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서평을 쓰기 싫은 책, 서평을 쓸 수 없는 책
서평을 쓰기 싫은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이 서평을 쓰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평을 쓰기에는 내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이 글은 서평은 아니다. 그보다는 굳이 이 글의 성격을 이야기한다면 나의 변명문이라고 해야 할까? 그 주변적 이야기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 있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순수하게 재미 자체를-재미이건 기분전환이건―위해서이거나, 아니면 지식습득을 위해서이거나―그것이 어떤 분야이건, 주요 영역이건 지엽적 영역이건 간에 내겐 이런 지식욕구가 있다. 공부는 비록 싫어하고 게으르긴 하지만 말이다. 무언가 궁금한 것,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나쁜 습관(?)이 있다. 아니면 책을 읽음을 통해 나의 무딘 심령과 나의 삶, 또는 영적인 측면에서 도전을 받기 위해서다.
그런 측면에서 서평을 쓴다는 것은 내가 읽은 책이 내게 어떤 재미를 주었는지, 또는 지식 습득에 도움을 주었는지 돌아보고 비판하게 된다. 재미라도 단순히 흥미적인 측면이라면 그 책은 내게 별 가치가 없다. 지식 습득이라도 그 내용이 뜬 구름 잡거나 피상적이고 얕은 지식을 다룬다면―부정확한 것을 마치 음모론이나 찌라시 기사같이 다루는 것―내게는 쓰레기 같은 책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책을 읽는 세 번째 목적은 서평을 쓸 때 앞선 두 가지 경우와는 조금 달라진다. 도전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감동을 받고 약간의 찔림을 받는 차원을 넘어선다. 종종 이런 유형의 책 중에는 조심히 들여다보면 과장과 주관적 관점에서만 쓰여져 독자들이 읽을 때는 감동은 받지만 정작 그 내부와 실제적 사실은 책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거나 왜곡된 경우들이 많다. 예컨대 일부 간증집이라던가 교회 개척부흥기에 관련된 책들 중에는 이런 것들이 많다. 그런 책들도 역시 서평을 쓰기에 싫다. 하지만 그 서평을 쓰기 싫음은 글자 그대로 솎아낼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약간의 과장과 주관적 관점은 있어도 진정 마음을 흔들고 찔림을 주는 책들도 있다. 그런 경우는 좀더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그 책들의 내용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아마도 다른 이들도 그러리라. 하지만 한 걸음 더들어가 책을 통해 단순히 감동받는다는 것은 별반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영화나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도전을 받기도 하지만, 그 차원으로 그친다면 그 감동은 값싸고 표피적인 것이 된다. 감동만 받고 그 감동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 그 감동이 바로 식어버린다면 그 감동은 값싼 감동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 위인전을 읽고 그 사람 좋은 사람이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감동은 어떤 형태로든 어느 정도로든 나의 사고와 삶의 형태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책을 읽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은 나에게 감동과 도전은 주지만 그것을 좇거나 내가 본받기에는 나의 한계와 부족, 내 자신에 대한 불철저함을 분명하게 깨닫게 한다. 물론 그 큰 감동과 도전이 내게 변화와 삶의 부분을 변화시키고 자극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무익과 한계를 알기에 나는 이 책을 논할 자격이 없다. 이것은 내가 이 책을 논한다면 나는 내가 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좇지도 못하면서 비판하는 오만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저자인 이재영 장로님은 많은 문제와 커다란 실수를 보이며 지금의 오두막 공동체를 이끌어 왔다.
저자가 그렇게 허점 많고 논리적이지 못한 무모함을 보이는 행동들이 우리에게는 어리석고 답답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나 같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은 실수와 행동을 한다. 물론 이러한 판단조차 결과론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논리와 이성을 변명 삼아 우리는 저자의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행하지 않는 주저함과 뻔뻔함, 게으름을 행하곤 한다. 오히려 실수와 넘어짐 등을 통해 저자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고 주의 음성에 민감했지만, 정작 논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는 나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보다는 더 멀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비게이션은 앞으로 가야 하는 길을 인도해주고 또 잘못 나아가면 수정해준다. 하지만 가지 않는다면 길의 안내도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길이 맞나 하는 계속적인 의문만 던질 때 변화는 없다. 하나님은 이 책의 저자처럼 무모하지만 나아갈 때 그 가는 길을 수정해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이다. 말씀에 대해 순종하고 겸비할 때, 또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신다.
그런 점에서 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쓸 자격도 없고 쓰기에는 일말의 양심이 내게 작용한다.
저자처럼 이렇게 알코올 중독자, 출소자 등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논리와 학술적인 접근을 하는 이들은 그런 이들과 만날 때 자신들의 이성적 논리의 무기력을 느낄 것이다. 이들에게 논리와 예의를 기대하는 것은 일찌감치 접어야 한다. 70년대 책이 되긴 하겠지만 김진홍 목사님의 책이나―지금의 평가는 일단 접고 그 당시만 이야기하는 것이다―허병섭 목사님의 청계천 빈민선교, 제정구 의원의 빈민 활동에 대한 책을 보면―신부와 벽돌공(제정구, 비전이십일, 1997)―그들이 사역하는 대상에 논리나 이성은 상당수 접을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빈민선교만이 아니라 어떤 때 목회나 양육도 마찬가지이다. 논리로만 접근할 때 우리는 쉽게 상처입고 쉽게 지친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나아갔기에 그들을 감내할 수 있었고 품을 수 있었다. 저자의 표현처럼 그들에 대한 이러한 저자의 활동은 이유가 없었다. 그들과 주변 이들에게 미련하게 속고 뻔히 바닥이 보이는 재정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사업과 활동을 했던 것은 단순히 저자의 성취요구가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래 난 이 분의 무모함과 답답한 실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머리로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주의 명령에 따라 나아가는 자를 사용하심을 다시 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책의 서평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는 아무것도 달라지거나 변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마르고 굳은 땅에 조금씩이라 물기가 맺힐 때 조금씩 그 굳은 땅도 변해지고 거기 떨어진 자근 씨앗이 언젠가는 싹도 나지 않을까?
추신
1.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인상적이다. 그 하나는 책의 띠지이다. 출판사나 독자에게 있어 띠지는 뜨거운 감자다. 책을 읽는 데는 불필요하지만 디자인 측면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띠지다. 책을 알라딘 같은 데 팔려고 하면 띠지는 제거 되어서 쓰레기통으로 가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띠지는 없는데 띠지가 있는 것 같다. 사진을 보면 알지만 책 커버용 종이를 크게 해서 접은 것이다. 다른 출판사에서 이미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처음 접했다. 게다가 그 속은 오두막 공동체 마을의 그림이 담겨있는 독자서비스까지, 즉 얼마 전 읽은 칼 오베의‘나의 투쟁’의 책커버 속은 저자의 사진이 전신사진이 담겨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2. 이 책이 IVP에서 나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IVP와는 체질적으로 다른 모습들이 많다. 지성적이고 이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다. 감성적인 에세이나 글들에서도 논리가 있고 지성적으로 보이는 듯한 IVP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책이다. IVP가 경제불평등이나 소외된 계층을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재영 장로님의 이번 책 같은 방식으로 다룬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1992년에 나온 비브그릭의 『가난한 자들의 친구』라는 필리핀 빈민 선교를 다룬 책이 있긴 하지만, 이 책처럼 무모해보이고 무계획적이지는 않다(?)―그책은 놀랍게도 저자가 뉴질랜드 네비게이토 출신이다. 당시 출판사 관여하신 분에게 듣기로는 판권도 한국 네비프레스에 속했지만 번역을 원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 IVP가 번역해서 출간한 것으로 들었다. 두란노에서 88년에 번역되어 나온 기독교 세계관과 제자훈련을 사회적 책임과 정의에까지 연결시킨 탁월한 책인 『사회정의와 세계선교를 위한 제자도』의 저자 윌드런 스코트도 네비게이토의 창립자 도슨 트로트맨의 직접적 계보에 속하는 초대 인물 중 하나다. 이것은 원래 네비게이토가 결코 사회에 관심 없는 선교단체가 아님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이후에도 이런 주제들을 다룬 책이 몇 나오지만 IVP의 스타일처럼 지성적이고 논리적이다. IVP의 책들은 에세이류의 책마저도 이성적이고 지적이다. 단순한 신앙간증 같은 책도 내 기억 상으로는 없다. 이 책은 IVP에서 출판된 책으로서는 거의 이질적인 모습을 지닌 책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VP는 최근 몇 년간 이전에는 IVP에서 나오지 않은 스타일과 카테고리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긍정적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시장의 불황과 교계와 성도들의 무관심으로 좋은 성경공부 교재들이 번역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히 아쉽고 불행한 일이다.
저자 이재영
1983년부터 30여 년간 출소자들과 더불어 살아왔다.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마태복음 5:47)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공동 생활을 실험하다가 결국 2006년 경남 합천에 자리를 잡고 오두막 공동체를 세웠다. 이곳에서 출소자뿐 아니라 지적 장애인과 보호자, 남성과 여성, 아이와 노인, 평신도와 목회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산다. 가장 낮은 이의 높이, 가장 느린 이의 속도에 맞추어 단순한 순종과 단순한 환대를 실천하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가 되기를 꿈꾼다. 2002년 법무부장관 감사 서신, 2004년 한국 갱생보호공단 이사장 표창, 2007년 부산지방 검찰청 검사장 감사장, 2012년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현재 오두막 공동체 대표이며 2015년 설립된 오두막공동체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