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역사비평적 성경 해석의 세계로 초대
이 책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역사비평가들의 역사비평에 대해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일이 결코 복음주의자들의 기독교 신앙고백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역사비평적 방법을 진지하게 다루도록 격려하는 데 있다.
역사비평가들은 누구인가? 역사비평가들은 지난 300년 동안, 창세기 2-3장의 역사성을 부인하며,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며(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함으로써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된다는 원죄론을 부인하는 주장, 74-82p),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며(신명기는 모세 사후 수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저술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모세 언약의 계시를 지속적으로 후대에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위작이라는 주장, 144-150p), 출애굽 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하며(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민족적 자기정체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신화적, 전설적, 비역사적 민간전승들을 통합한 후대의 문화적 창작물로 보는 주장, 115p), 역사적 인간으로서 예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신성을 부인하는 일을 해왔으며,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의 다수 저자 저작설, 요한복음의 사도 요한의 저작설 부인(요한복음의 저자를 그저 아무개<John Doe>, 또는 장로 요한, 또는 나사로라는 주장, 235p), 바울의 후기 서신서의 사도 바울 저작설 부인(모든 목회 서신이 위작이며 1세기 말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발생한 권위의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바울신학의 개정판을 담은 선집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 249p) 등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모세오경, 이사야, 요한복음, 바울 서신 등이 위작이며, 이렇게 정경에 위작이나 위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들을 허무는 것은 아니며(251p), “예수가 물위를 걷는 기사나 폭풍을 잠잠케 하신 기사가 부활절 이후에의 조작이라고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예수가 온전히 하나님이며,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다”(270p)며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주관적 환상에 의해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예수를 보았다고 믿었을 뿐이다(281p)라는 부활을 부인하는 비평에 대해선, 단호하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을 부인하는 견해에 대해 정통 기독교라는 우산을 제공함으로써 그런 견해를 이단이라는 고발로부터 보호해줄 수는 없다.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국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이다.…예수의 신성이 단지 신화적 경건의 표현일 뿐이라면 속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힘을 잃고 마는데, 왜냐하면 예수가 부활한 적도 없고 하나님도 아니라면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셨다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286-287p)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역사비평가들의 비평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자들이 대답해야 하는 분명한 명제들이 있다. 역사비평가들은 “신명기 내에서 모세가 3인칭으로 제시되고”(144p) 있는 점, “마태와 누가가 예수의 수태와 유아기에 대해 서로 상당히 다른 이야기들을 제시한다”(274p)는 점,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묘사가 세부 사항에서 서로 차이를 보인다”(327p)는 점에 대해서 비평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자들은 신실한 비평과 비평적 신앙을 배양함으로써 이에 대한 복음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한계는 있다. 그렇지만 “성경의 역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수많은 아시리아 명문들, 여리고 발굴, 우주의 연대에 관한 근대의 천체물리학 이론”(38p)이 아직 존재하지 않은 현재적 상황에서, 성경이 묘사하는 사건들은 실제 시공간의 역사 안에서 발생하지 않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역사비평가들의 주장에 대해서, 복음주의 성서학자들은 그저 침묵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분명한 답변을 준비해야 될 것이다.
저자는 확고하다. 역사비평을 수행하되 그리스도인으로서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복음주의자들은 비평적 신앙을 통해서 역사비평과 전통적 논제들의 재진술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 역사비평적 판단에 신실하게 참여하고 그 판단을 신학적으로 성찰하자(336-337p)는 저자의 외침에 독자는 어떻게 공명하고 반응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