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지금은 변증과 설득을 회복해야 할 때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의 손에 처형당하기 전에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을 가지고 우리 주위를 보면 삶의 의미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며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각자 생존에만 몰두하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 밤을 새서라도 달려가기에만 바쁘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자신의 정체와 목적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인생의 근본에 대해 관심 조차 없는 시대에 어떻게 기독교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고 세상에서는 거짓말하고 속여야지 잘 살 수 있다는 사고가 굳어지는 시대속에서 어떻게 교회는 그런 마음을 치유하고 세계관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게다가 교회는 사회와 소통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이 너무나 괴리되어 살았기에 신뢰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득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변호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 오스 기니스의 평생에 걸친 역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가 세상에서 소통의 상실과 변증의 실종을 겪고 있다고 아쉬워하며 지금이야말로 이런 변증과 설득을 회복해야 될 때라고 역설한다. 지난날 진리를 일방적으로 선포만 했던 무례함을 고치고 또한 상대방을 전도대상자로만 여겼던 공격성을 바꾸어 창의적이고 설득력 있는 변증력을 갖추도록 촉구하고 있다.
1장 ‘창의적 설득’에서는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견이 다양하여 갈등이 심해지고 대화가 어려워져도 우리의 방법은 십자가에서만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다고 한다. 2장 ‘기술: 마귀의 미끼’에서는 변증을 잘하려면 기술을 배우고 설득의 과학을 익히라고 유혹하는 시대지만 그럼에도 설득은 예술이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3장 ‘변호는 중지되지 않는다’에서 무고한 하나님에게 죄를 뒤짚어 씌우는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의 변호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4장 ‘제3유형의 바보의 길’에서는 어리석다고 조롱받는 자리에서도 광대처럼 연기하는 바보가 되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가장 바보 취급당하셨고 하나님은 가장 바보 행세하시는 분이라 하며 우리 또한 그런 길을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5장 ‘불신의 해부’에서는 세상과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불신은 의지의 행위이고 선택을 통해 굳어진 사고 습관이라고 고발하며 이것은 명백하게 자기중심적인 죄라고 여러 가지 논리와 주장으로 폭로한다. 6장 ‘형세를 역전시킨다’에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말과 삶으로 다가가는 것을 제안한다.
7장 ‘신호를 촉발한다’에서는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들에게라도 우리의 말과 삶으로 궁극적인 신호를 듣도록 도와주어야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8장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역동성’에서는 우리의 말에 용수철을 다는 질문과 드라마와 비유와 이야기 등 다양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무엇보다 복음에 닫혀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성육신과 십자가와 성령이라는 전복적 능력에 기초하라고 한다. 9장 ‘항상 옳아야하는 예술’에서는 우리의 복음은 놀라운 특권이기에 항상 겸손과 부드러움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한다.
10장 ‘부메랑을 조심하라’에서는 우리가 믿음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가 잘못된 것이지 기독교 신앙자체가 잘못된게 아니라고 하며 위선을 벗어나 성령의 능력으로 빚어지는 영적성장을 이루라고 한다. 11장 ‘입 맞추는 유다들’에서 저자는 기독교가 설득의 구심점을 회복하고 전도와 변증과 제자도를 다시 연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세상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변호하지 못하고 동화되는 것은 유다가 되는 것이라 일갈하고 변증의 회복을 소망한다. 12장 ‘여정의 길잡이’에서는 질문과 해답과 비교와 결단의 단계를 거쳐 신앙의 길에 들어서는 과정을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잘 그려낸다.
필자는 책을 보면서 저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변증의 회복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수층 내에서는 전제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미 결정되어진 변증이기에 세상과 불신자들과는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저자는 그런 전제주의를 넘어 진리를 고수하되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접근하고 설득하도록 권면한다.
또한 기독교 역사에서 변증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명예로웠으니 그 영광의 회복을 도전한다.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교 신학은 불신세계와 이단과 사이비로부터의 진리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변증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오늘은 그것을 변명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현실을 질타한다. 그래서 저자는 초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변증가를 예로 들고 우리 또한 이 시대에 교회에 던져지는 우주와 과학과 악과 고난의 문제와 환경과 동성애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변증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변호할 것을 주장한다.
또 하나는 설득은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세상은 설득에 대해서 과학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설득은 이제 확실히 과학으로 자리 잡았으니 자신의 설득력을 높이고 싶은 사람은 다양한 기술과 법칙을 배우라고 권면한다. 게다가 설득은 타고난 기술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이 과학적 방법을 잘 익히면 많은 사람들과 일을 하고 경쟁 또는 협력해야 되는 환경에서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긍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이 말하는 설득의 분석은 참 매력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설득이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한다. 즉 기독교의 설득은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향한 우리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 사랑이 상대를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그 마음에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결국 설득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몇 가지의 계산된 법칙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우주의 창조주시고 인생의 주인 되시는 그분의 실체를 증언하는 것이다.
끝으로 저자의 주장에 제일 공감이 되었던 것은 저자가 세상의 불신을 고집과 죄라고 단정짓고 성경적으로 정확히 짚어내지만 설득은 이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점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땅에 성육신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은혜와 진리로 하시고 사람을 섬길 때 은혜 위에 은혜로 사역하신 것을 본받아 우리의 변증과 설득이 공격적이고 상대방의 말을 막고 허점을 드러내서 무안을 주려는 자세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제 그동안 우리의 변증은 둘 중의 하나였다. 이미 진리가 선포된 시대를 살고 있기에 변증과 설득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대립과 갈등이 생길 때 전투적인 자세를 취해 승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변증의 목적은 이기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변증을 변증되게 하는 것은 화자의 신학이 아니라 그의 심리상태이다. 변증은 우리의 옳음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고 그들이 공감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것이 되어야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기독교 변증의 실종이요 위기라고 말하는 시대에 평생을 걸쳐 진리와 하나님에 대하여 변호하고 설득하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위기에 처한 변증을 구하기 위해 우리에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변증가와 주장들을 가지고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그의 주장을 알기 원하고, 또한 사랑이신 주님을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어떻게 그 사랑으로 인도할지를 고민하는 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