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과학과 신앙의 충돌속에서의 신자의 신앙고백
우리나라에서 서로 의견이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곧 아군이 아니라 적군으로 간주해버리는 듯한 모습들이 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견해가 다른 이들끼리 정상적인 토론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해보이는 경우마저 있다. 서로의 의견을 차분히 듣고 이해하며 하는 토론이 아니라 선입견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적대시 하여 심한 경우에는 인신공격과 비난이 난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우리의 토론 문화 속에서 본 책과 같은 다양한 견해를 담은 책과 반론을 담아 내는 나라들의 모습을 대하면 부럽고 신기하다.
이 책은 책 소개에서 나오듯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복음주의의 4가지 견해인 진화적 창조론, 원형적 창조론, 오래된 지구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각 챕터에서 실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의 반론을 담고 그에 대해 발제자의 재반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담의 역사성을 주제로 하지만 그 기저에는 창조와 진화의 문제가 담겨 있고 그 속에서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거나 원형으로 하는 비역사성을 담아내는 이들과 아담의 역사적 존재함을 주장하는 이들로 나뉘어진다. 아담의 비역사성의 부류에 속하는 이들은 진화를 주장하거나 허용한다.
또한 아담의 역사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문자적 그대로의 창조와 간격이론을 바탕으로한 오래된 지구창조론으로 구분된다.
◎ 진화적 창조론
이 주장을 소개하는 라무뤼는 진화에 대한 주장을 하면서 역사적 아담은 부인하지만 아담으로 묘사될 수 있는 무리들로부터 인간이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라무뤼는 성경과 과학을 일치하는 것을 반대한다. 고대의 잘못된 과학적 사실이 성경에 반영되어 있기에 그것을 과학과 일치 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원형적 창조론
월튼은 라무뤼와 달리 역사적 인물로서 아담을 본다. 그러나 이것이 생물학적 아담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역사적 아담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것보다는 원형으로서의 아담을 이야기한다. 즉 아담이 최초의 인물이거나 인물의 조상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오래된 지구창조론
콜린스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이야기하는 배릭과 더불어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문자적 6일의 창조를 인정하기 보다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주장한다.
◎ 젊은 지구 창조론
배릭은 창세기에 나온대로 6일동안 세상이 창조되고 아담이 실제적 역사적 인물로 믿는다. 이 책의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는 맹목적 창조과학적 견해로 규정하고 배릭에 대해서도 그런 면을 이야기하지만 배릭의 주장에는 사실 과학적 주장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의 논리를 신학적 차원에서만 이야기한다는 측면에서 그를 과학일치주의자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론한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는 그저 진화와 창조에 대한 과학자와 보수 신학자간의 논쟁이라고 피상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경청하며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다른 점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한다.
아담의 역사성에 대해 이 네 명의 학자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은 이 네 명이 한 믿음을 가진 아군임을 알 수 있다. 이 학자들 중 라무뤼만 하더라도 진화를 이야기하고 아담의 역사성을 부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분명히 한다. 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성경에 대한 어느정도의 무오성도 믿는 듯하다. 단지 성경에 대한 무오성의 정의와 그 범위, 세밀성이 다른 듯하다. 그러기에 이런 한계성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하는 듯하면서도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성경과 과학의 관계 또는 우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상당한 의견차이가 발생한다.
이런 상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라는 테두리가 중요한 것은 무신론적 진화론자나 신앙과 과학을 이원화한 학자와는 차별성을 가지며 적군이라기보다는 근원적으로 아군의 테두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이 네 학자는 서로의 의견 충돌과 서로에 대한 견해 차이는 갖고 있어도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고 있고 그 중 진화적 창조론을 주장하는 라무뤼는 젊은 지구창조론자로서 연구하고 학문과 신학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진화적 창조론이 더 타당하다는 결론을 갖게 되는 그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고백하는 진솔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원론적 신앙이나 포기와는 다르다.
사실 한국교계에서는 젊은 지구창조론이나 조금 폭넓으면 오래된 지구창조론까지만 복음주의로 규정하는 성향이 있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에 대해서도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삼각한 문제로 규정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교계의 독특성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맹목적으로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것도 건강한 토론 문화는 아닐 듯 싶다. 그 어느 쪽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대속에 대한 부인이나 왜곡이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또는 절대적으로 비본질적이라고 말할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이야기해도 복음에 대해 타협적이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듯 싶다 – 네 관점에 대한 챕터 뒤에는 목회적 관점에서 역사적 아담에 대해 두가지 입장에서 주장하는 두 목회자가 나온다.
이들중 반대쪽에 속한 보이드도 창조과학회쪽에서 주장하다가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게 된 과정을 자신의 신앙고백적 과정가운데에서 벌어진 일로 고백한다.
이것은 그들이 비록 복음주의적 입장에서는 과격하게 느껴지고 비복음적 요소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약화시키는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신앙에 대한 충심과 그들의 오만이나 과학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주장은 아님을 보여준다.
반대로 이 책의 젊은 지구창조를 이야기하는 이들도 과학을 무시하는 맹목성이 아니라 그들이 비록 과학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성경자체에 대한 믿음과 그 논리를 펴는 것은 아니라는 것, 곧 성경과 과학의 일치주의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과 과학의 이원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적 사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적인 사실과 그 진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고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경에 묘사된 어떤 내용에 대해 내 현재의 과학적 사실로 설명하고 답을 내리려는 무리수를 넘어선다. 예컨대 홍해의 갈라짐을 자연현상으로만 해석하려 들거나 문학적 표현 자체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는 무리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것이 당시의 문학적 표현인지 또는 사실적 표현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애매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또 그것을 절대화시키는 위험도 피해야 한다. 종종 과학적 관점으로만 보는 시각은 성경의 기적성을 무조건 부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무조건 신앙적 관점으로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섭리보다 나의 독선이 앞설 수도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 책은 만만한 책은 아니며 굳이 모든 사람이 다 읽을 만한 책은 아닐는지 모르지만 본인이 영적 리더의 위치에 있거나 과학과 신앙에 대해 고민한 이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이 책을 낸 새물결 플러스는 팔리기 쉽지 않은 책을 내놓는 경우들이 꽤 있는 듯 하다. 그 책들이 대박을 터뜨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이들은 그보다는 이 시대 한국교회에 필요한 책, 곧 장사가 않될 수도 있음에도 내놓는 무모함이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비합리적 사고, 비과학적 운영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이야 말로 믿음이 아닐까? 신앙과 과학을 일치시키거나 무조건 한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이슈에 대해서는 강렬한 논쟁을 행한다는 점에서 논쟁의 모범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