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카톨릭은 마틴 루터를 어떻게 평가해 왔을까?
1967년에 출간된 이 책은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에 대한 카톨릭 측의 다양한 시각들을 제 삼자격이라 할만한 프랑스 개혁파 학자인 리차드 스토페가 추적 평가하는 소책자이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 리차드 스토페가 카톨릭의 루터 이해를 역사적으로 추적 평가하기에 매우 적합한 프랑스 개혁파 신학자라는 점이다. 스토페는 프랑스 소르본느에서 종교개혁사를 가르쳤던 칼빈 신학자였으며, 카톨릭과 루터파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두 진영 신학과 역사에 정통한 개혁파 학자이기에 모두가 인정할 만한 신/구교 평가서의 저자로 낙점이 된 것이라 생각된다.
루터에 대한 카톨릭의 입장을 추적하며 스토페는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과한 것은 과한 것대로 지적하고 새겨 들어야 할 것은 진지하게 경청한다. 그가 추적하는 지난 450년간 (그의 책이 출간된 것이 1967년이므로) 카톨릭의 루터 이해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누구든지 로마 카톨릭의 루터 학자들이 1904년 이래로 어떻게 루터를 연구해왔는지 간략하게라도 살펴본다면, 이전까지 루터에 대해 가졌던 파괴적인 비난(destructive criticism)으로 부터 존경에 찬 조우(respectful encounter)로 기조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7).
천천히 살펴보자! 루터에 대한 "파괴적인 비난" 은 누구였으며 카톨릭의 달라진 시각은 어느 것을 말함인가?
루터에 대한 카톨릭의 초기 입장의 대표자는 요하네스 코크레우스(Johnnes Cochlaeus, 1479-1552)이다. 그는 역사상 루터에 대한 전기를 최초로 쓴 카톨릭 학자로서, 루터와 동시대인으로 교회분열의 책임을 루터에게 묻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담들을 쏟아낸 사람이다: "루터는 마귀의 자식이며, 귀신에 들린 자이며, 거짓과 허영심에 가득찬 자이다. 그의 개혁은 사실 도미닉 수도사 텟젤이 면죄부 실적이 좋으니까 자기도 돈을 벌고 싶은 시기심에 벌인 일이다. 루터는 원래 술을 즐기고 여자를 탐하는 자이다. 양심도 없는 자이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자이다. 그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요, 95개 반박문도 멋진 수도승 모자를 사려고 42 굴덴(금화)을 얻어보려 벌인 일이었다. 루터는 거짓말장이고 위선자이고 겁많고 말만 많은 자이다. 이 자에게는 독일인의 피란 하나도 흐르지 않는다."
심지어 카톨릭 학자들까지도 코클레우스의 비난이 도를 넘고 진영논리에 가득한 근거없는 낭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한가지 우려스러운 역사적 사실은 1900년대 초기까지 약 300여년 동안(사실은 지금까지도) 일반 카톨릭 교도들에게 코클레우스가 그려놓은 루터, 마귀의 자식이요 색욕에 가득한 이단자로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영논리는 루터란에서도 똑같이 행해졌었다는 것이 올바른 역사적 성찰일 것이다. 루터가 교황과 주교회에 날린 무수한 적그리스도적 비난은 차치하고서라도 자기와 성찬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쯔빙글리를 "마귀야, 물러가라!" 며 악수조차 거절했던 그였기에, 16세기가 치열한 대립의 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일방적인 비난은 그 때나 지금이나 과불급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카톨릭의 루터 연구는 급물살을 탄다. 그 첫 번째 주자는 하인리히 데니플(Heinrich Denifle, 1844-1905)이었다. 그는 도미닉 종파에 소속된 학자로서 중세신학과 신비주의 연구에 정통한 학자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루터란(개신교) 진영에서의 루터연구가 답보 상태였다. 1517년 이후의 루터 저작들은 자료적으로 확보가 되었지만, 그 이전의 자료들 - 소위 젊은 루터(Young Luther)와 종교개혁 직전의 변화들 - 은 바티칸 지하에 봉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80년 바티칸의 비밀장서관이 카톨릭 학자들에게 공개되었고, 이 때 젊은 루터의 저작들 - 어거스틴 수도회의 순결서약서, 수도원장의 지도편람 편지들, 그리고 그가 1515-16년에 강의했던 로마서 강론등 - 이 무더기로 나왔다. 이 때 바티칸 장서관 사서가 바로 데니플이었다.
데니플은 소위 젊은 루터의 저작물들을 심도있게 연구하여 1904-6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루터 연구물을 내놓는다. 당대의 최고 개신교 학자들(하르낙과 리츨)은 먼 산 불구경하듯 무슨 이야기가 나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데니플이 발견한 종교개혁 이전 루터의 심각한 문제 두 가지!!!
첫째, 루터의 1515년 로마서 주석을 강론할 당시 그의 수도원 일지등에서 보여지는 루터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 그것은, "음욕"(concupiscentia)이었으며, 데니플은 그것이 루터가 육체의 욕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굴복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즉, 종교개혁의 모토인 "이신칭의" -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사해주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 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 하기위한 루터의 변명이었을 뿐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 앞에 자신의 순결서약을 깨고 육욕에 빠진 그의 이후의 삶이 증명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은 학문적으로 어느 정도 강력한 근거를 가진 것이었는데, 중세신학의 전문가로서 데니플은 어거스틴 이래로 카톨릭에서 정통으로 인정한 66명의 로마서 주해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루터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 1:17) 주석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루터가 나중에 주장하던 것과는 다르게, 카톨릭의 정통학자들은 모두가 루터와 동일하게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수동적으로 받게되는 칭의를 말하지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의를 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데니플의 한마디: "루터는 자기 주장을 위해 카톨릭 정통교리를 왜곡했다! 루터는 거짓말장이다!!"
데니플의 루터 연구는 이전에 행해지던 루터 인격살해식 비판에서 최소한 루터의 신학 자체를 1차 자료 연구를 통해 쏟아낸 비판이라는 점에서 괄목할 만하다. 데니플의 연구는 100여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루터 연구자들이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있다. 물론, 루터에 대한 인격적인 비난 - 정욕에 사로잡힌 젊은 수도승, 그에 따른 이신칭의 교리, 순결서약 파기 - 등은 과도한 비난이라는 평가가 자체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루터의 카톨릭 신학 이해가 - 그가 아퀴나스 중심의 정통신학을 잘 몰랐던지 아니면 자신의 스승들이 가졌던 유명론적 신학으로 카톨릭 신학 전체를 침소봉대 했던지간에 - 어딘가 과도했던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대 카톨릭의 루터연구는 이전 세대 연구에 비해 진일보 한 느낌이다. 물론, 하트만 그리자(Hartmann Grisar, 1845-1932)는 여전히 루터의 정신세계가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에서 이신칭의의 근거를 찾기도 하지만, 조셉 롤츠(Joseph Lortz, 1887-1975)에 이르면 이전의 카톨릭 루터 해석을 거부하며 루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드디어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롤츠는 루터가 아주 좋은 수도승이었으며 십자가의 신학 등과 같은 매우 깊은 신학적 통찰력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루터에 대한 그의 긍정적 평가는 이신칭의에 대한 한스큉의 전향적인 자세와 함께 루터에 대한 카톨릭의 변화된 시각을 반영한다. 루터에 대한 롤츠의 비판은 데니플의 신학적 비판에서 드러났듯이 루터의 중세스콜라 신학에 대한 무지에 있다고 말한다. 롤츠는 루터가 스코투스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유명론(via moderna)의 신학방법에 천착하기보다 정통 카톨릭 신학 - 아퀴나스의 신학(via antiquia) - 에 좀 더 귀기울였어도 교회 분열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평가한다. 롤츠의 루터에 대한 존경에 찬 조우 이후, 스토페는 고든 럽(Gordon Rupp)과 영국의 평신도 역사가 존 토드(John Todd) 등의 루터에 대한 긍정적 묘사에 주의를 기울인다.
스토페는 루터에 대한 카톨릭의 입장 변화에 대해 긍정적 평가와 함께 상호간의 성찰을 요구한다. 이미 450년이나 갈라서고 서로 치열하게 영혼을 난도질해왔던 두 진영이 진정 하나된다는 것은 요원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두 진영간에 객관적 이해와 자기 성찰이 계속적으로 진행된다면 극과극의 대립으로 모두가 공멸하는 비극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이 1967년에 나왔고 스토페는 독일 카톨릭과 루터란의 역사적 "이신칭의에 관한 합의"(1999)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의 요청은 어느면에서 "이미" 를 경험했으면서도 "아직" 여전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최소한 객관적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자기를 성찰하려는 자세야 말로 종교개혁의 참된 유산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최소한의 객관적 이해와 조금의 자기성찰까지도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들이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한다 - 카톨릭 진영이나 개신교 진영 모두에 여전히 넓고 깊이 뿌리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