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엉뚱한 선택을 하면 어떡해?', 고민스러운 당신을 위한 지침서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우린 그들을 '햄릿 증후군'에 빠졌다고 말한다. 여기에 자가 테스트가 있다. 해당하는 항목이 5개 이상이면 햄릿 증후군을 앓고 있을 확률이 높단다. 하나, 내가 선택한 결과에 대한 스트레스가 크다. 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글쎄", "아마도", "잘 모르겠어"라는 모호한 말을 자주 한다. 셋, 혼자서 쇼핑하는 일이 어렵다. 넷, 식사 메뉴 선택이 어려워 남의 선택을 따른다. 다섯,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매번 구입 결정을 망설인다. 여섯, 영화나 책을 고를 때 현재 개봉 1위나 베스트셀러를 고른다. 일곱, 너무 다양한 종류의 물건이 있으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다.
'엉뚱한 선택을 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서 시작된 햄릿 증후군은 고심 끝에 어느 한쪽을 고른 뒤에도 '그런데 잘 한 선택일까?' '혹시 샛길로 빠진 거 아냐?'라는 등등의 강박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사회가 보다 고도화할수록 햄릿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날 전망이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크리스천이라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강박적으로 최고의 것을 선택해야 하는 부담감에 사로잡힌 크리스천의 경우 같은 증상 외에 한가지 고민을 더 얹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양상은 훨씬 복잡하다. '과연 내 선택에 하나님의 뜻이 담겼나?" 예로 든 자가 테스트에서 5개 이상의 항목이 일치하는데 하나님의 뜻마저 가물거린다고 실망하진 말자. 해결책은 있게 마련이다.
햄릿 증후군을 앓고 있거나 유사 증상을 호소하는 크리스천에게 맞춤한 지침서가 나왔다. 존 오트버그의 《선택훈련》이 그 주인공이다. 오트버그는 '열린 문'의 의미를 통해 결정장애의 실체와 극복방안을 두루 성찰한다. 그렇다고 결정장애에 한정해 말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선택의 문제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이 땅의 크리스천 모두에게 도움이 될 발판 하나를 놓았다고 보는 편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도움닿기는 독자의 몫이다. 책은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뜀틀운동을 해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도약대의 역할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도약대를 잘만 활용하면 경기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높이 쌓은 뜀틀을 보고 겁을 집어 먹으면 도약대는 쓸모가 없게 된다. 첫 번째 장은 마치 겁을 집어 먹은 채 도약대 앞에서 멈춰선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유를 진단하고 용기를 북돋는 것이 이 장, <짧은 인생, 하루에도 숱한 갈림길 앞에 선다>의 목적이다. 저자는 성경 속에서 드라마틱한 인물 둘을 끌어왔다. 데라와 아브라함이다. 둘 모두 선수로 당당하게 나섰다. 하지만 하나는 한창 도약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반면 다른 하나는 중간에서 멈춰 섰다. 이 둘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데라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생에 걸쳐 쌓아올린 기반을 모두 버렸다. 그들이 거주했던 우르는 세계 곳곳의 물산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으로 한마디로 우르는 당대 최고의 도시였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 정도가 되시겠다. 그런 도시를 두고 떠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데라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 하지만 보기에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바른 쪽을 골랐다. 데라는 하란에서 멈춰 섰다. 한번의 선택도 힘들지만 선택이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서 복잡한 심경이 읽혀진다. 오트버그는 출발선 앞에 서는 결정, 곧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열린 문이 장래를 보장하거나 항상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린 문'은 단순히 그럴 거라는 가능성만 알려줄 뿐이다.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면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한 시작은 꿈도 꿀 수 없다. 일단 문지방 안으로 발을 들여야 한다. 데라와 아브라함 모두 발을 들여놓는 데 성공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에 한 발을 내디뎠을 때 물을 가르셨다.
그렇다고 시작이 좋으면 다 좋은 걸까? 아니다. 데라가 그 점을 잘 웅변해 준다. 데라와 마찬가지로 '잘 한 선택일까?'라는 고민에 빠지면 잘 뛰다가도 멈춰서기 쉽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 문'은 믿음의 문이다.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문지방을 넘었다면 그 뒤로도 줄곧 말씀을 믿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믿음으로 시작한 일을 의심으로 끝낼 순 없지 않은가. 이 장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것이다. 당신이 어떤 문이든 그 앞에 서 있다면 일단 내딛어라! 하나님이 일일이 무엇이 좋고 나쁘고 얘기하시지 않지만 기필코 당신의 결정을 도우실 것이다! 도중에 멈춰서는 건 힘겹게 쌓아올린 돌을 한순간에 허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어리석다!
첫 번째 장이 출발선에 오른 크리스천에게 결승선에 대한 기대와 완주에 필요한 용기를 북돋워주는 마중물이라면 두 번째 장, <하나하나 결정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복이다>는 기대와 용기에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단서이자 지불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를 밝히기에 앞서 오트버그는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최우선 고려 사항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고 지적한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자 엔돌의 한 무당을 찾아간 사울의 예에 빗대 오트버그가 언급한 한 남자의 이야기는 오늘날 미신이 어떤 형태로 크리스천 안에 들어와 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인공 남자는 한때 죽도록 사랑한 여자를 하나님이 정해준 짝이라고 확신했다. 어느 날 그는 한 라디오에서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듣자 다른 방송국에서도 같은 노래가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정말로 다른 방송국에서 그 노래를 틀어 주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완전한 착각이었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잘 살고 있다. 미신은 그렇듯 주변 가까운 곳에 마치 신앙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 모양으로 존재한다. 혹하지 않으려면 어떤 선택이 옳은지 묻기 전에 크리스천들이 갖춰야 할 소양이 있다. 바로 지혜를 구하는 자세다.
지혜에서 바른 결정이 난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그분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 이 단순한 진리를 자신의 뜻으로 가리려 할 때 위와 같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지혜는 나의 작음과 주의 크심을 아는 것이다. 거기서 선택이 날개를 달고 바른 지점을 향한다. 이후의 풍향계 또한 방향을 잃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방법을 어떻게든 알아내서 선택의 부담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결단코 우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르를 떠났다 해도 하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 명심하자.
마지막 장은 열린 문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다. 열린 문은 <'정답을 찾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냐'의 문제>로 기꺼이 수렴된다. 열린 문은 그 반대편을 상정한다. 또한 반대편은 함의를 지닌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그러자면 동행이 필요하다. 그것도 제대로 된 동행 말이다. "내가 내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요한계시록 3:7)"라고 하신 하나님을 동행으로 삼는 일만큼 안전한 것은 없다. 열린 문을 내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들어갈 바로 그 문의 보증수표다. 여정은 말할 것도 없다.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문을 고를 책임 역시 우리에게 달렸다. 어느 때보다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때론 열린 문의 반대편을 향해 가는 동안 닫힌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다. 내 잘못으로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자책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돌아서거나 멈춰 서선 안 된다. 믿음으로 문지방을 넘어섰듯이 믿음으로 그 너머도 바라보아야 한다. 당신의 발자취가 사라졌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줄곧 당신을 업고 걸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성장할 영역이 있을 잠깐의 때를 제외하곤 결코 당신을 홀로 두시지 않는다. 우르를 떠난 작은 아브라함들이 바울의 고백으로 힘차게 도약하길 바란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