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철학사/유대칠/이상북스/모중현 명예편집위원
철학 노동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저자 유대칠은 가진 자의 '홀로 있음'이 아닌 민중과 '더불어 있음'의 철학을 고민하며 연구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인 이 책은 '대한민국 철학'의 근본적인 조건과 그 정신, 한국철학에 영향을 준 중국과 일본의 정황, 한국철학의 역사와 그러한 한국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사상들을 다룬다.
저자가 강조하는 철학의 핵심은 민중으로부터의 철학이다. 즉 한국철학은 고난 가운데 삶을 살아갔던 한국 민중이 중심 되는 철학이다. 또한 그 철학은 각 개개인이 흩어져있는 존재가 아닌 더불어 함께 있는, 하나 되어 있는 철학이다. 곧 "더불어 있음의 철학"(43)이다. 그는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한국의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철학과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들, 제도 속에 있으면서 주목받았던 인물들이 아니다. 민중 스스로 '나'의 철학이라 부를 수 있도록 철학을 한 분들. 그들의 철학이 대한민국 철학이며, 그 철학의 역사가 대한민국철학사임을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한국철학의 주요한 기초가 3·1 혁명과 한글의 창제, 서당이라는 공간이라고 한다. 3·1 혁명으로 인해 민중들은 스스로 통치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는 혁명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고스란히 "대한민국 임시헌법"으로 이어졌고, 대한민국의 헌법에 녹아져 있다. 한글은 위계의 조선을 다지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 의도치 않게 한글은 서당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민중의 언어로 기능하게 되었다. 곧 나의 생각을 나의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철학의 언어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철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 계기를 저자는 양명학과 서학, 동학의 출현과 보급으로 본다. 먼저 저자는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철학은 '통치자의 철학'이며 이는 '위계의 존재론'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통제를 위한 철학이며, 민중의 철학이 아니다. 성리학과 달리 양명학은 양반의 기득권에 대항하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철학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철학은 눈물의 철학이며, 고난의 주체가 철학의 주체가 되는 철학이다. 이러한 양명학의 정신은 신흥 무관학교와 대종교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평등사상, 민족과 개인의 주체성이 강조되었다.
서학은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이었으므로,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했다. 우리말로 쓰인 정약종의《주교 요지》를 통해 민중들은 자신의 고난과 아픔을 직접 대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존재할 수 있는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서학을 통해 그들은 복음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서학은 유럽의 철학이며, 우리 철학은 아니었다.
결국 한국철학의 출산은 최제우의 《용담유사》로 시작되었다. 동학의 신은 서학의 신과는 달랐다.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신이나 나의 밖에서 존재하는 완전자의 모습이 아니라, 동학의 신은 함께 이루어져 가고 변화한다. 동학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 철학을 가능하게 했다. 고난과 마주하며 스스로 존재를 결정하겠다고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혁명은 실패했겠지만, 그 정신은 한국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저자는 3장에서 한국철학의 주변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사정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홀로 있지 않고 중국과 일본의 영향과 관계 안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유럽의 장점을 빨리 깨우치고, 유럽의 철학을 자신의 철학으로 느리지만 천천히 내면화시켰다. 그리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철학으로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은 민중이 없다. 일본의 철학은 국가에 대한 '충'의 철학이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철학이다. 따라서 참된 철학이라 할 수 없다.
중국은 어떠한가? 중국은 여러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들이 중심이라는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른 시기에 유럽으로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와 유럽의 사상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그러한 사상들을 스스로 내면화하지 못했다. 그들의 철학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것이 더 가치 있다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뒤늦게야 자신들의 선택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일본을 통하여 서구의 사상을 배우기에 이른다. 한국도 철학의 변두리에 있었다. 우리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우리의 철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해야 한다.
4장에서는 한국철학의 민낯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한국철학의 '회임'과 '출산'이 가능했지만, 제도 속의 한국철학은 민중이 빠진 철학이었다. 그들의 철학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당대에 흔치 않은 유학파로 국내에 돌아와서 정계와 교육계에 몸담았다. 그들의 철학은 이 땅의 민중에 대한 고민 없이 등장했으며, 민중의 고난이나 주체성은 그들 철학의 대상이나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현실에 안주하며 현실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철학을 발전시켰다.
5장은 이 책의 핵심이다. 저자는 윤동주와 함석헌, 류영모, 문익환, 장일순의 철학을 톺아본다. 특히 많은 분량을 함석헌의 철학에 할애한다. 이들의 철학은 모두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고난에 마주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민중의 아픔에 함께 한다. 현재 아파하고 있는 민중의 외침에 반응하는 철학이다. 우리 밖의 것을 동경하며 그리워하지 않는다. 철저히 우리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울어주고 함께 싸운다. 이들 철학의 중심은 바로 민중이었다.
철학의 주체는 바로 이 땅 민중이다. 이 땅의 부조리를 가장 잘 알고, 그 가운데 가장 아파하고 가장 신성하게 그 부조리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은 바로 민중이다. 철학의 주체는 바로 민중이고, 대상은 그 민중의 존재론적 본질, 바로 신성함이다(458).
6장에서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주장한다. 그는 유럽과 지중해의 오랜 철학 가운데 '나'는 홀로 있는 존재였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의 철학은 '너'와 더불어 '우리' 가운데 있는 '나'로서의 '더불어 있음'의 '서로주체성'임을 역설한다. 오랜 시간 민중의 외침은 우리의 눈에 실패로 보인다. 하지만 그 역사는 실패가 아니다. 민중이 중심 되어 외친 철학적 선언은 우리의 정신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전히 이 땅에 부조리와 비극이 계속된다. 우리는 고난 앞에 외로이 있지 않고 더불어 함께 있다. 끈질기게 우리를 옭아매는 부조리한 세상 가운데서도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보자. 결코 홀로가 아님을. 더불어 함께임을 기억하자. 거기로부터 우리의 철학, 우리의 사상, 우리네 삶이 시작된다.
이 책에서의 '철학'을 '신학'이나 '교회'로 바꾸어 읽어보면 고스란히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교회'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터져나온다. 현실과 동떨어진 신학과 교회는 공허한 울림이다. 한 사람의 고통과 함께 하지 않는 신학은 무의미하며, 정의롭지 못하다. 우리의 신학과 교회가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객관적으로 통찰력있게 보여주는 귀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