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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름다운 진리의 힘
나니아 나라 이야기 6- 은의자/C. S. 루이스/시공주니어/[나상엽]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어쩌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나의 반감을 두고 그리 말할 수도 있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익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 해악의 심각성, 특별히 소위 복음주의 안에서 은근슬쩍 자리를 꿰차 앉아 진리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는 꼴을 볼 때마다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다.
이런 나를 두고 더러는 꼴통 보수라 하며 빈정대기도 할 것이며, 더러는 지독한 근본주의자라 수군대기도 할 것이다. 또 실제로 그런 소리를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아프고 속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나를 돌아보곤 했다. 때마다 불꽃같으신 주님의 눈은 내 심장과 폐부를 뚫어보셨고, 그분 앞에서 눈물로 자복할 것들을 보이셨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오! 실로 그분만이 거룩하시다.) 그들을 향해 품었던 분노와 적개심의 그 낮고 더럽고 추잡한 질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한 마디로 거의 빈 틈 없는 ‘논리’이다. 논리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가 그토록 아름다운 진리를 좀먹고 들어왔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진리 체계를 하나의 수사로, 또한 그 역시 하나의 전통으로 치부하며 값없는 것으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모든 진리를 언어와 논리로 붙잡으려 했고,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길들여지 않는 그것들에 대해서는 가치 판단을 보류하게 했다. 그리고 그 결론의 덧없음을 마치 동양화의 여백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위와 포즈로 감추면서 점잔빼며,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 아름다운 진리는 보지 못하게 하고, 다만 진리의 모방이요 아류인 논리로 눈가림 해왔다. 진리의 모방과 아류를, 다른 말로 성경은 거짓이라 한다.
나는 반지성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신 대로 내 마음과 감정과 지성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기 원하며, 그러고자 애쓴다(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교묘한 지성주의 안에서 그저 ‘형님 아우’ 하며 키득대는 모습을 볼 때면, 지성에 대한 혐오감이 들 정도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빌라도와 헤롯이 예수님 당시에 친구가 되었던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것이 내게 있어서 사단으로부터 오는 또 하나의 시험이요 또한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쉽지 않은 시련임을 고백한다.
여기 C. S. 루이스의 『나니아나라 이야기 6권』 「은의자」는 신학에 길들여지지 않은 영문학가의 필치로 진리의 힘과 아름다움을 정말이지 멋지게 그려낸 책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반대인 거짓의 교활함과 어두움을 통쾌하게 고발하며 패퇴시키고 있다.
간단히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니아의 왕 캐스피언 10세의 아내가 푸른 뱀에게 물려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그 아들 릴리언 왕자가 어머니의 복수를 외치며 들판으로 나아가나, 그 역시 푸른 뱀의 유혹에 속아 행방불명된다. 이때 현실세계(현실세계라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그림자일까?)의 영국의 유스터스와 질이라는 어린이들이 아슬란 님의 부름을 따라 나니아로 가게 되고, 그들은 지하세계에 갇혀 위험에 처한 릴리언 왕자를 구출해낸다.
특별히 나니아 시리즈 중 6권의 이야기의 중요성은, 이것이 진리와 거짓의 대결구도라는 것이다. 푸른 뱀으로 묘사된 마녀는 릴리언 왕자와 그들을 구하러 온 어린이들에게, 아슬란 님을 향한 그들의 모든 믿음들은 다 사실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말한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마녀의 교묘한 논리에 거의 속아서 무력해지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흔히 영웅구조의 설화들에서 나타나는 조력자의 등장이 아니다. 이 영웅구조들 역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데, 이는 곧 우리 내부로부터 분출되는 믿음의 힘이다. 다음의 대사를 보라.
“그 모든 것들…… 나무와 풀과 태양과 달과 별과 그리고 아슬란 님까지 모두 꿈이었다고! 혹은 우리가 지어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지어낸 것들이 내 눈에는 실제 사물보다 훨씬 중요해 보인다는 점이오. (…… ) 우리가 만든 가짜 세계가 당신의 진짜 세계보다 낫단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난 가짜 세계 편에 있겠소. 설령 우리를 이끌어주는 아슬란 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난 아슬란 님 편에 서겠소.” 218p
무엇인가? 논리로 이겨내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격다짐인가? 그저 주관적인 체험이요 증거도 빈약하며 검증되지 않은 자신만의 생각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그냥 무시하겠는가?
아니다! 설령, 이것이 논리적 귀결의 승리가 아니더라도, 논거가 빈약하고 객관적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진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믿음이 마녀를 무찔러낸 무기가 되었다.
이것 보라! 마녀의 거짓의 마법을 이겨낸 것은 오늘날의 세대가 중시하는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논거가 아니라 선과 악에 대한 어쩌면 지극히 경험적이요 주관적인 주장이다. ‘지어낸 것들이 내 눈에는 실제 사물보다 훨씬 중요해 보인다는 점이오. (…… ) 우리가 만든 가짜 세계가 당신의 진짜 세계보다 낫단 말이오!’ 이 얼마나 빈약한 논리인가? ‘내 눈에는…’ 이라니!
그러나 여기에 힘이 있고, 승리가 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안다. 그들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로서 카타르시스화된다. 이것이야말로 논리를 뛰어 넘는 진리의 힘이다. 우리의 온 인격이 이미 맛보아 아는 그 선함! 우리는 여기서 직감적으로 오늘날의 모든 철학과 논리학과 수사학이 정의하는 진리가 지극히 좁은 안목임을 발견하게 되며, 따라서 진리는 단순한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악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아름다움과 추함의 문제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지성의 범위 안에 제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온 인격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영감어린 증언을 보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이런 면에서 ‘은폐되지 않은 것,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 풀이되는 헬라어 단어 aletheia(진리로 번역됨)는 언어의 한계의 그 끝점에 다달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면에서 요한복음 1장 14절, 또 18절은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셨다! 그러니 바로 그분이 진리이시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그러니 오늘날, 더 이상 진리를 시인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더더욱 진리이신 이 분을 굳게 붙들어야 할 것이다. 논리의 시녀가 될 것이 아니라 계시의 자녀로서, 모든 논리를, 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않는(고전 4:6) 겸손함의 미덕이야말로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떠벌리고 자랑하는 오늘날에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이 친히 영감으로 감동하신 성경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딤후 3:16,17)이 과거 자유주의와 계몽주의가 득세하던 지난날보다 오늘날 배나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북쪽 마녀들은 모두 똑같은 것을 노리며, 다만 시대가 변할 때마다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다를 뿐”인데(272p), 바로 오늘날이야말로 마지막 때인지라 훨씬 더 교묘하고 교활하게 우리 곁에서 공격해오기 때문이다.
진리의 웅장한 힘을 이야기라는 유력한 그릇에 담아서 우리 인류로 맛보게 해준 작가에게 마음 깊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로서, 은폐되지 않은 하나님, 드러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경이로운 진리의 힘을 겸손히 떨쳐보이셨던 나의 예수님께 정성을 담아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저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루이스는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 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면서 소설, 평론, 동화 들을 썼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그가 처음으로 쓴 동화이자 마지막으로 쓴 동화이며, 1957년에 <나니아 나라 이야기> 제 7권<마지막 전투>로 카네기 상을 수상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어쩌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나의 반감을 두고 그리 말할 수도 있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익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 해악의 심각성, 특별히 소위 복음주의 안에서 은근슬쩍 자리를 꿰차 앉아 진리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는 꼴을 볼 때마다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다.
이런 나를 두고 더러는 꼴통 보수라 하며 빈정대기도 할 것이며, 더러는 지독한 근본주의자라 수군대기도 할 것이다. 또 실제로 그런 소리를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아프고 속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나를 돌아보곤 했다. 때마다 불꽃같으신 주님의 눈은 내 심장과 폐부를 뚫어보셨고, 그분 앞에서 눈물로 자복할 것들을 보이셨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오! 실로 그분만이 거룩하시다.) 그들을 향해 품었던 분노와 적개심의 그 낮고 더럽고 추잡한 질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한 마디로 거의 빈 틈 없는 ‘논리’이다. 논리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가 그토록 아름다운 진리를 좀먹고 들어왔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진리 체계를 하나의 수사로, 또한 그 역시 하나의 전통으로 치부하며 값없는 것으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모든 진리를 언어와 논리로 붙잡으려 했고,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길들여지 않는 그것들에 대해서는 가치 판단을 보류하게 했다. 그리고 그 결론의 덧없음을 마치 동양화의 여백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위와 포즈로 감추면서 점잔빼며,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 아름다운 진리는 보지 못하게 하고, 다만 진리의 모방이요 아류인 논리로 눈가림 해왔다. 진리의 모방과 아류를, 다른 말로 성경은 거짓이라 한다.
나는 반지성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신 대로 내 마음과 감정과 지성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기 원하며, 그러고자 애쓴다(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교묘한 지성주의 안에서 그저 ‘형님 아우’ 하며 키득대는 모습을 볼 때면, 지성에 대한 혐오감이 들 정도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빌라도와 헤롯이 예수님 당시에 친구가 되었던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것이 내게 있어서 사단으로부터 오는 또 하나의 시험이요 또한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는 쉽지 않은 시련임을 고백한다.
여기 C. S. 루이스의 『나니아나라 이야기 6권』 「은의자」는 신학에 길들여지지 않은 영문학가의 필치로 진리의 힘과 아름다움을 정말이지 멋지게 그려낸 책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반대인 거짓의 교활함과 어두움을 통쾌하게 고발하며 패퇴시키고 있다.
간단히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니아의 왕 캐스피언 10세의 아내가 푸른 뱀에게 물려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그 아들 릴리언 왕자가 어머니의 복수를 외치며 들판으로 나아가나, 그 역시 푸른 뱀의 유혹에 속아 행방불명된다. 이때 현실세계(현실세계라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그림자일까?)의 영국의 유스터스와 질이라는 어린이들이 아슬란 님의 부름을 따라 나니아로 가게 되고, 그들은 지하세계에 갇혀 위험에 처한 릴리언 왕자를 구출해낸다.
특별히 나니아 시리즈 중 6권의 이야기의 중요성은, 이것이 진리와 거짓의 대결구도라는 것이다. 푸른 뱀으로 묘사된 마녀는 릴리언 왕자와 그들을 구하러 온 어린이들에게, 아슬란 님을 향한 그들의 모든 믿음들은 다 사실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말한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마녀의 교묘한 논리에 거의 속아서 무력해지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흔히 영웅구조의 설화들에서 나타나는 조력자의 등장이 아니다. 이 영웅구조들 역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데, 이는 곧 우리 내부로부터 분출되는 믿음의 힘이다. 다음의 대사를 보라.
“그 모든 것들…… 나무와 풀과 태양과 달과 별과 그리고 아슬란 님까지 모두 꿈이었다고! 혹은 우리가 지어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지어낸 것들이 내 눈에는 실제 사물보다 훨씬 중요해 보인다는 점이오. (…… ) 우리가 만든 가짜 세계가 당신의 진짜 세계보다 낫단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난 가짜 세계 편에 있겠소. 설령 우리를 이끌어주는 아슬란 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난 아슬란 님 편에 서겠소.” 218p
무엇인가? 논리로 이겨내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격다짐인가? 그저 주관적인 체험이요 증거도 빈약하며 검증되지 않은 자신만의 생각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그냥 무시하겠는가?
아니다! 설령, 이것이 논리적 귀결의 승리가 아니더라도, 논거가 빈약하고 객관적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진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믿음이 마녀를 무찔러낸 무기가 되었다.
이것 보라! 마녀의 거짓의 마법을 이겨낸 것은 오늘날의 세대가 중시하는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논거가 아니라 선과 악에 대한 어쩌면 지극히 경험적이요 주관적인 주장이다. ‘지어낸 것들이 내 눈에는 실제 사물보다 훨씬 중요해 보인다는 점이오. (…… ) 우리가 만든 가짜 세계가 당신의 진짜 세계보다 낫단 말이오!’ 이 얼마나 빈약한 논리인가? ‘내 눈에는…’ 이라니!
그러나 여기에 힘이 있고, 승리가 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안다. 그들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로서 카타르시스화된다. 이것이야말로 논리를 뛰어 넘는 진리의 힘이다. 우리의 온 인격이 이미 맛보아 아는 그 선함! 우리는 여기서 직감적으로 오늘날의 모든 철학과 논리학과 수사학이 정의하는 진리가 지극히 좁은 안목임을 발견하게 되며, 따라서 진리는 단순한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악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아름다움과 추함의 문제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그것은 지성의 범위 안에 제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온 인격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영감어린 증언을 보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이런 면에서 ‘은폐되지 않은 것,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 풀이되는 헬라어 단어 aletheia(진리로 번역됨)는 언어의 한계의 그 끝점에 다달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면에서 요한복음 1장 14절, 또 18절은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셨다! 그러니 바로 그분이 진리이시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그러니 오늘날, 더 이상 진리를 시인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더더욱 진리이신 이 분을 굳게 붙들어야 할 것이다. 논리의 시녀가 될 것이 아니라 계시의 자녀로서, 모든 논리를, 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않는(고전 4:6) 겸손함의 미덕이야말로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떠벌리고 자랑하는 오늘날에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이 친히 영감으로 감동하신 성경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딤후 3:16,17)이 과거 자유주의와 계몽주의가 득세하던 지난날보다 오늘날 배나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북쪽 마녀들은 모두 똑같은 것을 노리며, 다만 시대가 변할 때마다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다를 뿐”인데(272p), 바로 오늘날이야말로 마지막 때인지라 훨씬 더 교묘하고 교활하게 우리 곁에서 공격해오기 때문이다.
진리의 웅장한 힘을 이야기라는 유력한 그릇에 담아서 우리 인류로 맛보게 해준 작가에게 마음 깊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로서, 은폐되지 않은 하나님, 드러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경이로운 진리의 힘을 겸손히 떨쳐보이셨던 나의 예수님께 정성을 담아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저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루이스는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 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면서 소설, 평론, 동화 들을 썼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그가 처음으로 쓴 동화이자 마지막으로 쓴 동화이며, 1957년에 <나니아 나라 이야기> 제 7권<마지막 전투>로 카네기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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