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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무개의 관점으로 성경 낯설게 읽기
인문학은 성경을 어떻게 만나는가?/박양규 /샘솟는기쁨/정현욱 편집인
성경은 항상 새롭다. 성경을 50독을 넘게 했지만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제목을 보자 이젠 식상해져 버린 성경과 인문학의 만남이려니 했다. 물론 주제는 식상하지만 보통 어려운 주제가 아니다. 그러니 유의하여 읽어야 한다. 어디선가 들은 유명한 소설과 성경의 스토리를 적절히 짜깁기해 놓은 듯한 책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수고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롭지 않음은 어쩔 수 없다. 당연히 이 책도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시작은 이렇게 미약했다. 나중은 어땠을까? 감히 창대했다고 표현하면 과할까? 나에게는 충분히 창대했다. 뜻밖의 선물처럼 다가왔다.
낯익은 이름이라 저자 검색을 시도했다. 예상은 빚나가지 않았다. <유럽비전트립>의 저자이자, <청소년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저술한 이였다. 예책에서 출간된 <중세 교회의 뒷골목 풍경>까지 출간한 저력 있는 저자였다. 어쩐지 글이 유려하다 했더니. 먼저 저자가 정의하는 인문학을 들어 보자.
“우리가 지향하는 인문학이란 고립되고 단절된 특권층의 문화가 아니라 인문학적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말한다.”(27쪽)
즉 밀레의 만종을 감사하며 ‘1856년’ ‘바르비종’ ‘퐁텐블로’ ‘미국인 구매자’ ‘삼종기도’가 전제하는 살롱 문화식이 아니라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하고, 속옷조차 변변하게 입을 형편이 되지 못했던 절박한 형편의 밀레의 심정을 엿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거대담론이 아닌 ‘아무개’에 관한 것이다. 종종 이름도 없고, 자세한 설명도 없이 그저 익명의 등장인물처럼 잠깐 출연하고 사라진 무명배우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설교 속에 등장하는 성경 인물들은 영웅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사소한 것에 분노하고, 작은 것에 실망하고, 막막한 내일을 걱정한다.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 에녹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 동행한 것 뿐’(62쪽)이었던 업적 없는 에녹이다. 텍스트를 소유하나 콘텍스트를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영웅들은 현실감이 현저히 떨어진다.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 ‘난 아브라함이 아니야’로 종결되는 깊은 괴리감이다. 저자는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지만 그들에게 나타난 현신을 축복과 번영이 아닌 가난과 고통’(89쪽)이었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라와 롯의 관점에서’(94쪽) 바라보면 어떨까?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거주민들을 진멸(학살)했다.”(130쪽) 섬뜩하지 않는가. 영웅의 관점으로 읽으면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도식이다. 이처럼 해석되지 않는 텍스트, 즉 콘텍스트의 관점으로 재해석되지 않을 때 성경의 영웅들은 비현실적 존재가 되고, ‘약자들을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선전’(131쪽)으로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 저자는 끊임없이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서 ‘해석’ ‘고민’ ‘판단’을 요구한다. 즉 ‘기록된 텍스트의 정신으로 콘텍스트를 살아가라’(135쪽)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수년 전에 어떤 분과 대화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직신학적 교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해석할 없는 삶의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러나 소설은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명징한 답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해석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답은 명징한 이해보다 공감으로 충분하기도 하고, 세상에 아픈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답이 되기도 한다. 인문학으로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아닐까? 저자는 미술과 소설, 조각과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성경을 아는데 촉매제로 사용한다. 읽다보니 어느새 자정이다. 성경 낯설게 읽기는 언제나 환영이다. 기존의 성경 읽기 방식을 탈피하여 ‘소자’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성경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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