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분명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더 있습니다 더 본 사람들의 목소리
우린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전적으로 전지전능은 '어떠한 사물이라도 잘 알고,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뜻이 광대하셔서 누구도 그분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상태를 '하나님이 우리 머리털까지 세셨다'고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는 그와 같은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이 그와 같은 상대방입니다. 피조물에 관한 한 우리 또한 같은 범주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지위가 아들로 격상되었을 뿐입니다.
은혜는 잘 한 것 없는 누군가에게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그와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종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까지 얻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외와 경배의 대상입니다.
우리나라엔 수많은 교단과 교파가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교파와 초교파 교회가 활발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인격적으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땅 끝까지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들을 통해 거듭남과 치유 등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들을 보며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에 합한 이들, 곧 부르심에 응한 이들을 기름 부으시고 당신의 잃어버린 양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보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람에게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달리 비판적으로 타 교단과 그 교단에 속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시각이 엄존해서 안타까움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자기 교단의 하나님 관과 세계관, 성경 해석적 입장이 전적으로 옳다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이 성경적"이라는 말은 그와 같은 상태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한 꺼풀 벗겨내면 다른 교단은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물론 서로 이단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은연중에 서로를 배척하게 되었을까요? 언급한 대로 우리 교단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확신이 검증을 거쳤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럼 검증은 누구에게 받아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겠지요. 당연히 직접 당사자인 하나님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이 특정 교단만을 인정한다고 공식 선언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광대해서 어느 누구도, 쟁쟁한 사람들이 모인 교단이라도 그분의 뜻을 모두 담아내기란 어렵습니다. 만일 특정인이나 특정 교단이 하나님의 뜻을 전부 담아냈다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성립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이끈 모세도 한 번의 실수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같았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에게 세례를 준 요한조차 자기 제자들을 보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기다린 그분이 맞는지 묻도록 했습니다.
그처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자기 안에 전부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성정에 맞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이 있었고, 비록 제한적이었을 망정 그들은 그분의 뜻을 이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당신의 뜻에 합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 교단에 비춰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교단도 하나님의 광대한 뜻을 전부 담아낼 수 없습니다. 교단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거나 계획이 광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단이든 그 교단이 담아낼 분량만큼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은 바로 그런 태도에서 나옵니다. 그와 같이 겸손한 자세를 갖고 있는데, 타 교단이 어떻다고 손가락질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입장이 다르더라도 서로 격려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힘쓰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데 전력투구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이 책, 《더 있다》는 개인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현실과 문제의식에서 기획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 이태형은 책의 머리글에서 국민일보 공채 1기로 기자생활을 시작한 후 ‘특별히 신앙적 관점에서 먼저 깨달은 믿음의 선배들을 만나는 동안 그들이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한 가지 질문과 맞닥뜨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했을까?” 곧바로 그는 결론마저 내버렸습니다. “눈이 뜨이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존재의 원형질까지 변한 것같이 행동할 수 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섣부른 독자는 질문과 답변이 집필 동기라고 짐작할 것입니다. 분명 그와 같은 질문과 답변이 저자가 줄곧 사람들을 만나는 데 추동력을 제공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집필 동기는 아닙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든 은사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할 것 없이 그들 모두 믿는 바에 헌신하였고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과 믿음의 패턴들이 저마다 달랐다는 저자의 또 다른 고백이 집필동기의 단초가 되었다면 다음 진술이야말로 제가 위에서 언급한 현실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직접적인 집필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복음주의 기독교인과 은사주의자, 자유주의자, 필자)은 자신이 믿는 믿음의 방식대로 확신을 갖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쪽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읽는 책도 달랐다. 내가 만난 은사주의자들 가운데에는 복음주의권의 책에 대해 무지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복음주의권 사람들은 은사주의자들이 읽는 책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무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자의 현실 인식이 얼마나 엄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만큼 직접적이고 비판적입니다. 자신 또한 그와 같은 비판의식의 칼날을 비켜갈 수 없다는 결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그들에게서 배웠고 ‘존중과 화해’의 덕목을 세워갈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찬가지로 이 땅의 교계와 크리스천들이 갖춰야할 덕목 또한 ‘존중과 화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바탕 위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 모두! 이제, 함께 가자.”고 그가 에필로그에 갈무리한 외침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인물은 모두 10명입니다. 달라스 윌라드, 리처드 마우, 마이크 비클, 이민아, 빌 존슨, 로렌 커닝햄, 유진 피터슨, 손기철, 유기성, 대천덕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을 그들의 과거 행보와 현재의 발언 내용에 따라 복음주의자, 은사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으로 분류하기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투박하게 말해서 성령운동에 대한 시각차를 근거로 성령운동을 옹호하는 측은 은사주의자, 반대하면 복음주의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는 신앙에 윤리를 접목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자, 은사주의자와 다른 형태의 궤적을 그립니다. 여기선 굳이 위 10명을 ‘무슨 무슨 주의자’로 구분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본 글의 목적이 아닐뿐더러 저자가 이 책을 기획한 의도에도 반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말고도 누구 또는 무엇이든 특정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분류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분류하면 대상 사이에 차이를 드러낼 수 있고, 더 나아가 차이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한 분류는 자기 발전의 기회가 됩니다. 반대로 분류하려는 목적이 일정 선을 그으려는 데 있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분류가 자칫 ‘편 가르기’로 비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서로 본질적인 문제, 곧 하나님께서 그들 복음주의자, 은사주의자, 자유주의자 각각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신 엄연한 사실을 고의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에 따른 폐해를 교단 또는 크리스천들이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엽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방언’을 대하는 태도 변화는 그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제 복음주의자나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방언에 대한 이물감을 크게 호소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방언에 담긴 의미를 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두 가지 사실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곧 교계가 적극적으로 경계를 허물고 상대방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을 적극 권고하는 차원의 글쓰기가 그 사실관계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자발적인 경계 허물기에 나선 교계 현실을 적잖이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고 하나님나라 안과 밖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 전도되는 데 있습니다. 그 일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크리스천을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사례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자사지(!)의 입장에서 사단의 전략을 통찰한 그 책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제자 웜우드에게 가르친 ‘크리스천을 무력화시키는 전술’ 중 하나는 크리스천에게 '자기 확신과 영적 우월감'을 심어줌으로써 그들 사이에 '존중과 화해'가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을 통해 “타인에게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성찰적 겸손과 영적 각성이 들불처럼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이 땅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줄곧 관철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