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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신학의 참된 목적은 무엇일까?
By the Renewing of Your Minds: The Pastoral Function of Christian Doctrine/Ellen T. Charry/Oxford University Press/신동수 편집위원
기독교 신학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신의 존재를 논증하고, 고도의 변증을 거친 정통교리를 세우는 작업 등의 고전적인 신학하기는 번지수를 잘못찾은 무익한 신학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저자 엘렌 차리 (Ellen Charry) 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감리교에서 세례를 받고 퍼킨스 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현재는 프린스턴에서 유대교/기독교 연구를 진행 중인 신학자이다. 그녀가 프린스턴으로 스카웃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1997년에 나온 역작이 바로 [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기독교 신학의 목회적 기능] 이다. 그녀의 책 마지막 장에서 의미있게 다루는 칼빈의 신학적 경구가 바로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였고 그것이 그녀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신학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칼빈을 신학적 원조 중 하나로 여기는 프린스턴 이사진들의 관심을 끌었으리라!
차리 교수의 주장은, 크리스챤 신학과 크리스챤의 삶 (실천) 의 괴리가 발생한 이유는 16세기 이후 신학에 접근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위 개신교 정통주의는 그 이전 기독교신학이 가졌던 실천적 삶의 신학을 고도로 학문화한 학교신학 (스콜라신학) 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과 사상은 모든 신자들의 실제적 유익 (salutary) 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기독교인의 믿음과 덕과 지복 (blissfulness) 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성도들을 위한 목회적 노력이었고 성도들은 그들의 신학을 통해 영적 도적적 유익을 얻었으며 그들의 삶은 신학이 제시하는 경건으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매우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여지지만, 차리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과 바울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에 대한 가르침, 초대교회의 아타나시우스, 바질, 그리고 어거스틴, 중세의 안셀름, 아퀴나스, 줄리앙,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세기 존 칼빈의 목회신학을 제시하며 신학의 참된 목적은 "상아탑에 갖힌' 정통신학에 있지 않고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에 영적복지를 함양하는 "덕으로 이끄는" (aretegenic) 신학임을 천명한다.
칼빈을 따라, 차리 교수는 우리 (신학자들과 성도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우리의 마음 (mind - 생각, 지성)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까지 닮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에까지 이를 때 우리는 진정 "지복의 삶" 을 살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 분의 선하심을 따라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그 분이 이끄시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요한 신학적 지식들이 바로 삼위 하나님간의 사랑의 연합과 일체요,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사죄의 은혜 - 특히 종교개혁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 이며 이러한 은혜에 대한 재발견은 후기 정통주의에서 법정적 칭의론으로 과도하게 흐른것만 주의한다면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된다고 말한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이러한 "덕을 함양하는" 신학은 사라지고 있다고 차리 교수는 지적한다. "신학은 믿음에 대한 지성적인 합리화로 여겨지게 되었고 기독교인의 실제적인 삶과는 무관해져 버렸다." 신학은 더이상 신자들의 거룩한 삶과 지복의 삶을 위한 지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차리 교수의 고언대로, 칼빈에게서 현대 크리스챤들을 위한 "덕스러운 삶으로 이끄는 신학" (aretegenic Theology) 의 희망을 본다. 칼빈에게서 고도로 체계화된 칭의의 이론이나 전가의 이론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 자신을 목회자요 성경의 주석가로 여기며 "크리스챤의 삶" (The Christian Life) 을 그의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논의가 조금이라도 복잡해질 때면 그는 자주 "사변적인" 학자들의 그것을 궤변으로 물리치며 "쉽고 유용하게" (brevitas et facilitas) 성도들이 경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덕스럽게" (arete)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신학을 개진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종교의 개혁" 에 있지 않고 "신앙생활의 개혁" (Reformatus Religionis) 에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때, 상아탑에 매몰되어 신학적 개념과 용어들에 천착하는 정통주의의 과불급에서 다시 개혁파 고유의 "경건한 삶" 을 위한 신학, 그리고 신앙개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신의 존재를 논증하고, 고도의 변증을 거친 정통교리를 세우는 작업 등의 고전적인 신학하기는 번지수를 잘못찾은 무익한 신학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저자 엘렌 차리 (Ellen Charry) 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감리교에서 세례를 받고 퍼킨스 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현재는 프린스턴에서 유대교/기독교 연구를 진행 중인 신학자이다. 그녀가 프린스턴으로 스카웃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1997년에 나온 역작이 바로 [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기독교 신학의 목회적 기능] 이다. 그녀의 책 마지막 장에서 의미있게 다루는 칼빈의 신학적 경구가 바로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였고 그것이 그녀가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신학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칼빈을 신학적 원조 중 하나로 여기는 프린스턴 이사진들의 관심을 끌었으리라!
차리 교수의 주장은, 크리스챤 신학과 크리스챤의 삶 (실천) 의 괴리가 발생한 이유는 16세기 이후 신학에 접근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위 개신교 정통주의는 그 이전 기독교신학이 가졌던 실천적 삶의 신학을 고도로 학문화한 학교신학 (스콜라신학) 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과 사상은 모든 신자들의 실제적 유익 (salutary) 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기독교인의 믿음과 덕과 지복 (blissfulness) 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성도들을 위한 목회적 노력이었고 성도들은 그들의 신학을 통해 영적 도적적 유익을 얻었으며 그들의 삶은 신학이 제시하는 경건으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매우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여지지만, 차리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과 바울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에 대한 가르침, 초대교회의 아타나시우스, 바질, 그리고 어거스틴, 중세의 안셀름, 아퀴나스, 줄리앙,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세기 존 칼빈의 목회신학을 제시하며 신학의 참된 목적은 "상아탑에 갖힌' 정통신학에 있지 않고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에 영적복지를 함양하는 "덕으로 이끄는" (aretegenic) 신학임을 천명한다.
칼빈을 따라, 차리 교수는 우리 (신학자들과 성도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우리의 마음 (mind - 생각, 지성)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까지 닮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에까지 이를 때 우리는 진정 "지복의 삶" 을 살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 분의 선하심을 따라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그 분이 이끄시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요한 신학적 지식들이 바로 삼위 하나님간의 사랑의 연합과 일체요,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사죄의 은혜 - 특히 종교개혁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 이며 이러한 은혜에 대한 재발견은 후기 정통주의에서 법정적 칭의론으로 과도하게 흐른것만 주의한다면 성도들에게 큰 유익이 된다고 말한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이러한 "덕을 함양하는" 신학은 사라지고 있다고 차리 교수는 지적한다. "신학은 믿음에 대한 지성적인 합리화로 여겨지게 되었고 기독교인의 실제적인 삶과는 무관해져 버렸다." 신학은 더이상 신자들의 거룩한 삶과 지복의 삶을 위한 지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차리 교수의 고언대로, 칼빈에게서 현대 크리스챤들을 위한 "덕스러운 삶으로 이끄는 신학" (aretegenic Theology) 의 희망을 본다. 칼빈에게서 고도로 체계화된 칭의의 이론이나 전가의 이론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 자신을 목회자요 성경의 주석가로 여기며 "크리스챤의 삶" (The Christian Life) 을 그의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논의가 조금이라도 복잡해질 때면 그는 자주 "사변적인" 학자들의 그것을 궤변으로 물리치며 "쉽고 유용하게" (brevitas et facilitas) 성도들이 경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덕스럽게" (arete)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신학을 개진한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종교의 개혁" 에 있지 않고 "신앙생활의 개혁" (Reformatus Religionis) 에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때, 상아탑에 매몰되어 신학적 개념과 용어들에 천착하는 정통주의의 과불급에서 다시 개혁파 고유의 "경건한 삶" 을 위한 신학, 그리고 신앙개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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