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권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픈 책
모태신앙으로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나로서 교회를 통해 많은 은혜와 도움도 받았지만 교회의 어두움과 풍파도 많이 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3까지 다녔던 교회는 순교자를 내었던 사건을 가질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도가 모이는 전통적인 교회였다. 그러나 그 교회는 고3때 교회의 문제로 인해 부모님을 비롯해 적지 않은 성도가 떨어져 나가 교회를 세웠고 고2때 회장을 했던 나로서는 고3까지는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원 교회를 다니고 대학 합격 후 갈라져 나온 교회로 옮겼다. 그런데 옮겼던 교회도 이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전 교회에서 있었던 문제와는 또 다른 극을 이루는 문제로 결국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나름의 다양한 교회문제들을 직간접으로 겪게 되었다. 어떤 때는 공동체 전체를 흔드는 문제 가운데 있었을 때도 여러 번 있었고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지만 주변에서는 모르거나 또 오해하는 상황에서 일을 처리해야 했었을 때도 있다. 공동체가 자세히 모를 뿐이지 심각한 위기와 순간을 지나가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건강한 교회로, 본이 되는 교회로 주위에서 평가를 받는 곳도 겉보기와는 달리 그 중심에 들어가면 곳곳에 시한폭탄 같은 요소들을 안고 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그것을 극복하거나 이겨나가는 경우들일 뿐이다. 그런 위험요소들은 교회가 건강하고 그 체력이 강할 때는 문제없지만 그 교회의 영적 체력과 결속력이 떨어질 때는 그 요소들이 교회공동체 전체를 흔들고 심지어는 교회 자체를 주저앉히는 경우들도 적지 않게 본다. 그래서 그 요소들을 건강할 때 잘 대비하고 보완해나가야 하지만 그러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그러한 문제를 본다는 것 자체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목회자들조차 오히려 그 약점을 교회의 장점으로 착각하는 경우들마저 있다.
또한 혼돈 속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그 속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쉽지 않고 분노와 상처, 또는 영적 멘탈의 붕괴로 메마르고 상대편에 대해 공격적으로 변하기 쉽다. 그런 속에서 중재를 해본적도 있지만 양쪽 모두 중재를 중재로 받지 않고 상대편을 편든다고 생각하며 비난하거나 심지어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는 이들도 본다. 멀쩡하고 신실했던 이들도 그 풍랑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메마르거나 넘어지는 이들을 경험한다-그들 자신은 넘어지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아무리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 할지라도 그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기 쉽지 않다. 상대에 대한 감정이나 서운한 마음 이전에 지금 자기를 둘러싼 상황들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인 이해, 즉 ‘팩트 체크’가 필요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특히 아무리 교회의 문제가 또는 해당 목회자나 지도자들의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그것을 거론하는 이들이 온전히 객관적이거나 공정하거나 사실에 근거한 비판을 하기도 쉽지 않기에 상대에게 공격의 빌미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럼에도 그런 때일수록 무엇이 팩트인지를 명확히 구분하고 판단하며 상대의 잘못에 대해 객관적 비판이 필요하다.
저자의 이 책도 그런 몸부림 속에서 나온 책이라 할 수 있다.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로서 이년전 ‘Why’란 이름으로 사랑의 교회의 후임청빙에 관한 아픔과 힘든 과정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그 이후의 이야기와 자료를 담고 있다.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이 책은 기록이다. 되도록 객관적으로 다루려고 쓴 노력이 비쳐진다. 그렇지만 사건에 대한 감정은 어느 정도 배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전 책에서도 객관적인 태도를 이야기하지만 아버지의 편에서 사랑의 교회의 부분을 다루었고, 옳건 그르건 반대쪽의 이야기를 저자의 시각 속에서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편향성은 양비론적 접근으로 평가할 부분은 아니다. 다른 쪽에서 그 일에 대한 솔직성과 객관성, 사실보다는 힘과 권위로 접근했기에 이 책의 부족함과 담아내지 못한 내용은 저자의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는 저자의 입장 속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고 설혹 그 내용이 어느 정도 편향되어 있거나 주관적인 해석이 있다 해도 그것은 사실의 왜곡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고 그것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폭풍 속에서 나무가 중심을 잡으려 해도 어느 정도는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잊혀지거나 묻히지 않기 위해 이 자료를 담으려 했고 기록하려 했다. 이미 아무 힘이 없는 속에서 교회를 세우려는 모습 속에서 절망과 벽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분노와 사람에 대한 실망이 담겨 있다. 더구나, 올곧은 줄 알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줄 알았던 아버지와 동행했던 이들의 배신과 변모로 인한 아픔과 분노도 강하게 담겨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기록이고 역사다. 또 사랑의 교화 역사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아니 내 자신도 이젠 사랑의 교회는 사랑의 교회가 해결하도록 놓아주자는 말을 하곤 한다. 그것은 그 교회를 방기하자는 말이기보다는 그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는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짐이다. 그럴 수 있다. 그 문제는 밖에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이 풀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의 교회가 한국교회에 끼친 큰 영향력이 있었기에 그 공동체의 문제로만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제로 사람과 교회는 바꿀 수 없다. 거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같은 교회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진 교회를 보며 의문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제자훈련의 허상과 실패를 볼 수 있지 않냐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고 리더십의 변화 속에서 이미 교회의 체질이 바뀌어서 발생된 일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옥한흠 목사님의 사후에 나온 ‘목사가 목사에게’란 책은 은퇴 후 교역자회의에서 설교하신 내용을 엮은 책으로 그 책을 조심히 읽다보면 이미 사랑의 교회가 시간이 흘러가며 그 체질과 분위기, 사역자의 모습들이-옥목사님때 있었던 이들이 어느 정도 있었음에도-옥한흠 목사님 때와는 상당히 달라진-그 달라짐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교회임을 목사님의 설교에서 느낄 수 있다. 제자훈련이 좋은 시스템만으로 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좋은 시스템도 관리 소홀과 열정이 없으면 언제든지 허물어거나 변모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그것은 이 책이 읽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많은 아픔과 분노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문제를 풀려는 억지스러움이고 혹시나 이 책을 읽는 것이 그저 한두 명을 비난하는 모습으로 답을 찾는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p.s. 이 책에서 표절 텍스트로 여러 번 언급되는 윌킨스의 ‘제자도’란 책은 제자훈련과 제자도를 말하는 데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책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책이었을까? 제자훈련을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모를리 없는데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