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힙합으로 세상을 변주하는 미스터 탁 선교사
힙합 현상
요즘 힙합은 대중음악이라는 장르를 넘어 문화현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스타일이 젊은 세대들에게 크게 어필하면서 음악에서부터 패션, 댄스는 물론 의식까지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리듬을 타고 속사포처럼 흐르는 랩과 ‘화이바’를 쓰고 운동화 차림에 가벼운 복장으로 랩에 맞춰 마치 곡예 하듯 몸을 다채롭게 움직이는 브레이크 댄스,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발견할 수 없지만 건물 외벽과 교각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자유분방하게 원색의 그림을 그리는 그라피티, 디제이들이 레코드판을 앞뒤로 밀거나 당겨 원곡과 다른 비트를 냄으로써 음을 재구성하는 디제잉 등 힙합의 주종을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는 것도 그와 같은 문화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문화현상이 그렇듯 힙합 또한 소비층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4, 50대는 힙합을 보편적인 음악이라는 범주에서 여전히 주류를 형성하지 못한 채 젊은 세대들이 한때 열광하는 음악의 한 형태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전에 세대가 특정 문화현상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 것과는 분명히 시각적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경계의 빛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탓에 힙합적 장르가 그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는 측면도 분명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폭발적 양상을 오랜 세월 견고하게 자리잡은 특정 영역, 또는 부문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동안 교회 안에서 드럼과 기타를 사용해 찬양하는 것을 세상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라는 이미지에서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경건이라는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찬양곡조만 해도 시종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세상 음악은 비트가 강해서 시끄러운 반면 교회음악은 부드럽게 심중을 울려야 한다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특정 음악적 형태의 수용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찬양곡도 다채롭게 바뀌었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당시로선 경건을 해치는 어떠한 형태의 시도도 교회 내에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힙합에 대한 우리 안의 편견, 내 안의 편견
몸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입어보려 하지 않는 고정적 사고, 통념이 그것입니다. 과거 드럼과 기타가 그 통념의 희생자였다면 지금은 힙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입니다. 이 책 《내가 하나님의 꿈인 것, 그게 중요해》를 쓴 저자 서종현은 힙합 가수로 힙합을 통해 천국을 선포하려던 사역 초기에 수많은 편견에 직면해야 했음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와 삐딱한 자세,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공격적인 표정 등 그가 보인 외형적 모습이 선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사역의 도구로서 힙합을 대하는 부정적인 시각과 상승작용을 일으켰던 때문일 것입니다.
내용을 충분히 읽지 않은 독자라면 표지와 책 속에 삽입된 저자의 전신 또는 상반신 사진을 보고 직관적으로 그가 선교와 매칭이 되는지 의문부호를 드러낼 것이라는 데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저 또한 책을 읽는 동안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저자가 지난 온 삶을 회상하듯 관조적으로 기술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날것 그대로 격정적으로 토해낸 탓에 몰입을 방해받은 측면도 있지만 불편함의 대부분은 제 안에 있는 편견, 곧 힙합이 어떤 형식을 갖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 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초반에 그가 부르심에 합당한 사역을 충실히 이뤄낼 것을 바라고 선포하는 한편에서 ‘과연?’ 이라는 의문부호를 지우지 못했습니다. 그를 직접 대면하거나 그가 인도하는 집회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펼치고 있는 사역이 생소하다는 점에서 제가 불편함을 떨쳐내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3개월 전쯤 국민일보 선임기자가 《더 있다》를 냈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현대 기독교계에 족적을 남기고 있는 크리스천 선교사, 목사, 장로를 인터뷰하며 느낀 점을 책 제목을 빌려 솔직하게 드러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경험해 보지 못한 형식이라고 배척할 일이 아니라 그 부분에서 누군가가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면, 미처 알지 못한 무언가가 ‘더 있다’”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소한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익숙지 않을 뿐입니다. 오케스트라가 서로 다양한 악기를 갖고 연주하지만 그 악기들이 곡을 표현하는 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저자가 전례 없는 악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 악기가 천국 복음이라는 화음을 내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열린 사고가 더없이 필요합니다.
그에겐 '새로운 것'이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 안의 불편은 부담감으로 바뀌었습니다. 내 안의 편견을 거둬내자 그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힙합을 통해 천국복음을 어떻게 변주하고 그 복음이 어떤 영향력을 미칠지에 대한 기대가 그가 끊임없이 편견에 도전해 왔듯이 제 안의 편견이 크게 깨질 것에 대한 기대, 곧 거룩한 부담감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 책에 대한 몰입도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달리 보면 우린 안에 자리 잡은 편견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시고 당신의 계획을 이뤄나가시는 과정에서 그 사람들의 성징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누구도 광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을 모두 담고 있다는 오만을 부릴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부터 ‘더 있다’는 겸손한 태도가 파생합니다. 분명 저자에게는 우리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무엇이 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가 순종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망가질 수 없는 암울했던 과거사를 그가 남김없이 고백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듯 그의 과거사는 깊이 빨려 들어간 수렁이었습니다. 더 나빠질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오롯이 빛을 발한 것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가 그분이 자신을 절망적 수렁에서 건져냈다는 고백을 책의 첫 장에서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또한 그와 같이 희망을 떠올리는 것조차 사치가 되는 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음을 힙합에 담아 몸으로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버려진 땅을 한사코 고집하는 이유
과거 그는 다혈질적 기질에서 오는 공격적 성향과 정서적 불안상태를 제어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싸움판으로 내몰았으며, 급기야 단체생활 부적응자라는 판정을 받고 훈련소 퇴소 명령을 받은 뒤 정신병동에 갇히는 인간 말종의 삶을 강요받았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삶은 강한 부정과 거부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다 불현듯 삶의 종착역에 이르러 한없이 피폐해진 자신을 힘없이 바라보는 것이 그의 인생이 전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줄기 거부할 수 없는 빛으로 다가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그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 돌아 버리겠다”고 외칠 때 그 외침은 여느 사람의 그것과 같이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특히 청소년 시절 주먹을 휘두르며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살았던 자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장면과 토악질로 하루를 마감하는 유흥가를 부끄럼 없이 드나들며 힙합복음을 전하는 모습에서 독자는 그가 지향하는 곳이 어느 곳에 닿아있는지 명료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버려진 이들이 늘어진 어깨를 추스르며 배회하는 거리입니다. 그런 거리는 대부분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둡고 음습해서 언제든 폭력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선 거둘 수 있는 열매도 많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의식 때문입니다.
“나도 버려진 땅에서 쓰러진 상태로 예수를 만났다. 버려진 땅, 사람들이 사탄의 땅이라고 분류해 놓은 환락의 거리, 그곳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주님과 나는 함께 있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그곳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 이 책의 모퉁이와 그의 글에서 연상되는 거리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 또한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교훈과 삶은 그럴듯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거친 땅과 바람 이는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부르심을 받은 이유와 같은 궤적을 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책을 읽으며 글보다 그를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함께 삶을 나누고 기도하고 싶어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읽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는 그가 사역지에서 놀랍게 사용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