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며 대상물에 대한 여하한 해석에 반대한 수전 손택의 다분히 논쟁적인 책이다.
개인적으로 2004년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뒤로 그의 책을 다시 잡기까지 20년이 걸린 셈이다. 타인의 고통마저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화의 파괴적 양상과 기형적 몰골을 예리하게 비판한 그 책은 어처구니없게도 문장의 호응관계와 의미를 거듭 유추케 하는 번역투 문장과 그로 인해 수도 없이 널린 비문에 실려 한 독자의 손에 당도했다. 당시로선 그저 한심하고 통탄할 밖에 도리가 없었는데, 글의 전체상을 맛보기도 전에 다른 책에 밀려 서가에 꽂히는 종말을 맞은 걸 두고 굳이 남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행이라면 20년 만에 재회한 수전 손택은 그가 들려주고 싶어했을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주의 환기는 물론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일깨우며 특유의 청량감을 더해 주었다.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어떤 책을 애정을 가득 담아 읽을 수 있다는 건 독자에겐 무한히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수전 손택이 우리 시대에 남긴 도저한 논평과 실천적 지식인의 비범한 문제제기를 중심 논제를 따라 거슬러 오르거나 시계열로 순서를 밟아가는, 지극히 기나긴 여정은 독자에게 숨막히는 긴장과 설렘을 아울러 제공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길이라는 잣대로 재단하기 어려운 특이한 경험의 연속이 될 듯하다. 이는 수전 손택이 현실과 맞닿은 사안에 거침없이 발언하고 발언의 진위를 행동으로 증명한 데 전적으로 빚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대를 건너 그의 글이 또렷이 살아 숨쉬는 비결 또한 그 지점에 뿌리박고 있음은 물론이다.
예술의 내용에 주목한 예술비평이 결과적으로 예술의 본래적 요소인 형식에 폭거를 가하고 있음을 주시한 수전 손택은 그런 비평이 "도시의 공기를 더럽히는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처럼,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고 말한다. 내용에 천착한 비평이 오히려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무디게 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게 수전 손택이 줄곧 견지해온 입장이다.
수전 손택에게 예술이란 "세상 속에 있는 어떤 것이지, 그저 세상에 관해 말해주는 텍스트나 논평이 아니"어서 문제의 답을 듣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특정한 경험을 촉발시키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에서 수전 손택의 예술은 무언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언가이기도 한 중층적 개념으로 탈바꿈한다. 따라서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사실 그대로 드러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즉각적인 경험이 중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직접적이며 웅숭깊은 반 해석 기조는 형식주의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데, 그건 수전 손택의 예술관이 예술 자체에 천착하는 방향에서 개념틀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술작품의 내용적 측면을 파고들어 결과적으로 작품 자체의 사실성을 심대하게 왜곡하는 해석의 제 문제를 지적하고 직접적인 감상의 가치를 복원함으로써 예술의 형식적 심미안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등 저변확대에 기여한 수전 손택의 공로는 오래 기억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