꿀 마음을 품은 그는 세상이 보기에 미친 사람일뿐입니다.
요즘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그가 평생에 걸쳐 유일하게 알고자 했던 지식만으로는 세상이 결코 환영하지 않을 것을 잘 안 사람들은 그 지식에 여러 가지 것들을 첨가합니다. 그리스인들이나 유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밥상을 차리려는 노력은 그 양자를 끌어들일 묘책일 뿐 아니라 양자를 아우르는 포용력 높은 선택이라고 찬사를 받을 만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 방식을 따랐습니다. 정말 세상이 달라졌을까? 아닙니다. 세상은 기대와 달리 그 지식에서 더욱 멀어졌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제 그의 지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그 지식의 핵심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크게 회심한 바울입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인 가마리엘의 제자로 로마의 법률과 과학, 그리스의 철학에 모두 능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그가 오늘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바울이 알고자 했던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 하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는 자주 잊혀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위에 무언가를 덧붙이려 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본질이 사라진 곳에선 허상이 진리인양 판을 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허상의 본 모습을 눈치채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더군다나 겉보기에 좋은 허상을 전파하는 사람들까지 두루 나타나있고 보면 오늘 교회가 힘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겉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잔잔하고 진중하지만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 책의 진정한 목소리는 의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향해 그랬듯이 저자는 이 땅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관심이 없을 뿐더러 있다하더라도 그분만으로는 설득력이 없으니 이벤트로 관심을 끌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그만 헛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고 가슴을 치며 꾸짖고 있습니다.
설교를 할 당시 저자의 나이가 78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설교는 유언과 같은 비중을 갖고 있습니다. 유언에 담긴 의미를 굳이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한탄과 꾸짖음과 권면이 전편을 휘두르는 이 설교는 70여 페이지의 소책자에 담겼지만 호소력 짙은 문장과 연구자적 글 전개에 힘입어 무게감이 넘칩니다. 에두르는 법 없이 정곡을 찌르는 저자 특유의 논리가 마지막 불꽃이 되어 페이지를 더할수록 뜨겁게 빛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알지 않기로 작정한 때의 상황을 통해 우린 오늘 우리가 취해야할 입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믿어야하는지 그 본질적인 부분과 만날 수 있습니다.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 그리스는 정치학과 철학의 보고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간성과 더 나은 세계에 관해 궁구했습니다. 그럼에도 세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본질적으로 나는 누구인지에 관해 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통계를 보면 '사회 어떤 집단보다 철학자들의 자살율이 더 높았다'고 합니다. 철학과 정치학의 실패. 그것이 화려하게 꽃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어두운 이면이었습니다.
현대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새로운 지식과 과학과 철학이 완벽한 세상을 만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세상은 과거와 다를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인 톨스토이는 "인생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유일하게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고 말했습니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의 발전에는 도덕적 간극이 있다. 인간은 환경에 대한 물리력은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있지만, 사회적 합의는 그만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파괴 욕구는 더더욱 누르지 못하고 있다. 유일하게 진보가 이뤄진 인간 활동의 장은 기술뿐'이라고 썼으며 과학적 인본주의의 신봉자인 올더스 헉슬리는 "평생 인간의 문제에 착념해 왔는데도, 결국은 '좀 더 친절해지려고 애쓰라'는 것보다 더 나은 충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약간 당혹스럽다"고 했습니다. 부단한 진보에의 노력이 위와 같은 결과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린도전서 2:6) 바울은 그 원인을 세상의 지혜가 궁극적으로 '없어질 것'이라는 데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없어지지 않을 지혜를 구하는 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과 정치학에 능통했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 알고자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정치가나 철학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류를 구원하기는커녕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성을 지닌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주셨습니다. 나사렛 예수, 영광의 주를 주셨습니다. 예수는 이후 행한 기적과 가르침과 삶으로 당신이 영광의 주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예수를 알았습니다. 더 이상 세상 학문에 메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한 세상 학문을 좇을 이유도, 그 학문에 미련이 남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에겐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면 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그가 가는 곳곳에서 수많은 회심자를 낳았습니다. 그가 전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뿐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이름 위에 없어질 세상 철학과 청치를 덧씌울 이유가 우리에겐 전혀 없습니다. 무언가 덧씌울 게 있으면 멋지게 보이리라는 기대는 착각일 뿐입니다. 껍질을 벗겨야 비로소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나옵니다. 우리가 외형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능력은 나올 여지가 없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곳에 세상을 바꿀 힘과 의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린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글 김정완
저자 마틴 로이드 존스
저자는 '30년 동안 런던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사역한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가이자 탁월한 복음주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로마서 강해 시리즈〉, 〈하나님 나라〉, 〈부흥〉 등 깊이 있는 저작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한 그는 탁월한 영성을 바탕으로 동시대인들에게 영적 도전과 각성을 준 바 있습니다.
공부에 맛을 들이면 그것보다 더한 병이 없습니다.
새벽을 벗 삼는 것은 물론이고 때만 되면 관련 책을 사들이느라 지갑 얇아지는 것도 잊습니다. 학습자는 새로운 지식을 하나둘씩 알아가는 재미와 맞바꿀 그런 비용을 어느 때든지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 탓에 지식욕을 성욕에 견주는 이도 있습니다. 그만큼 욕구가 강렬하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지식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의지가 사서와 사적의 태동을 가능케 한 사실을 떠올리면 지식욕의 끝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식 습득에 대한 열망이 이와 같음에도 여기 한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사실 외에는 더 이상 머리 속에 담아두지 않기로 작정한 듯 보입니다. 그렇다고 머리가 아둔하다거나 다혈질적인 성격이어서 공부가 체질에 맞지 않다거나 물질적으로 지원해줄 세력이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최고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시민권을 소지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은데, 사실 그보다는 훨씬 좋은 신분이었습니다. 화려한 가문을 배경으로 두르고 학식 또한 높았으니 그만하면 어디 내놔도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먼 시일 후 아덴에서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과 대등하게 토론을 벌일 때도 학식이 전혀 녹슬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오직 한 가지만 알면 족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알기로 한 것 그 한 가지는 당대 최고의 문화를 꽃피운 그리스인들에게는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상식 이하의 것이었으며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에게는 입에 담기조차 싫은 터부와도 같았습니다. 어느 한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지식. 그것은 곧 그를 필시 외톨이로 만들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통칭해서 그리스·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완성한 양대 산맥입니다. 그 둘을 모두 얻지 못하면 어느 한쪽이라도 수긍할만한 지식을 신봉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둘에게 환영받지 못할 지식을 최고의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지식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지식으로 세상을 바꿀 마음을 품은 그는 세상이 보기에 미친 사람일뿐입니다.
요즘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그가 평생에 걸쳐 유일하게 알고자 했던 지식만으로는 세상이 결코 환영하지 않을 것을 잘 안 사람들은 그 지식에 여러 가지 것들을 첨가합니다. 그리스인들이나 유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밥상을 차리려는 노력은 그 양자를 끌어들일 묘책일 뿐 아니라 양자를 아우르는 포용력 높은 선택이라고 찬사를 받을 만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 방식을 따랐습니다. 정말 세상이 달라졌을까? 아닙니다. 세상은 기대와 달리 그 지식에서 더욱 멀어졌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제 그의 지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그 지식의 핵심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크게 회심한 바울입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인 가마리엘의 제자로 로마의 법률과 과학, 그리스의 철학에 모두 능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그가 오늘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바울이 알고자 했던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 하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는 자주 잊혀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위에 무언가를 덧붙이려 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본질이 사라진 곳에선 허상이 진리인양 판을 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허상의 본 모습을 눈치채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더군다나 겉보기에 좋은 허상을 전파하는 사람들까지 두루 나타나있고 보면 오늘 교회가 힘을 잃고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겉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잔잔하고 진중하지만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 책의 진정한 목소리는 의분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향해 그랬듯이 저자는 이 땅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관심이 없을 뿐더러 있다하더라도 그분만으로는 설득력이 없으니 이벤트로 관심을 끌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 이제 그만 헛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고 가슴을 치며 꾸짖고 있습니다.
설교를 할 당시 저자의 나이가 78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설교는 유언과 같은 비중을 갖고 있습니다. 유언에 담긴 의미를 굳이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한탄과 꾸짖음과 권면이 전편을 휘두르는 이 설교는 70여 페이지의 소책자에 담겼지만 호소력 짙은 문장과 연구자적 글 전개에 힘입어 무게감이 넘칩니다. 에두르는 법 없이 정곡을 찌르는 저자 특유의 논리가 마지막 불꽃이 되어 페이지를 더할수록 뜨겁게 빛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알지 않기로 작정한 때의 상황을 통해 우린 오늘 우리가 취해야할 입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믿어야하는지 그 본질적인 부분과 만날 수 있습니다.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 그리스는 정치학과 철학의 보고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간성과 더 나은 세계에 관해 궁구했습니다. 그럼에도 세계는 나아지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본질적으로 나는 누구인지에 관해 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통계를 보면 '사회 어떤 집단보다 철학자들의 자살율이 더 높았다'고 합니다. 철학과 정치학의 실패. 그것이 화려하게 꽃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어두운 이면이었습니다.
현대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새로운 지식과 과학과 철학이 완벽한 세상을 만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세상은 과거와 다를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인 톨스토이는 "인생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유일하게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고 말했습니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의 발전에는 도덕적 간극이 있다. 인간은 환경에 대한 물리력은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있지만, 사회적 합의는 그만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파괴 욕구는 더더욱 누르지 못하고 있다. 유일하게 진보가 이뤄진 인간 활동의 장은 기술뿐'이라고 썼으며 과학적 인본주의의 신봉자인 올더스 헉슬리는 "평생 인간의 문제에 착념해 왔는데도, 결국은 '좀 더 친절해지려고 애쓰라'는 것보다 더 나은 충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약간 당혹스럽다"고 했습니다. 부단한 진보에의 노력이 위와 같은 결과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린도전서 2:6) 바울은 그 원인을 세상의 지혜가 궁극적으로 '없어질 것'이라는 데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없어지지 않을 지혜를 구하는 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과 정치학에 능통했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 알고자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정치가나 철학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류를 구원하기는커녕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성을 지닌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주셨습니다. 나사렛 예수, 영광의 주를 주셨습니다. 예수는 이후 행한 기적과 가르침과 삶으로 당신이 영광의 주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바울은 그 예수를 알았습니다. 더 이상 세상 학문에 메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한 세상 학문을 좇을 이유도, 그 학문에 미련이 남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에겐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면 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그가 가는 곳곳에서 수많은 회심자를 낳았습니다. 그가 전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뿐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이름 위에 없어질 세상 철학과 청치를 덧씌울 이유가 우리에겐 전혀 없습니다. 무언가 덧씌울 게 있으면 멋지게 보이리라는 기대는 착각일 뿐입니다. 껍질을 벗겨야 비로소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나옵니다. 우리가 외형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능력은 나올 여지가 없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곳에 세상을 바꿀 힘과 의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린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글 김정완
저자 마틴 로이드 존스
저자는 '30년 동안 런던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사역한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가이자 탁월한 복음주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로마서 강해 시리즈〉, 〈하나님 나라〉, 〈부흥〉 등 깊이 있는 저작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한 그는 탁월한 영성을 바탕으로 동시대인들에게 영적 도전과 각성을 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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