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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순교자의 피 위에 꽃피운 신앙
일사각오(순교자전기3권)/김요나/주성/[김재윤]
순교자들의 피 위에 교회는 세워진다는 말이 있다. 영적 침체 가운데 허덕이고 있던 나의 신앙에 주기철 목사님의 전기는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갈한 영혼에 생명수가 되었다.
주기철 목사님... 이름으로만 듣던 그 위대한 목사님을 책으로 만나면서 나의 영혼은 함께 웃으며 또 함께 울며 감격했다. 주 목사님의 위대함은 비단 목사님께서 순교하셨다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목사님의 신앙과 인격과 삶 자체가 위대한 간증이요, 시대의 사표요, 신앙의 모범이었던 것이다.
주 목사님께서는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았고 또한 죽으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목사님의 생애가 또한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발자취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 목사님은 그의 목회 사역에서 교회의 3대 표지를 그대로 실천하신 분이셨다. 주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본 사람들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긴장과 감동과 여운을 주는 생명력이 넘치는 설교였다고 칭찬하였다. 설교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상의는 언제나 땀으로 흠뻑 젖었다고 한다.
주 목사님의 부임 첫 성례식에서 내세의 심판에 대한 제목으로 설교한 것을 보면 목사님께서 얼마만큼 의와 불의, 선과 악에 대한 성별된 생활에 철저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주 목사님은 7계에 대한 출교, 불신자 결혼에 대한 1년 간의 책벌, 이 경우 공중기도를 인도하지 못하게 하는 등, 법에 따라 책벌하고 또는 해벌한 사건이 많이 있었다.
초량 교회에서 주 목사님은 보리고개 같은 춘궁기에는 아예 사찰 집에다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 교회로 찾아오는 어려운 성도들에게 공궤케 했다 한다.
주 목사님의 목회를 살펴보면서 진정한 목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나도 사역을 하면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겪었는데, 나의 고난과 시련은 주 목사님의 그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 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구덕산 기도처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다가 내려올라치면 이때 그의 옷은 아침 이슬에 젖어 마치 비라도 맞은 듯 했다고 한다. 산에 가지 않을 땐 새벽에 예배당 강단 위에 엎드려 기도함이 상례였다고 한다.
목사님의 기도의 모습들을 읽으면서 오래도록 기도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사역하는 길은 오직 기도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목사님의 전기를 읽고 나도 매일 내가 목양하는 아이들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게 되었다.
주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자주 사람이 완전하려면 적어도 네 가지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는 자식의 죽음을 보는 것이요, 둘째는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이며, 셋째는 배고픔을 경험하는 것이며, 넷째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사님은 이 네 가지를 손수 다 경험하셨으며 정말 온전한 사람이 되어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귀감이 되고 계신다.
나는 참으로 부끄럽게도 이 네 가지 중 단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삶 속에서 불어닥칠 고난과 시련을 이제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욥의 고백처럼 나의 삶 속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더욱더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주 목사님은 1935년 12월 19일 평신 사경회에서 그 유명한 일사각오의 설교를 하게 된다. 그것은 요한복음 11장 16절 말씀을 본문으로 한 것으로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의 내용이었다. 주 목사님은 예수님을 위해 사셨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사셨으며,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사셨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오늘날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이 일사각오의 신앙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했다. 그렇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전 15:31).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매일 죽는 삶을 연습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주 목사님의 신앙이 아름다운 것은 고난의 어려움 그 자체를 견딘 것이 아니다. 주 목사님의 신앙의 승리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저 천국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장차 올 영광과 맞바꾸지 않았다는데 있다(롬 8:19).
주 목사님께서 고난 당하신 것을 보면 참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고통을 견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주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고문당하실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한다. 그리고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내셨으리라. 일제는 주 목사님의 몸에 고통을 가할 수는 있어도 그의 순결한 영혼에 흠집을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주 목사님의 생애를 읽으면서 참으로 사람에게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찰나적인 세상을 위해 사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이 또 있을까? 영원을 지척에 두고 영원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을 위해 현재를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주 목사님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시며 사셨고, 그리하여 현실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실 수 있었다.
주 목사님의 생애를 바라보면서 성도의 삶에 있어서 시련과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셨듯이 우리 또한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는 좁고 협착한 길보다는 쉽고 편한 길만을 찾으며 살았던가? 이 책을 읽으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며(눅 13:24),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는 삶을 살아야겠다(눅 9:23)고 다짐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같이 형편없고 구제불능의 죄인을 위하여 그분께서 오셨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복음은 놀랍고 기이한 소식이다. 또한 그 한량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무엇을 한들 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이다. 때문에 주 목사님께서도 자신의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 놓으시면서도 늘 자신을 살피신 것이 아닐까?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제 나도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 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이다. 주 목사님은 자신의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늘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사실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또 하나 감탄스러웠던 것은 주 목사님의 신앙도 신앙이었지만, 사별 후 재혼한 오 사모님의 신앙이었다. 남편에게 순교를 강청했던 그녀의 모습은 한 지아비의 아내의 한계를 뛰어넘어 참된 성도의 하나님께 대한 특별한 헌신을 볼 수 있는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주 목사님도, 오정모 사모도 사람인데 왜 죽음이 두렵지 않고, 고통보다는 안식과 평안을 희망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요 3:16)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보답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나 또한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짐승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을 위하여 전심전력하여 아무리 철저하게 드린다 하여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최선이라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에서 주 목사님을 면직하게 된다. 나는 일제의 만행보다도 조국 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1938년 제37회 총회)하고, 해방 후 신사참배자들이 자신들이 교회를 지켰다고 했던 것이 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또한 그 상황에 있었다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그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내린 결론은 주 목사님은 그처럼 올곧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그의 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매일의 경건한 신앙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그러한 엄청난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 넉넉히 순교의 제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도 매일 하루 하루를 더욱더 성실하게 참으로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 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경찰 간수들조차 주 목사님과 오 사모님의 신앙의 절개를 보며 조선에는 주 목사 내외만이 참 신자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참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지탄받고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 이 때에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하여(마 5:1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평가를 받는 일일 것이다. 살아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죽어서 신앙을 간증한 주 목사님의 생애에 말로 참으로 복된 것이며, 지상에서 이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일까싶다.
주 목사님의 후손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 목사님의 순교의 피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심으로 갚으셨던 것이다(신 5:10).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나의 자녀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내가 신앙으로 살지 않는 한 어찌 자녀에게 바르게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본을 자녀에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신앙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 목사님의 설교들을 보면서 참으로 명료하고 간결한 것이 목사님의 생애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교 속에서도 목사님의 생애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삶에서는 왜 이리도 뜨드미진한 모습만 있는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내가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나에게 이 시점에 주 목사님의 전기를 읽게 하신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는다. 내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 진정한 주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간절하신 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껍데기만의 목회자가 아니라, 정말 칼빈처럼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늘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진실한 종이 되기를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에 얼마나 불성실한 삶을 나는 살아왔던가? 참으로 부끄러운 나의 죄된 모습을 회개하고 진정한 신자로 거듭나야겠다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다짐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해 주었고, 기도하게 해 주었으며, 새롭게 결심하게 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교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순교의 신앙으로 오늘을 살라는 것이리라. 주 목사님의 고귀한 삶의 발자취를 밟으면서 그분께서 사랑하셨던 모습처럼, 그분께서 사셨던 모습처럼 나도 닮고 싶었다. 나의 생명보다는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참된 제자가 되고 싶다.
오늘날에 있어서 조국 교회의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밟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태해지는 우리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순교 신앙을 꽃피우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 목사님의 순교의 신앙을 오늘 이 어두운 시대에도 아름답게 꽃피워 죽어 있는 이 가련한 생명에도 새로운 불꽃으로 타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 작은 불씨가 살아나서 어둠을 밝히고 죽어가는 많은 생명들을 살리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한다.
순교자들의 피 위에 교회는 세워진다는 말이 있다. 영적 침체 가운데 허덕이고 있던 나의 신앙에 주기철 목사님의 전기는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갈한 영혼에 생명수가 되었다.
주기철 목사님... 이름으로만 듣던 그 위대한 목사님을 책으로 만나면서 나의 영혼은 함께 웃으며 또 함께 울며 감격했다. 주 목사님의 위대함은 비단 목사님께서 순교하셨다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목사님의 신앙과 인격과 삶 자체가 위대한 간증이요, 시대의 사표요, 신앙의 모범이었던 것이다.
주 목사님께서는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았고 또한 죽으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목사님의 생애가 또한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발자취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 목사님은 그의 목회 사역에서 교회의 3대 표지를 그대로 실천하신 분이셨다. 주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본 사람들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긴장과 감동과 여운을 주는 생명력이 넘치는 설교였다고 칭찬하였다. 설교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상의는 언제나 땀으로 흠뻑 젖었다고 한다.
주 목사님의 부임 첫 성례식에서 내세의 심판에 대한 제목으로 설교한 것을 보면 목사님께서 얼마만큼 의와 불의, 선과 악에 대한 성별된 생활에 철저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주 목사님은 7계에 대한 출교, 불신자 결혼에 대한 1년 간의 책벌, 이 경우 공중기도를 인도하지 못하게 하는 등, 법에 따라 책벌하고 또는 해벌한 사건이 많이 있었다.
초량 교회에서 주 목사님은 보리고개 같은 춘궁기에는 아예 사찰 집에다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 교회로 찾아오는 어려운 성도들에게 공궤케 했다 한다.
주 목사님의 목회를 살펴보면서 진정한 목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나도 사역을 하면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겪었는데, 나의 고난과 시련은 주 목사님의 그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 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구덕산 기도처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다가 내려올라치면 이때 그의 옷은 아침 이슬에 젖어 마치 비라도 맞은 듯 했다고 한다. 산에 가지 않을 땐 새벽에 예배당 강단 위에 엎드려 기도함이 상례였다고 한다.
목사님의 기도의 모습들을 읽으면서 오래도록 기도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사역하는 길은 오직 기도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목사님의 전기를 읽고 나도 매일 내가 목양하는 아이들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게 되었다.
주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자주 사람이 완전하려면 적어도 네 가지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는 자식의 죽음을 보는 것이요, 둘째는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이며, 셋째는 배고픔을 경험하는 것이며, 넷째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사님은 이 네 가지를 손수 다 경험하셨으며 정말 온전한 사람이 되어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귀감이 되고 계신다.
나는 참으로 부끄럽게도 이 네 가지 중 단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삶 속에서 불어닥칠 고난과 시련을 이제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욥의 고백처럼 나의 삶 속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더욱더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주 목사님은 1935년 12월 19일 평신 사경회에서 그 유명한 일사각오의 설교를 하게 된다. 그것은 요한복음 11장 16절 말씀을 본문으로 한 것으로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의 내용이었다. 주 목사님은 예수님을 위해 사셨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사셨으며,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사셨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오늘날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이 일사각오의 신앙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했다. 그렇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전 15:31).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매일 죽는 삶을 연습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주 목사님의 신앙이 아름다운 것은 고난의 어려움 그 자체를 견딘 것이 아니다. 주 목사님의 신앙의 승리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저 천국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장차 올 영광과 맞바꾸지 않았다는데 있다(롬 8:19).
주 목사님께서 고난 당하신 것을 보면 참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러한 고통을 견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주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고문당하실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한다. 그리고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내셨으리라. 일제는 주 목사님의 몸에 고통을 가할 수는 있어도 그의 순결한 영혼에 흠집을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주 목사님의 생애를 읽으면서 참으로 사람에게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찰나적인 세상을 위해 사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이 또 있을까? 영원을 지척에 두고 영원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을 위해 현재를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주 목사님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시며 사셨고, 그리하여 현실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실 수 있었다.
주 목사님의 생애를 바라보면서 성도의 삶에 있어서 시련과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셨듯이 우리 또한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는 좁고 협착한 길보다는 쉽고 편한 길만을 찾으며 살았던가? 이 책을 읽으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며(눅 13:24),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는 삶을 살아야겠다(눅 9:23)고 다짐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같이 형편없고 구제불능의 죄인을 위하여 그분께서 오셨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복음은 놀랍고 기이한 소식이다. 또한 그 한량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무엇을 한들 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이다. 때문에 주 목사님께서도 자신의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 놓으시면서도 늘 자신을 살피신 것이 아닐까?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제 나도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 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이다. 주 목사님은 자신의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늘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사실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또 하나 감탄스러웠던 것은 주 목사님의 신앙도 신앙이었지만, 사별 후 재혼한 오 사모님의 신앙이었다. 남편에게 순교를 강청했던 그녀의 모습은 한 지아비의 아내의 한계를 뛰어넘어 참된 성도의 하나님께 대한 특별한 헌신을 볼 수 있는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주 목사님도, 오정모 사모도 사람인데 왜 죽음이 두렵지 않고, 고통보다는 안식과 평안을 희망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요 3:16)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보답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나 또한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짐승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을 위하여 전심전력하여 아무리 철저하게 드린다 하여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최선이라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1939년 12월 19일 평양노회에서 주 목사님을 면직하게 된다. 나는 일제의 만행보다도 조국 교회가 신사참배를 가결(1938년 제37회 총회)하고, 해방 후 신사참배자들이 자신들이 교회를 지켰다고 했던 것이 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또한 그 상황에 있었다면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그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내린 결론은 주 목사님은 그처럼 올곧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그의 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매일의 경건한 신앙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그러한 엄청난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 넉넉히 순교의 제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도 매일 하루 하루를 더욱더 성실하게 참으로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 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경찰 간수들조차 주 목사님과 오 사모님의 신앙의 절개를 보며 조선에는 주 목사 내외만이 참 신자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참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지탄받고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 이 때에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하여(마 5:1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평가를 받는 일일 것이다. 살아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죽어서 신앙을 간증한 주 목사님의 생애에 말로 참으로 복된 것이며, 지상에서 이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일까싶다.
주 목사님의 후손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 목사님의 순교의 피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심으로 갚으셨던 것이다(신 5:10).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나의 자녀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내가 신앙으로 살지 않는 한 어찌 자녀에게 바르게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본을 자녀에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신앙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 목사님의 설교들을 보면서 참으로 명료하고 간결한 것이 목사님의 생애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교 속에서도 목사님의 생애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삶에서는 왜 이리도 뜨드미진한 모습만 있는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내가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나에게 이 시점에 주 목사님의 전기를 읽게 하신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는다. 내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 진정한 주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간절하신 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껍데기만의 목회자가 아니라, 정말 칼빈처럼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늘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진실한 종이 되기를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에 얼마나 불성실한 삶을 나는 살아왔던가? 참으로 부끄러운 나의 죄된 모습을 회개하고 진정한 신자로 거듭나야겠다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다짐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해 주었고, 기도하게 해 주었으며, 새롭게 결심하게 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교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순교의 신앙으로 오늘을 살라는 것이리라. 주 목사님의 고귀한 삶의 발자취를 밟으면서 그분께서 사랑하셨던 모습처럼, 그분께서 사셨던 모습처럼 나도 닮고 싶었다. 나의 생명보다는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참된 제자가 되고 싶다.
오늘날에 있어서 조국 교회의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밟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태해지는 우리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순교 신앙을 꽃피우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 목사님의 순교의 신앙을 오늘 이 어두운 시대에도 아름답게 꽃피워 죽어 있는 이 가련한 생명에도 새로운 불꽃으로 타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 작은 불씨가 살아나서 어둠을 밝히고 죽어가는 많은 생명들을 살리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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