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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축복으로의 초대
축복의 통로/래리 허커/최예자/프리셉트/[북뉴스]
보이는 세계가 전부일까요?
수년 전 영화 매트릭스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해 관심을 증폭시킨 적이 있습니다. 단연 화제의 중심은 '과연 이 세계가 진짜 존재하는 세계일까',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가상세계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매트릭스가 실감나게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계에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세계는 '보지 않으려는 세계'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선포와 저주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선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두려움과 염려'를 넣어주려는 이 악하고 더러운 영, 내게서 떠날지어다"는 선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작은따옴표로 표시된 부분에 실제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치려는 또는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질병'과 '재정악화', '관계의 어려움' 등을 삽입할 수 있습니다. 저주는 내가 누군가를 비난한다든지 악담을 하고 증오를 퍼부었을 때 내 안에 맺히는 부정적인 열매와 관련이 있습니다. 저주는 또한 가계를 타고 가난의 대물림, 가계력 등 다양한 형태로 흐르기 하기 때문에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선포와 저주풀기는 모두 말의 능력과 연관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행동을 가져오고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행동을 하게 합니다. 말은 화자가 화자 앞에 벌어진 상황을 해석한 결과이자 상황에 대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믿음의 결과입니다. 선포와 저주풀기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베드로전서 2:24)' 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하지만 선포와 저주는 안타깝게도 기독교계에 미신과 유사한 형태로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이단시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합니다. 말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말의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아담에게 주신 권세, 죄악으로 잠시 사단에게 양도된 권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되찾아진 권세에 근거합니다. 말의 능력이 사람에게 없다는 말은 일부분만 맞는 말입니다. 말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습니다. 화자가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을 근거로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말의 능력은 믿음을 기초로 합니다.
한편 저주하기와 풀기는 사극에서 보듯이 극히 비과학적인 행위로 기독교와 양립될 수 없는 요소라는 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단에서든 저서의 형태로든 과거 수십 년 동안 그 둘은 우리 교계의 가르침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최근에서야 오순절운동 계열과 복음주의 계열의 교계가 서로의 장점을 적극 차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점입니다. 그렇다고 양 계열이 전부 화해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조금씩 서로의 차이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인정하기로 했을 뿐입니다. 그 정도의 한계 내에서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연합은 보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여전히 색안경과 오해로 점철된 부분이 해소의 때를 기다리며 잠복해 있습니다. 선포와 저주의 문제도 그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 반영이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원제, '축복을 가로막는 10가지 저주(10 Curses that block the blessing)'를 비켜갔습니다. '축복의 통로'라는 무난한 제목을 택하고, 표지 중앙 아래쪽에 '축복을 가로막는 10가지 저주를 끊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영혼 구원과 치유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육 전부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저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주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주목하지 않습니다. 엄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셨고, 지금도 여전히 그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심리적인 이유로 외면하고 그 문제를 입에 올리기 불편하도록 토양을 조성한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말씀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한다든지 보이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불신앙에 가깝습니다. 더 나아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비이성적인 것이고 당연히 교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용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차이를 다름으로 보는 눈 또한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책, 〈축복의 통로〉는 금기시 되어온 저주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마약 중독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저자는 마약 중독이라는 저주를 단박에 끊어내신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결단코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은혜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대가라는 점을 깊이 깨달은 그에게 저주의 문제는 극히 실제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린 때때로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 또는 자주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모호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문제가 아닌 한 다뤄보려 하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있을 수도 있겠지 하는 선에서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그렇다고 그런 동작이 그 문제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일반적인 경향 속에서 이 책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한 개인에게 임한 실제적인 사건과 그 사건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점이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저주를 연구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저자에 대해 쓴 시드 롯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래리(저자의 이름)는 하나님의 은혜로 약물 중독에서 완전히 치유 받았지만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혀온 불 같은 분노로부터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래리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그에게 내재된 통제불능의 분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불 같은 성질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났다. 일단 발작이 나면 아내에게 끔찍한 욕설과 주먹질을 해댔고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그러다 소동이 지나가고 나면 그는 눈물로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때마다 다시는 성질을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며칠 못 가 결심은 허물어졌다. 더 이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문득 그는 분노 속에 폭력을 휘두르는 꼴이 자기 조상들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싫어하는 그 습성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래리는 이유 없는 분노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래리는 성경을 펼쳐서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 가문의 저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통제가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사탄이 심은 쓴 뿌리입니다. 저자가 예로 든 부정적인 습관, 악담, 분노, 가난, 증오는 모두 타인이 나에게 한 행위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통제불능입니다. 아무리 제어하려고 해도 통제가 되지 않는 그것들을 심각한 죄로 여기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언 6:16-19) 누군가를 비난하는 자리에서 비난하는 사람과 함께 특정인을 비난한다면 그 비난은 당신에게 돌아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갈라디아서 6:7)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이제 저주의 문제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주와 관련하여 베드로전서 2:24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저자의 행동은 '믿음을 말로 표현'하는 데 있습니다. 입안에서 맴돌아서는 안됩니다. 영혼육이 모두 듣도록, 특히 영이 듣도록 크게 외쳐야 합니다. 거듭난 크리스천은 절대로 사탄에게 붙잡히지 않습니다. '사탄이 당신의 삶을 전적으로 휘두르진 못해도, 부분적인 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문단속을 하지 않은 집에 도둑이 든 예로 사단의 부분적인 영향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거짓말에 동의하지 않는 한 사탄의 기도는 언제나 무위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결단과 사탄의 거짓말에 어느 경우에도 동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떠날 것을 선포할 때 더 이상 어떤 저주도 당신에게 임할 수 없습니다. 저주가 걷힌 당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강같이 이를 것입니다. 뒷표지에 실은 초대의 글이 이 책의 핵심을 짚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허락된 축복을 가로막는 죄악, 분노, 저주의 사슬을 끊고 승리와 환희의 축제를 만끽하십시오!"
글 김정완
보이는 세계가 전부일까요?
수년 전 영화 매트릭스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해 관심을 증폭시킨 적이 있습니다. 단연 화제의 중심은 '과연 이 세계가 진짜 존재하는 세계일까',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가상세계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매트릭스가 실감나게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계에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세계는 '보지 않으려는 세계'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선포와 저주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선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두려움과 염려'를 넣어주려는 이 악하고 더러운 영, 내게서 떠날지어다"는 선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작은따옴표로 표시된 부분에 실제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치려는 또는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질병'과 '재정악화', '관계의 어려움' 등을 삽입할 수 있습니다. 저주는 내가 누군가를 비난한다든지 악담을 하고 증오를 퍼부었을 때 내 안에 맺히는 부정적인 열매와 관련이 있습니다. 저주는 또한 가계를 타고 가난의 대물림, 가계력 등 다양한 형태로 흐르기 하기 때문에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선포와 저주풀기는 모두 말의 능력과 연관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행동을 가져오고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행동을 하게 합니다. 말은 화자가 화자 앞에 벌어진 상황을 해석한 결과이자 상황에 대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믿음의 결과입니다. 선포와 저주풀기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베드로전서 2:24)' 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하지만 선포와 저주는 안타깝게도 기독교계에 미신과 유사한 형태로 받아들여져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이단시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합니다. 말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말의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아담에게 주신 권세, 죄악으로 잠시 사단에게 양도된 권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되찾아진 권세에 근거합니다. 말의 능력이 사람에게 없다는 말은 일부분만 맞는 말입니다. 말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습니다. 화자가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을 근거로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말의 능력은 믿음을 기초로 합니다.
한편 저주하기와 풀기는 사극에서 보듯이 극히 비과학적인 행위로 기독교와 양립될 수 없는 요소라는 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단에서든 저서의 형태로든 과거 수십 년 동안 그 둘은 우리 교계의 가르침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최근에서야 오순절운동 계열과 복음주의 계열의 교계가 서로의 장점을 적극 차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점입니다. 그렇다고 양 계열이 전부 화해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조금씩 서로의 차이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인정하기로 했을 뿐입니다. 그 정도의 한계 내에서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연합은 보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여전히 색안경과 오해로 점철된 부분이 해소의 때를 기다리며 잠복해 있습니다. 선포와 저주의 문제도 그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 반영이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원제, '축복을 가로막는 10가지 저주(10 Curses that block the blessing)'를 비켜갔습니다. '축복의 통로'라는 무난한 제목을 택하고, 표지 중앙 아래쪽에 '축복을 가로막는 10가지 저주를 끊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영혼 구원과 치유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육 전부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저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주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주목하지 않습니다. 엄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셨고, 지금도 여전히 그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심리적인 이유로 외면하고 그 문제를 입에 올리기 불편하도록 토양을 조성한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말씀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게 되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한다든지 보이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불신앙에 가깝습니다. 더 나아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비이성적인 것이고 당연히 교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용납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차이를 다름으로 보는 눈 또한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책, 〈축복의 통로〉는 금기시 되어온 저주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마약 중독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저자는 마약 중독이라는 저주를 단박에 끊어내신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결단코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은혜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대가라는 점을 깊이 깨달은 그에게 저주의 문제는 극히 실제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린 때때로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 또는 자주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모호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문제가 아닌 한 다뤄보려 하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있을 수도 있겠지 하는 선에서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그렇다고 그런 동작이 그 문제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일반적인 경향 속에서 이 책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한 개인에게 임한 실제적인 사건과 그 사건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점이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저주를 연구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저자에 대해 쓴 시드 롯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래리(저자의 이름)는 하나님의 은혜로 약물 중독에서 완전히 치유 받았지만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혀온 불 같은 분노로부터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래리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그에게 내재된 통제불능의 분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불 같은 성질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났다. 일단 발작이 나면 아내에게 끔찍한 욕설과 주먹질을 해댔고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그러다 소동이 지나가고 나면 그는 눈물로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때마다 다시는 성질을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며칠 못 가 결심은 허물어졌다. 더 이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문득 그는 분노 속에 폭력을 휘두르는 꼴이 자기 조상들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싫어하는 그 습성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래리는 이유 없는 분노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래리는 성경을 펼쳐서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 가문의 저주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통제가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사탄이 심은 쓴 뿌리입니다. 저자가 예로 든 부정적인 습관, 악담, 분노, 가난, 증오는 모두 타인이 나에게 한 행위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통제불능입니다. 아무리 제어하려고 해도 통제가 되지 않는 그것들을 심각한 죄로 여기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잠언 6:16-19) 누군가를 비난하는 자리에서 비난하는 사람과 함께 특정인을 비난한다면 그 비난은 당신에게 돌아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갈라디아서 6:7)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이제 저주의 문제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주와 관련하여 베드로전서 2:24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저자의 행동은 '믿음을 말로 표현'하는 데 있습니다. 입안에서 맴돌아서는 안됩니다. 영혼육이 모두 듣도록, 특히 영이 듣도록 크게 외쳐야 합니다. 거듭난 크리스천은 절대로 사탄에게 붙잡히지 않습니다. '사탄이 당신의 삶을 전적으로 휘두르진 못해도, 부분적인 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문단속을 하지 않은 집에 도둑이 든 예로 사단의 부분적인 영향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거짓말에 동의하지 않는 한 사탄의 기도는 언제나 무위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결단과 사탄의 거짓말에 어느 경우에도 동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떠날 것을 선포할 때 더 이상 어떤 저주도 당신에게 임할 수 없습니다. 저주가 걷힌 당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강같이 이를 것입니다. 뒷표지에 실은 초대의 글이 이 책의 핵심을 짚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허락된 축복을 가로막는 죄악, 분노, 저주의 사슬을 끊고 승리와 환희의 축제를 만끽하십시오!"
글 김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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