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서평
영성있는 복음
존 넬슨 다비의 영성있는 복음/존 넬슨 다비/이종수/형제들의집/[북뉴스]
본서는 저자의 소개에 의하면 근세의 터틀리안으로 일컬어지는 존 넬슨 다비의 3편의 짧은 설교을 묶은 것이다.
이것이 설교로 여겨지는 이유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라는 호격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 편의 복음적인 설교를 통해서 복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처음 소개되는 “복음하나-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은 일반 자연인들의 양심이 호소하는 바의 여러 가지 형상들, 즉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11),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에 대한 두려운 경고(12) 등이 있는데, 자연인이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을 먼저 문제로 제기한다. 그런 자연인이 하나님을 만날 때는 하나님께 대항하던 것들이 박살나고(15), 그럼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알게 될 때 위로와 기쁨이 찾아오게 된다(24).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실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18),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29). 그리고 여기서 고백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되어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고자 할 때 주저하지 마십시오. 확고한 마음으로 즉각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과감히 뛰어들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공적으로 담대하고 고백하는 것이 영적 싸움에서 절반 이상을 이기는 것임을 저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이처럼 세상을 향한 결정적이고 공개적인 대항을 하게 되면, 일단 신자는 웃음거리가 되며 조롱을 당합니다. ... 하지만 머지않아 동료들은 우리의 결연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경우로 여기며 우리를 단념할 것입니다. 또한 비난과 조롱에서도 상당히 자유로운 상태로 우리를 내버려 둘 것입니다”(44~45).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또한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적당하게 타협하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행동을 할 때가 너무나 많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심을 믿고 고백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복음으로 여길 만하다.
그 다음에 소개되는 “복음 둘- 알곡과 가라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국 비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저자는 초점을 가라지의 무성함에 전제로 하면서 시작한다. 이것은 매우 새롭고 신선한 접근이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즉 가라지로부터 쉼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길 원하신다고 저자는 주장한다(51). 가라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다(52). 저자는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멸망을 향해 무르익는 것”(68)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불법 가운데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자신들의 힘과 능력, 또는 권세를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했다(69). 그러나 그러한 불법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70).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72). 그러므로 단순하게 구주의 형상을 닮도록 기도하라(81)고 저자는 말한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불법과 악이 성공하게 무성하게 자라는가? 그런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심지어 그들을 부러워하고 닮아 가려고 하는가?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메마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나오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다. 저자는 그런 점에서 가라지의 결국을 바라보고, 알곡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임으로 오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 소개되는 “복음 셋-하늘로 좇아 경고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음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율법아래의 하나님의 음성도 땅을 진동시켰다(86). 그렇다면 승천하신 주님으로부터 들려지는 하늘의 음성은 땅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모든 것들, 곧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진동시키고 멸할 것이다.
부록으로는 저자에 대한 “약전”이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본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본서의 출판도 그러한 저자의 신학과 교회를 따르는 “형제들의 집”에서 출판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이 출판사의 다른 저술들을 통해서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개는 독자들로 하여금 편견이나 다른 전제된 사고를 갖고 책을 읽어 내려가게 할 위험이 있음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서는 이렇게 복음에 대한 3가지 주장을 간단하게 설교식의 문장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곧 자연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두려움이 있으며, 그로인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심을 알게 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과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고 하는 이 진리를 너무나 가볍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실패와 좌절가운데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본서는 귀중한 기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가라지의 무성함을 너무나 부러워하고 그들을 답습하지 못해서 안달할 때가 너무나 많다. 뿐만 아니라 그런 가라지를 당장 처리해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그 가라지는 나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훈련받기를 거절하고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자들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극복할 힘과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국을 보고, 또한 우리들의 결국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볼 때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멸망당할 것을 부러워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우리들 자신의 믿음을 극화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 것인가?
저자는 또한 오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다 진동하고 파멸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 음성 듣는 것을 거절하면 진동할 것이기에 성령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본서를 읽는 독자라면 쉽게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의 설교들은 너무나 쉽고 귀에 즐거움을 가미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차분히 2번에 걸쳐서 읽게 될 때에 저자의 의도와 복음의 진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 권성준
저자 존 넬슨 다비(1800-1881)
근세의 터툴리안으로 일컫어지는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계로 1800년 11월 18일 리프 캐슬, 킹스 타운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거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아일랜드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잠시 봉직하다가 1825년에 영국 국교회의 부제로, 그 이듬해에는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다비는 그리스도의 간증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유럽 전역에 배포하였고, 1837년에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1840년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여러 교회가 형성되었다.
만년에는 유럽 전역은 물론 캐나다, 미국, 서인도제도, 뉴질랜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영감이 넘치는 찬송을 수없이 작사하였다. 그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위해 드려진 삶이었다. 1882년 4월 29일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안시기과 상급을 주실 주님께로 갔다.
본서는 저자의 소개에 의하면 근세의 터틀리안으로 일컬어지는 존 넬슨 다비의 3편의 짧은 설교을 묶은 것이다.
이것이 설교로 여겨지는 이유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라는 호격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 편의 복음적인 설교를 통해서 복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처음 소개되는 “복음하나-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은 일반 자연인들의 양심이 호소하는 바의 여러 가지 형상들, 즉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11),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에 대한 두려운 경고(12) 등이 있는데, 자연인이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을 먼저 문제로 제기한다. 그런 자연인이 하나님을 만날 때는 하나님께 대항하던 것들이 박살나고(15), 그럼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알게 될 때 위로와 기쁨이 찾아오게 된다(24).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실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18),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29). 그리고 여기서 고백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되어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고자 할 때 주저하지 마십시오. 확고한 마음으로 즉각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과감히 뛰어들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공적으로 담대하고 고백하는 것이 영적 싸움에서 절반 이상을 이기는 것임을 저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이처럼 세상을 향한 결정적이고 공개적인 대항을 하게 되면, 일단 신자는 웃음거리가 되며 조롱을 당합니다. ... 하지만 머지않아 동료들은 우리의 결연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경우로 여기며 우리를 단념할 것입니다. 또한 비난과 조롱에서도 상당히 자유로운 상태로 우리를 내버려 둘 것입니다”(44~45).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또한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적당하게 타협하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행동을 할 때가 너무나 많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심을 믿고 고백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복음으로 여길 만하다.
그 다음에 소개되는 “복음 둘- 알곡과 가라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국 비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저자는 초점을 가라지의 무성함에 전제로 하면서 시작한다. 이것은 매우 새롭고 신선한 접근이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즉 가라지로부터 쉼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길 원하신다고 저자는 주장한다(51). 가라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다(52). 저자는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멸망을 향해 무르익는 것”(68)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불법 가운데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자신들의 힘과 능력, 또는 권세를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했다(69). 그러나 그러한 불법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70).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72). 그러므로 단순하게 구주의 형상을 닮도록 기도하라(81)고 저자는 말한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불법과 악이 성공하게 무성하게 자라는가? 그런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심지어 그들을 부러워하고 닮아 가려고 하는가?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메마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나오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이 있다. 저자는 그런 점에서 가라지의 결국을 바라보고, 알곡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임으로 오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 소개되는 “복음 셋-하늘로 좇아 경고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음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율법아래의 하나님의 음성도 땅을 진동시켰다(86). 그렇다면 승천하신 주님으로부터 들려지는 하늘의 음성은 땅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모든 것들, 곧 그 음성을 듣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진동시키고 멸할 것이다.
부록으로는 저자에 대한 “약전”이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본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본서의 출판도 그러한 저자의 신학과 교회를 따르는 “형제들의 집”에서 출판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이 출판사의 다른 저술들을 통해서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개는 독자들로 하여금 편견이나 다른 전제된 사고를 갖고 책을 읽어 내려가게 할 위험이 있음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서는 이렇게 복음에 대한 3가지 주장을 간단하게 설교식의 문장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곧 자연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두려움이 있으며, 그로인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심을 알게 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과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고 하는 이 진리를 너무나 가볍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실패와 좌절가운데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점에서 본서는 귀중한 기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가라지의 무성함을 너무나 부러워하고 그들을 답습하지 못해서 안달할 때가 너무나 많다. 뿐만 아니라 그런 가라지를 당장 처리해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그 가라지는 나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훈련받기를 거절하고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자들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극복할 힘과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국을 보고, 또한 우리들의 결국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볼 때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멸망당할 것을 부러워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우리들 자신의 믿음을 극화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 것인가?
저자는 또한 오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다 진동하고 파멸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 음성 듣는 것을 거절하면 진동할 것이기에 성령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본서를 읽는 독자라면 쉽게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의 설교들은 너무나 쉽고 귀에 즐거움을 가미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차분히 2번에 걸쳐서 읽게 될 때에 저자의 의도와 복음의 진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 권성준
저자 존 넬슨 다비(1800-1881)
근세의 터툴리안으로 일컫어지는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계로 1800년 11월 18일 리프 캐슬, 킹스 타운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거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아일랜드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잠시 봉직하다가 1825년에 영국 국교회의 부제로, 그 이듬해에는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다비는 그리스도의 간증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유럽 전역에 배포하였고, 1837년에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1840년에는 불어를 사용하는 여러 교회가 형성되었다.
만년에는 유럽 전역은 물론 캐나다, 미국, 서인도제도, 뉴질랜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영감이 넘치는 찬송을 수없이 작사하였다. 그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위해 드려진 삶이었다. 1882년 4월 29일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안시기과 상급을 주실 주님께로 갔다.
- 8995781440_1.jpg (0B) (0)
2,659개(88/133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