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뇌에 관한 불편한 진실-뇌가 변하면 삶이 바뀐다
지난 1월 14일 출판문화협회 강당에서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일반신앙, 신학, 목회자료, 어린이, 청소년 등 5개 분야의 22권의 책이 수상작에 올랐다. 행사를 주최한 (사)한국기독교출판협회는 수상 도서들이 “촘촘한 기획과 편집의 치밀함, 편집기교의 다양성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내용뿐 아니라 편집 변화를 통한 가독성 증대는 물론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려는 의도 등에서 주목을 끌었다”고 밝혔다. 분위기를 정리하면 기독 출판 지형에 뚜렷한 변화의 바람이 감지되고 있으며, 그런 변화의 바람은 독자층의 다양한 관심을 포괄하는 방향에서 기독 출판 지형에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현 시점의 출판 흐름과 향후 전망을 시사 하는 책 한 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반신앙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된 그 책은 해당 분야에 관한 희소성과 시의성을 갖추고 있어 지적 호기심과 영적 충족 욕구를 자극할 뿐 아니라 내용을 풀어가는 독특한 관점과 그 관점을 다루는 감각, 배경을 이루는 지식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독자들을 치밀하게 설득하고 있다.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이 그 주인공이다.
인공지능 대 인간의 대결로 관심을 모은 대국(알파고 vs 이세돌) 장면.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이 괄목할 만한 단계에 이른 사실에 기계에 의한 지배를 염려하는 것은 섣부르다. 과거 복제기술의 논란에서 보듯 인공지능을 다루는 인간의 통제력과 윤리의식, 이성적/영적 판단이 두루 시험대에 오른 사실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구글 코리아).
성경과 자연의 법들, 그리고 경험이 상호작용하는 균형론적 시각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은 뇌과학의 최근 성과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뇌의 구조와 기능을 주로 다루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뇌의 구조와 기능은 특정 사안에 따라 뇌가 반응하는 양태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될 뿐 궁극적으로 저자가 목적하는 바는 그것과 거리가 있다. 이는 현대 뇌과학이 뇌의 구조와 기능을 다루는 수준을 넘어 기억형성과 수면과정 등 광범한 뇌의 활동과 질환은 물론 심리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하는 데 이르기까지 급속히 확대발전하는 등 성과를 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 성과가 뇌의 일부를 밝히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느냐는 현실인식에 맞닿아있다.
또한 저자는 신학적 입장에서만 뇌를 다루지도 않는다. 저자가 정신의학자 외에 기독 서적 집필자라는 또 다른 입장에 선 데서 의외의 결과다. 특정 사안과 관련해서 그와 같이 복합적 입장에 놓이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십상인데 위의 경우라면 아무래도 후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리하기가 보다 쉽다. 저자는 수월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저자가 애써 지키려던 균형감각은, 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에 유효한 열쇠를 쥔 신학이 과거와 같이 상호작용을 허용하지 않은 채 무조건 믿고 보라는 식의 강요를 반복하는 한 양자 사이의 접점을 마련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반성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점에서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 흔적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과학과 신학을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관행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열망 역시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저자의 과학과 신학 양자의 통합 시도가 신학을 배제한 과학이 맹목적인 두려움과 이기심을 부추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과 결별한 신학이 무모한 집착과 거짓을 양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구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성경 없이 과학만 공부하면 무신론적 진화론의 도랑에 빠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성경을 하나님의 자연법들과 떼어서 공부하면 그 신학은 하나님을 잘못 대변하고 그분의 속성을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
당장에 균형론이 절실하다고 양자의 중간에 서거나 사정에 따라 양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기계론적 균형론은 바람직하지 않다. 저자 역시 이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신념을 품고 어떤 하나님을 예배하느냐에 따라 뇌는 그에 맞추어 변화되고 배선이 달라진다. 하나님 개념이 다르면 그것이 뇌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진다."는 말로 선을 긋는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서 기계론적 균형을 취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부연하면 저자의 균형론은 성경을 텍스트로 검증가능한 자연의 법들, 그리고 경험이 상호작용을 통해 확증되는 균형론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저자의 말에서 이 점을 보다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목표는 하나님을 최대한 명확히 드러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는지 예증하고, 그분의 방법들을 실제적 차원에서 내보이는 것이다." 저자의 방법론은, 저자의 표현을 빌려 정리하면, ‘증거에 기초한 통합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곡된 하나님 개념이 두려움과 이기심을 불러와, 창조질서의 회복이 관건
‘증거에 기초한 통합적 접근법’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논증하기에 앞서 저자는 창조세계의 질서에 착목한다. 저자가 바라본 창조세계는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정상 작동하는 세계다. 그 서클 안에서 하나님과 아담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돌연 죄가 들어오고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순식간에 '두려움과 이기심의 서클'로 바뀐다. 죄에 노출된 아담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이어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과 하와에게 덮어씌우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 전례 없던 이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사랑과 신뢰로 창조된 아담이 저지른 범죄는 내용과 결과 양면에서 모두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 아담의 범죄로 사랑과 신뢰로 묶인 창조세계가 무너졌으며, 이후 줄곧 ‘포스트 아담(Post-Adam)’이 하나님을 곡해하고 타인을 질시하는 양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기 전까지 사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 죽고 부활로 십자가가 대표하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후 하나님과 포스트 아담 사이의 사랑과 신뢰 관계가 비로소 회복되었다. 이는 창조질서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고부동한 결과였다.
실제 현실에선 회복된 창조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 문제의식을 품은 저자는 다년간의 임상사례에서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정신의학과 성경교육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저자의 이력이 밑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엄두가 나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이 그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임상사례 각각에 똬리를 튼 왜곡된 하나님 개념을 묘파하고 그 빈 공간에 진리에 근거한 하나님 개념을 바로 세움으로써 두려움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연약한 그리스도인의 내면을 사랑과 신뢰로 뒤바꾸었다. 그 부분에서 과학적 지식과 성경의 견해를 관통하는 저자의 눈부신 통찰이 빛을 발한다. 핵심적인 키워드는 역시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다.
사랑과 신뢰 관계의 회복이 두려움과 이기심을 물리친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견해다. 명백히 성경적 입장이다. 언급한 대로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로 뇌의 구성요소인 대뇌변연계와 전전두피질의 기능적 측면을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대뇌변연계는 '대뇌피질과 시상하부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부위'로 '두려움, 불안, 이기심 분노, 격분, 정욕, 질투, 시기, 공격성을 관장'한다. 전전두피질은 ‘전두엽에서 일차운동피질과 전운동피질을 뺀 부분’으로 ‘건강한 사랑, 긍휼, 이타심, 공감, 논리력, 판단력, 예배하는 능력, 양심, 도덕성, 계획하고 조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등에 관여’한다.
아담처럼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믿을 때 뇌의 대뇌변연계가 활성화된다. 그 결과로 두려움과 이기심이 발현된다. 반대로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 발동되면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고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확고히 자리 잡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얼핏 보면 두 신경계가 변화를 주도하거나 통제할 뿐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생각이 바뀌면 뇌 역시 바뀐다는 것이 정설이다.
생각을 바꾸면 뇌가 바뀐다
예로 저자는 카를 허홀츠와 볼프-디터 하이스 연구 성과를 들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뇌졸중 환자들이 마비된 손이나 발을 움직이는 상상만 했는데도 그에 해당하는 뇌의 운동신경회로가 활성화되었다. 음악가들이 악보를 연주하는 상상만으로 마치 실제 악기를 연주한 것과 동일한 운동신경 경로가 활성화된 사례 또한 있다. 어느 예든 근육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자가 임상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진리에 기초한 바른 지식을 심어주려는 것 역시 그와 같이 생각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끌어내려는 의도에 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저자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고린도후서 10:5)”해야 한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빌립보서 3:8)”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고 그 외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말씀(로마서 10:17)”이며 “하나님의 거울(요한복음 14:9)”이다. 누구든 하나님을 뵈려면 그분부터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그 점을 바울이 잘 알았던 것이다. 바울은 왜곡되지 않은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갔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마음의 생각이 사람됨을 형성한다(잠언 23:7)”고 했다. 이 구절은 성품이 바뀌려면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거짓이 들어찬 생각은 두려움과 이기심을 불러내는 반면 진리는 사랑과 신뢰를 쌓아 올린다. 거짓된 생각이 진리가 들어찬 생각으로 교체되어야 비로소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전전두피질의 활성화는 곧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해로운 신경회로의 활성화를 능동적으로 중단하지 않으면 해로운 사고방식이 약화되지 않는다. 성품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와가 “사단에게 틈을 주었다(에베소서 4:27)”고 할 때 그 말뜻은 그가 사단을 물리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와가 내준 자리에 죄가 틈탔고 그 죄는 아담에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책임전가에 의해 하와에게 돌아왔다.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워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신뢰(믿음)는 말씀에서 온다.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사랑이다. 창조질서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예수 그리스도를 축으로 공교히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설계한 뇌는 사랑과 신뢰의 서클, 곧 창조세계의 질서 안에 있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고 아담은 그런 하나님을 신뢰했다. 친밀한 관계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나님과 아담은 동산을 함께 거닐며 정겹게 담소를 나눴다. 아담의 전전두피질은 늘 활성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것 같은 관계에 균열을 낸 것은 아담이었다. 아담은 자신을 끔찍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보다 하나님을 왜곡한 사단의 말을 신뢰했다. 이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대뇌변연계다. 대뇌변연계는 두려움과 이기심을 생산하고 증폭시킨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담은 숨었다. 하나님이 찾았을 때 솔직하기만 했어도 좋았을 것을 아담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하와에게 떠넘겼다. 아담에겐 하나님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왜곡된 하나님관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다. 왜곡된 하나님관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과 원망의 형태로 표출된다. 문제는 누누이 언급했듯이 왜곡된 하나님관이 대뇌변연계를 자극하고 그 자극으로 두려움과 이기심에 사로잡히는 삶을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단계적 이행이 순환구조를 이루며 악화된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창조질서로 돌아가는 데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동어반복이지만 포스트 아담인 우리 또한 두말할 나위 없다. 생각을 바꾸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성품이 바뀐다. 우리의 생각 안에 사랑과 신뢰의 창조질서가 무한히 깃들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