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불청객이 찾아오는 '오후 네시'의 의미-목회자에게 있어서의 오후 네시
「내가 할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야, 에밀. 누군가 죽고 싶어 한다 해도 자살이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일 거야. 어떤 낙하산 부대원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어. 두 번 째 뛰어 내릴 때가 가장 무섭다더군.」- 『오후 네시(아멜리 노통브, 열린 책들)』-
1. 오후 네시, 정기적으로 다가오는 벽의 공포
오후 네시는 처음엔 공포를 다룬다. 평온을 누리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와 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우리집>에 매일 4시 찾아와 두시간씩 정확하게 머물고 가는 불청객, 그것도 말한마디 없이 퉁명스럽게 앉아 극도의 단답형, 그렇소, 아니오 정도 외에는 거의 이야기 하지 않는 이가 찾아온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이 들까? 아무리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조롱하는 듯한 말을 해도 우리를 무시하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면.
오래전 직장생활 할때 남들보다 삼 사십 분은 일찍 출근해서 말씀이라도 읽으려 하면 부장님은 매번 말하곤 했다.
"문양호씨, 차 한잔 하지"
그리고 뭔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와 내겐 별로 관심없는 이야기를 다른 이들 다 출근할 때까지 들어야 했다.
출근하면 오늘 아침도 부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임하곤 했다. 그래도 이 경우는 듣기라도 했다.
누군가를 정기적으로 만나야 하지만 그 사람과의 만남이 즐겁지 않고 그 대화마저도 벽에 튕기는 느낌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시간이 끊나지 않고 계속되는 힘듦과 소진되는 체력을 경험한다.
이 책을 읽다가 어떤 설교자들은 이런 공포를 느끼며 설교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매주일 예배엔 빠짐없이 교회는 찾아오지만 설교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심지어 강하게 청중을 질책하는 듯 말해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무력감을 느낄 뿐 아니라 매주 다가오는 주일 설교가 공포스럽지 않을까? 물론 설교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 마음을 닫고 그저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어김없이 나아오는 이들이 있다면...
상담이나 심방할 때 종종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심방을 거절하지도 않고 심지어 상담을 요청하지만 정작 아무 말도 없이 그 마음을 닫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때 목회자는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목회자만일까? 우리가 누군가를 돌보고 상담할 때도 그럴 수 있다. 일반적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작가는 이러한 공포를 초반에 안겨준다. 심지어 그로 인해 가장 아끼던 인간관계마저 끊어지는 아픔까지...
p.s 조금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빌 머레이가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로 자신을 진료하는 정신과 의사의 삶을 의도치 않게 파괴하는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블랙코미디 '밥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가 생각이 난다.
2. 오후 네 시는 누군가에겐 패쇄 감옥에서 숨쉴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일수 있다.
결국 주인공은 불청객의 방문을 막는 일은 성공하지만 그 불청객은 자살을 시도하게 되고 주인공은 그를 살리게 된다. 거대한 살덩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아내를 감옥 같은 집에서 돌봐야 하는 불청객에겐 주인공을 찾아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불청객에게는 그 무례한 방문이 일종의 해방구이고 유일한 숨쉴 수 있는 휴식이었던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지옥같은 불청객의 삶을 마감하는 일을 의도치 않게 도와준다. 무뚝뚝하던 불청객도 단 한 번 안도의 얼굴을 짓는다.
종종 우리주변에 불쑥 찾아드는 불청객과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들은 그 존재 자체가 우리의 평안을 깨는 것일 수 있지만 어떤 때 그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무뚝뚝함과 침묵으로 다가오고 무표정으로 우리의 수고에 반응한다 할지라도 내면 속에는 우리를 만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숨막히는 상황에서 잠시의 신선한 공기를 쉬는 찰라의 시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설교자도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는 그것을 공포나 무력감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서 하나의 파편된 흔적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벽을 때리는 설교를 몇 달을 하다가, 또는 몇 차례 또는 몇 시간의 답답하고 죽을 것 같은 대화 속에서 언뜻 지나가는 그들의 불안과 아픔을 발견하고 그 실마리와 닫힌 벽의 깨진 틈으로 그들의 속내를 향해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어떤 때는 적지 않은 목회자나 리더들이 그것 자체를 그들의 무감각함과 사랑없음으로 놓치긴 하지만 그 틈을 발견해 조금씩 깨진 벽조각들을 들어내다보면 결국은 그들의 고통의 현장을 발견하고 묵은 고름과 삶의 파편들을 들어내고 닦아내는데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비록 소설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