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은사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논리는 무엇인가
나는 개혁주의 신학을 배우고 목사가 된 사람이다. 신앙을 갖게 된 초기부터 성경읽기를 좋아했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만 믿으려고 애써온 보수적인 신앙의 소유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기회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체험해 본 신앙인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는 진리와 체험에 있어 균형잡힌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시작된 방언 논쟁은 나로 하여금 어느 한 편이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 방언 논쟁의 발단이 된 저서의 저자가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는 존 맥아더 목사님이 저술한 이 책이 발간되었다.
방언 논쟁의 발단이 된 저서는 읽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읽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책만큼은 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고, 확인해 보고, 정리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여전히 나는 저자의 모든 의견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 읽을 가치가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저자에게서 참으로 배울 것 또한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고 깨닫고 한편으로는 반발했던 부분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다른이들과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하는 내용들을 옮겨 보았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인용하고 있는 베니힌과 폴 크라우치의 천박한 발언은 그들의 미성숙함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자와 같이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화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공격은 서로가 삼가 주어야 마땅하리라 보여 진다.
저자가 비판하는 은사주의적 극단주의에는 나 역시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건전한 은사주의도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저자 역시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건전한 은사주의자들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는다. 결국 그는 ‘은사주의자들은 모두 잘못된 사람들이다’라는 입장에 서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책의 맨 뒷부분에서 척 스미스 목사와 존 굿윈 목사를 건전한 은사주의자들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글이 말씀신앙운동을 비판하는 자신의 입장에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저자는 그들 역시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지 않다. 이것은 그가 극단적인 반은사주의적 입장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극단적인 반은사주의적 입장에서 체험을 중시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보여준다. 분명 체험보다는 진리가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체험은 진리에 의해 판단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체험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체험없는 신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무려 3년간이나 예수님께 직접 진리에 대해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직접 보기 전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진리를 인정하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요20:29에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었던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체험적으로 경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체험은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히 무시해도 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극단주의적인 은사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체험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장에서 저자는 케네스 코플랜드, 펄시 콜렛, 로버트 리어던과 같이 성경과는 다른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보여 준다. 이러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저자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기술한 내용 중에는 거부감을 주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희생 제사의 주된 특징은 짐승의 죽음이지 불타는 살코기의 냄새가 아니었다.”는 저자의 말은 화제라는 제사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씀(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모두 18번이나 기록되어 있는)을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여인의 글을 인용하면서, “성경과 온갖 책은 다 치우고 공부도 그만 하세요.”라는 그 여인의 말을 “그녀에게는 사적인 ‘계시’와 개인적인 느낌이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영원한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단정지어 말하고 있는 부분 역시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여인이 저자가 은사에 대해 극단적인 견해를 갖게 된 이유는 저자가 기도는 하지 않고 오직 성경 연구만 하였기 때문이라고 본 듯하다. 그래서 이 여인은 저자를 향해 제발 기도 좀 열심히 해 보라고 권면한 것이라 느껴졌다. 성경 연구는 충분히 했으니 그것을 놓고 좀 기도 좀 해 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 여인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오해와 자기 보호적 반발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저자가 성경적 진리에 대한 관점을 역사적 객관적 관점과 개인적 주관적 관점으로 나누어 역사적 객관적 관점만 옳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라고 보여진다. 두 견해는 모두 다 중요하고 유용하다. 바울이 나름대로의 역사적 객관적 관점에 서 있었을 때,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게 된 이유는 오직 체험 때문이다. 진리 이해와 체험은 교차적으로 반복되면서 우리를 더욱 깊은 진리로 인도한다. 저자의 이분법적인 태도는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계시된 진리가 체험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체험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저자의 태도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실수도 저지르고 있다. 저자는 빌립이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 대한 본문을 해석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었던 것을 마치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과 같이 진리 이해에 대한 영역으로만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배웠던 그 자체가 체험이다. 마음이 뜨거워 진 것만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함께 길을 겉고 식사를 한 것까지도 체험이다. 어떻게 그것을 체험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접하다 보면, 저자는 ‘성경은 곧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만약 그것으로 족했다면, 모세가 왜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했겠는가? 자신이 받은 십계명 돌판만 들여다 보면서 즐거워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필요가 있다. 말씀은 그 통로일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바울 사도가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했던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사주의자라고 해서 항상 표적과 기사를 복음전하는 것보다 앞세우지는 않는다. 표적과 기사를 복음전도보다 앞세우는 것은 오직 극단주의적 은사주의자들 뿐이다. 바울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할 때에는 표적과 기사가 계속해서 나탔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바울 사도는 성령의 나타남(고전12장에서 은사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저자는 성경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오직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보고 있는 듯하다.
또 저자는 모든 은사주의자들을 비지성적인 사람으로 보고 있다. 동시에 존 스토트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은 열심이지만 우둔하다.”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가 지성적이라고 보는 존 스토트는 어떤 사람인가? 영혼멸절설의 가능성에 자신의 지성을 열어 놓고 있는 이가 아닌가? 도대체 그가 말하는 지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또한 신학이 개인적 체험에서 생겨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의 신학이 다메섹에서의 체험에서 시작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성경은 선지자들의 사도들이 체험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체험을 기록한 사도행전 같은 본문에서는 교리를 유추해 내면 안 되고, 오직 교리를 논하고 있는 바울 서신 같은 데에서만 교리를 유추해 내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과연 정당한가?
저자가 마가복음 16장 17-18절을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약속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되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약속은 모두 다 사도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도 되며, 또한 그렇게만 보아야 한다고 말해도 문제가 없다. 그렇게 본다면 전도 명령 역시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거의 모두가 전도 명령과 함께 주어진 명령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 역시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또는 예수님의 승천 현장에 있었던 그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저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은 서서히, 또는 불완전하게 기적을 행한 일이 전혀 없다.” 그러나 예수님도 한 눈먼 사람을 고치실 때, 몇 차례에 걸쳐서 고치신 적이 있다(막8:22-25).
저자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제외한 다른 사도는 교회의 사도일 뿐 예수님의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교회의 사도’에 불과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어떻게 감히 ‘예수님의 사도’인 베드로를 제치고 초대교회의 대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 에드워드 머피의 체험에 대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학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평가한 것은 저자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보여진다. 에드워드 머피가 자신의 저서 영적전쟁 핸드북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거듭난 신앙인이었던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다가 회복되었던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거듭난 신앙인도 귀신의 역사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주장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신앙인은 귀신 들릴 수 없다는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인은 귀신 들릴 수 없다는 말이 성경에는 결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베드로 사도는 사단이 택함받은 자들까지도 실족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공격이 어떤 어떤 식으로 들어오는지 성경은 그 모든 것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누가 올바른 진리 위에 서 있는 것일까? (나 역시 거듭난 신앙인으로 알고 있던 선배가 귀신이 들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체험을 통해 나는 오히려 성경에서 결코 말하고 있지 않는 거짓된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저자는 은사주의적 교회를 비난하기 위해 고린도교회를 지나치게 비하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고린도교회를 부패한 교회(p.254), 그리고 악령의 역사에 사로잡힌 교회(p.264)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해석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공동체라 부르고 있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는 음행을 하는 자도 있었고, 분쟁과 무질서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신령한 은사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게서 주어진 것이라 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가 은사주의자들의 차후세례 교리에 대해 비판한 부분은 어느 정도 동의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령은 믿는 순간에 받기에 따로 성령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에서 성령을 간절히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도대체 무엇에 대해 말씀하신 것인가? 만약 이 본문을 개인 구원 이후에 성령을 구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면 가능한 해석은 오직 예수님 승천 후에 제자들이 성령의 강림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성령을 달라고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있게 주장하는가(p.280)? 그렇다면 저자는 과연 누가복음 11장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에 대해 메릴 엉거라는 학자의 주장을 인용한다. 그런데 메릴 엉거의 주장에는 '왜'라는 근거가 없다. 그냥 아무런 근거없이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라고 말한다. 저자가 메릴 엉거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우리도 그의 주장을 신뢰해야 한다는 증거는 어디 있는가? 도대체 저자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경적 근거'가 결여되어 있는 글을 왜 인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메릴 엉거는 초기에는 은사중단론을, 그리고 후기에는 은사지속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자신과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의 초기 입장에 근거한 본문을 자신의 글에 대한 근거로 인용한 것은 적합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보여진다.
저자는 성령세례를 부정한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된 모든 본문은 그들이 성령 받을 때 그 사실을 알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누군가가 성령을 받으면, 그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성령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분명한 주장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믿을 때 성령받는 것이 성경이 주장하는 바라면, 자신이 성령 받았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부분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표적과 기사가 그것을 행한 사람들이 사도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표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빌립 집사나 스데반 집사도 사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믿기로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여전히 자신의 일꾼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나누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다. 저자는 표적과 기사의 의미에 대해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방언에 대한 비판에서 바울이 천사의 말이라고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견해는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 오늘날의 방언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초대 교회로서 중단된 진짜 방언이 바울 사도가 말하는 '사람의 방언'이고, 오늘날의 방언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천사의 말'은 아닐까?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한데, 그는 그 근거를 말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또한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가짜 방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p.369).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가짜라 말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단지 질서 있게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을 뿐이다. 또 저자는 바울 사도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고 말한 것을 “방언은 또한 자기 자신을 세우는 데 악용되기 십상이었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바울 사도가 과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악하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그가 바로 뒤이어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했을까. 잘못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게도 은사주의 운동은 기독교를 두 등급의 신자, 즉 성령에 취한 신자와 그렇지 못한 신자로 분열시켰다. 성령에 취한 신자는 자신이 그렇지 못한 신자보다 최소한 조금이라도 더 영적이라고 믿는다. 그 결과 좋든 싫든 교회에는 분열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반은사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기독교를 두 등급의 신자, 즉 성경만을 믿음의 근거로 하는 고상하고 지성적인 신자와, 체험을 성경보다 중시하는 열심은 있으나 미련한 신자로 분열시킨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극단주의적 은사주의자들만큼이나 극단적으로 은사주의자들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저자가 “참된 영성의 기본적인 특징은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뒤이어서 “그러나 많은 은사주의자는 성령 세례만 받으면 영성은 저절로 얻어진다고 주장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극단주의적 은사주의자들 뿐이며,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건전한 은사주의자들은 결코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저자는 뒤로 가면서 “분별있는 은사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분별있는 은사주의자들을 아주 극소수인 것처럼 보고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은사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심각한 성적 타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경각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에미이 샘플 맥퍼슨, 캐서린 쿨만 같은 사람들이 저지른 일들(유부남을 이혼시키고 결혼한 것)은 은사주의 운동을 하는 이들이 때로는 악령의 인도를 하나님의 인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음을 가르쳐 준다. 또한 현대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인 파럼이라는 사람이나, 밥 존스 같은 사람이 저지른 성적 타락의 문제들은 은사주의 운동을 하는 이들이 때로는 악령의 역사에 사로잡혀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참된 영성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지금까지 저자의 글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본 것만 기록한 것을 보면서 이 책은 볼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속단이다.
저자가 교회가 성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게 된 과정에 대해 소개해 준 내용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에 대해 소개해 준 내용은 참으로 유용하면서도 가치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극단주의적인 은사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에 대해 소개해 준 것 역시 유익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저자의 글을 보면서 앞으로 은사주의자들의 책을 읽을 때에는 저자를 가려가며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말씀 신앙 운동이 지나친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있음과 또한 이단 집단인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주장을 심각한 수준까지 받아들이고 있음을 가르쳐 준 것 역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좋은 책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책이 될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반은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은사주의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열등감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는 아주 귀중한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나쁜 책이다. 은사주의 교리 자체를 분열적이라고 비난하는 저자는 건전한 은사주의자들의 설 자리 역시 남겨 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자의 입장에서 서 있는 나로서도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을 통해 극단적인 은사주의의 문제점과 함께, 극단적인 반은사주의의 문제점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진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결코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책이 아니다. 저자의 성경 해석은 상당히 편향적이다.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도 비판하고 있는 바와 별반 차이없는,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어떤 주제이든 성경을 근거로 깊이 숙고해서 결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몇 안 되는 저자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들은 어떤 주장이든지 깊이 있게 고민해 볼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은사중단론자이든 은사지속론자이든 꼭 읽어 보아야 할만한 책이라 생각된다.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