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환영보다는 거절을 양쪽에서 받을 가능성이 높은 책
1. 세 권의 책
한국적 상황에서는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며 토론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영역들이 있다. 아무리 합리적인 의견을 내어도 상대의 의견을 한쪽으로 규정하고 그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 가장 핫한 것이 바로 이 동성애의 문제일 것이다.
최근에는 퀴어 퍼레이드로 인해 토론을 넘어 물리적인 대결의 현상마저 나타났고 양쪽은 서로를 용서 받지 못할 최악의 죄인, 또는 호모포비아로 규정하고 혐오하는 모습들이 벌어졌었다,
예전에 존 스토트의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을 대학 시절에 읽다가 동성애에 대해 저자가 수십 쪽을 할애하며 그 문제를 논증하는 것을 읽으며 왜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논증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솔직히 고등학교때 안소니퀸이 주연한 게오르규 원작의 ‘25시’를 서대문의 모 극장에 보러갔다가 뒤에 집적대려는 이상한 남자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성추행이고 그는 동성애자였던 것 같다. 그러한 잔상이 내게 그들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으로도 지금까지 자리했던 면도 있는 듯하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우리 사회는커녕 교회 내에서도 어떤 때 단순하게 풀기 힘든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특히 성소수자라는 인권의 문제로 초점이 바뀌어 지면서 교회나 목회자가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 문제를 거론하려고만 해도 세상에서는 호모포비아로 규정하는 면마저 있다. 그러다보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주변의 교회에 대한 시선으로 인해 자신의 이 문제에 대한 개인의 생각이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이들을 자주 보았고 특히 청소년층은 이에 대한 고민과 학교문화 속에서의 충돌을 고민하는 모습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이들 중에는 이러한 고민을 교회 내에서 털어놓다가 담당사역자한테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고 야단맞고는 그 이후 마음을 닫았다는 이야기도 듣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뉴스앤조이에서 동성애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담은 세 권의 책을 든 것은 지금의 이슈를 상당히 잘 다룬 기사라 할 수 있다. 이 세 권의 책이 동성애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잘 다루고 비교할 만한 책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나름 각각의 견해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훑어볼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권의 책 중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보여주는 케빈 드 영의 ‘성경이 동성애에 답하다’는 보수 진영의 동성애에 대한 시각과 관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는 달리 동성애에 대한 강한 긍정을 보여주는 잭 로저스의 ‘예수, 성경, 동성애’는 그 정반대의 선상에 서있다.
그에 반해 스텐리 그렌츠의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는 두 책과 비교하면 양 진영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이러한 책 중간 지점의 책들이 잘못하면 그저 어중간한 회색지대에서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는데 스텐리 그렌츠는 이러한 부분을 떠나 고민하고 건드려야 할 부분에 대해 심도 있는 노력을 기울인다.
앞선 캐빈드 영의 책은 동성애 찬성론자에 대한 답변과 토론보다는 전통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 대한 동성애에 대한 공동체 내의 교육 및 답변 같은 성격이 짙은 듯 보여진다. 성경적 관점과 사회문제에 대한 답변 등은 전통적으로 잘 설명하지만 반대쪽 진영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함이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뉴스앤조이에서 언급한 책은 아니지만 동성애에 대한 반대진영의 책으로는 ‘카페에서 하나님께 묻다’중 8~10장도 나름 읽어볼 만하다.
케빈드 영이 동성애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을 성경적 베이스를 토대로 분명히 드러내는 반면, 동성애에 대한 가장 적극적 긍정의 반응을 보이는 잭 로저스의 책은 책 서두에서 자신이 보아온 신실한 동성애 그리스도인의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책들과는 달리 감정적 접근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들을 통해 미국에서의 동성애 논쟁에 대한 역사를 간략히 훑고 있는데 그가 자신은 처음에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고 동성애에 대해 반대했었던 사람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동성애 반대 진영에 대한 접촉점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과거의 논란의 역사를 그리며 동성애 반대에 대한 역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역사는 좀더 객관적인 서술보다는 동성애 반대에 있어서 가장 극단적인 맹목적인 호모포비아와 극보수주의자들의 동성애 관련 연구와 주장만을 담는 듯해서 동성애 반대를 이야기하는 이들에 대한 균형적인 학적인 접근은 결여되어 있는 듯 보여진다. 게다가 이어지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구절에 대한 분석은 더 객관성을 잃은 듯 비쳐진다. 비판을 위한 비판의 모습이 다분히 드러난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동성애에 대한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학적인 성실성과 이미 주관화된 시각으로 본문을 풀어 가려는 의도성이 다분히 비쳐지는 것 같아 읽기에 불편함마저 느껴진다. 이 책이 동성애에 대한 찬성을 주장하는 진영을 위한 진영논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토론을 위한 적절한 책은 될 수 없을 듯싶다. 차라리 오래된 책이어도 스텐리 그렌츠가 책에서 언급한 많은 찬성론자의 책들이 더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잭 로저스의 책이 비록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학문적 불성실은 있어도 동성애 그리스도인을 이해하고 그 정황을 돌아보는 데는 나름의 기여를 하는 면이 있기에 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라면 읽어볼 가치는 있을 듯싶다.
2. 환영과 거절 사이로 들어가기
앞에서 언급한 세권의 책 중 양쪽의 불만을 다 살 수 있는 책이긴 하지만 가장 심도 있고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면 지금부터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스텐리 그렌츠의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가 자리할 공간은 있어도 중도의 진영은 그 차지할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중도는 보수에서는 중도좌파로 인식되기 쉽고 진보의 눈에서는 보수로 규정되기 쉬운 것처럼 스텐리 그렌츠의 주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양쪽 진영에서 오해되기 쉽고 개량주의자나 기회주의자처럼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세권의 책 중 가장 학적으로도 그렇고 균형 잡힌 시각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가장 주목할 만하다.
스텐리 그렌츠는 이 책에서 현대의 동성애에 대한 학문적 논의와 이슈들을 1장에서 잘 보여준다.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동적이냐 정적이냐 등의 이슈들을 잘 설명해 보여줌으로써 지금의 논쟁의 중요한 부분들을 건드린다. 2장으로 넘어가서는 본격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동성애에 관련된 구절을 통해 이에 대한 주해들을 언급한다. 특히 동성애 찬성론자들의 주장을 잘 보여주고 그들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보인 문제점뿐만이 아니라 해석에 있어서 정통주의적 시각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롭게 보여준 해석의 장점까지도 잘 설명하고 분석한다. 또한 스텐리 그렌츠는 성경의 유관된 여러 본문보다는 성경의 핵심적인 주요 동성애 논란 부분만 언급함으로 인해 이 본문이 어떤 면에서 이슈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진영논리 속에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자신과 가까운 이들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진영논리를 벗어난다.
특히 2장에서 왜 창세기 1장을 거의 외면하다시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4장에 들어가서 저자는 성경을 통해본 그의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다루면서 창세기 1장에 대한 결혼에서 갖는 육체적 관계의 의미를 통해 동성애 성향보다는 실제적인 동성애적 행위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과도한 몰입으로 나타나는 면이 있다. 특히 저자가 동성애적 행위에 대한 문제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성기를 사용한 동성애적 행위의 중요성과 문제를 강하게 지적함으로써 동성애 문제에 대한 최대한 갈등의 문제를 축소화하고 하고 그들과의 교류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비쳐진다. 이러한 그렌츠의 노력은 보수 진영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동성애 문제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돌아보게 한다는 측면에서 분명한 장점을 준다.
예컨대 동성애적 성향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목회자 후보생-동성애적 행위는 하지 않는-과 성적 문제를 안고 있는 목회자 후보생에 대한 균일한 접근과 잣대를 돌아보고 어느 것이 더 목회자로서 안수 받는 데에 심각한 문제를 지닌 것일지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동성애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무조건 극단의 혐오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본질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분석하게 이끈다.
저자가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진 않아 아쉬운 면이 있지만,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가진 이들은 우정과 동성애를 혼합시켜 버리는 경향들이 있다. 다윗과 요나단을-심지어 사울과 삼각관계로-그리고 나오미와 룻을 동성애관계로 그렇게 해석한다. 이것은 동성애적 성향과 우정의 벽을 허문다. 그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모호한 면이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동성애 찬성론자의 주장은 이러한 모호성으로 동성애자들의 분포가 상당한 듯한 거품을 이루어낸다. 그들의 이러한 견해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작용하여 많은 소설과 영화들을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규정하는 면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그렌츠의 동성애적 행위와 동성애적 성향을 구별하는 것은 동성애에 대한 판단의 모호성과 구별을 명확히 하여주는 면이 있고 이를 해결하는 데에도 분명한 접근을 가져오는 이득이 있다.
게다가 이러한 동성애적 행위에 대한 구별은 죄에 대한 분별을 명확히 한다. 혹자는 이러한 그렌츠의 태도가 동성애를 어느 정도 허용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욕구와 행위를 구분지음으로 동성애적 행위만이 아니라 불법적 성적 행동도 하나님 앞에 죄임을 분명히 한다. 동성애적 행위도 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악한 행위, 불륜이나 음란도 죄임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교회에 대한 비판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만이 아니라 동성애는 반대하면서도 정작 내분에 있는 죄악을 덮으려는 이중성 때문이 아닌가? 또 이러한 구분은 목회자 후보이지만 동성애적 성적 욕구로 갈등을 겪고 있는 이가 있다면 강한 성적 욕구로 고민하는 다른 후보생처럼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는 것 이전에 그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임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로 가정을 가진 동성애자가 가정을 깨는 행동은 불륜으로 가정을 깨려는 남자와 동일하게 죄임을 보여준다. 동성애 찬성론자들은 종종 이러한 행동과 동성애적 성향을 짬뽕시킴으로 아직 죄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한 것들마저 기독교인들이 죄로 몰아넣는다고 했는데 일부 극단적 기독인들은 실제로 이런 실수를 범하는 실수를 범하여 그들이 더 교회와는 멀어지는 죄를 범하고 만다. 저자는 이 성향과 행위에 대한 구분을 통해 모호한 전선과 죄악, 욕망을 구분한다.
3. 또 다른 틈새
하지만 저자의 이런 시도로 동성애와 더불어 다른 성적 죄들을 죄로 구별해보는 성취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쉬운 면이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결혼과 성에 대한 원형을 너무 간략히 다루는 면이 있다. 어느 정도 성경의 결혼과 성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을 다루고 또 어느 것들이 죄에 속하는지를 다루기도 하지만, 정작 이 창조의 원형이 깨어짐이 어떻게 파괴되어지고 오염되고 훼손되었는지는 건너뛰는 모습이 있다.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에서 창조 타락 구속의 시각에서 이 성의 문제를 보았다면 좀더 흥미롭고 본질적인 접근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시도는 동성애에 대한 비판의 영역을 너무 확장시켜 논점을 흐릴 수 있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는 동성애만이 아니라 트랜스젠더의 문제, 이혼과 불륜, 성폭력과 모든 성적 범죄의 기원과 그 영향을 이해시키는 접근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창조시 만드셨던 성의 완전성과 거룩은 남녀가 부부로 만나 투명성으로 인해 숨길 것이 없었고 영적 육적 합일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범죄 후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 즉 자기형상을 자기 자손 셋에게 물려주는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만든다. 이것은 질서적 차원에서의 리더십 외에는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과 동물은 인간의 짝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을 파괴해 힘의 논리로 상대를 억누르고 부부관계마저도 투명성을 상실하게 했고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부일처제적 사랑이 갖가지 성의 왜곡과 폭압에 의한 성의 논리, 비이성적인 성관계를 낳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 영역중의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도 포함되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동성애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오히려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차선적 문제로 보게 된다. 동성애나 트랜스 젠더, 성적 범죄와 그 성향은 어떤 점에서 필연적인 면이 있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이것은 성적 모든 죄를 합리화하거나 당연시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형이 에덴동산의 타락으로 성조차도 본질적 차원에서 왜곡되어짐으로 발생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성적인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구속이 필요하다. 왜곡되어지고 파괴되어진 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치유 받아야 한다. 이것은 지나치게 원론적이고 모범적 접근이거나 이러한 성범죄와 관련된 이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기초적인 진단과 토대 위에서 그 해결방법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책은 그러한 부분을 도외시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예컨대 이러한 성적인 왜곡과 타락은 그저 심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육체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동성애가 아니라 젠더의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의 경우 심리적이거나 정서적 문제도 있겠지만 실제로 두 개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이들도 있고 성염색체의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다. 이런 경우 그저 이것을 죄라고만 말하는 것은 적절한 접근 방법이 아니다.
또 윤리적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무조건적으로 성경적 원칙을 접근하는 것은 세상의 강한 벽에 부딪힐 수 있다. 만일 그 원칙을 지키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내에서 이혼한 성도에 대한 접근이 달라져야 한다. 이혼한 성도나 목회자에 대해 수십 년 전만 해도 그 기준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교회공동체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야곱과 다윗의 일부다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말씀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혼에 대한 말씀이나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 대한 말씀은 죄에 대한 허용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범하면 아웃이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죄는 죄일 뿐이다. 죄는 죄라고 말해야 한다. 단지 한 가지 죄만 죄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죄에 대한 기준을 우리에게 돌려야 하며 공동체 속에서 그 죄를 경계할 뿐 아니라 그 죄가 내게 있을까 두려워해야 한다(갈 6:1).
그런 점에서 동성애의 죄는 따로 떼어 볼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공동체의 현 상태의 죄된 모습을 냉철히 바라봄 속에서 출발하며 회개함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동성애로 고민하는 이들을 우리는 환영보다는 이해할 필요가 있고 거절보다는 같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비록 이런 부분이 이 책은 아쉽지만 우리들이 씨름해야 할 퍼즐과 숙제를 저자는 우리에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