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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는 기독교의 과학적이면서도 영성적인 근거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영성/다산글방/김성민/[안영혁]
이 책은 프랑스의 심리학자 에르나 반 드 빙껠이 쓴 것을 협성대학교 신학과 김성민 교수가 옮긴 것이다.
이 책을 서평하면서 초두에 이 책의 의미를 강하게 한 번 표현해보고 싶다. 무엇인가를 배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생을 살면서 늘상 득도의 길을 가야한다. 그런데 득도라는 말은 아무 데나 쓰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영원한 길에 대한 통찰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비록 어느 찰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을 향한 창이 된다면 그것은 득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득도의 의미를 가졌다.
경천동지의 대단한 심리학책이 나왔다는 말이 아니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전문화되는 시대도 없을 것인데, 반면에 간학문적 연구는 더 왕성한 것 같다. 저자는 어쨌든 융을 들먹이면서 기독교를 이야기했고, 그것도 영성을 들먹였다. 영성이란 말하자면 기독교의 심층이다. 인간 마음의 보편적 심층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가지고 다시 기독교의 심층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어려운 이야기를 해가는데 융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켰다. 이 책의 가장 깊은 의도를 알고보면 사실 융이냐 프로이트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할 것 같지 않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되고 융에게서 또 한 번의 굴절을 보인 심리학, 그것을 기독교인들은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쉽지 않은 일이다. 교회는 교회대로 프로이트 그놈은 잡놈이라 하고, 심리학은 심리학대로 종교를 미신의 범주에다 분류해버리는 천박하지만 널리 퍼진 정서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그것을 풀어보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또한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저 현대를 떠들썩하게 한 심리학자들을 이해할 것인가 깊이 고민한 것 같다.
그런데 필자가 보건대는 저자는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런 말들은 많이 들었다. 프로이트는 내친 김에 기독교고 무엇이고 볼 것 없이 막나가는 경향이 있지만, 융은 사람이 온건해서 그래도 기독교를 그렇게 함부로 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말은 들어도 대체 그것이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그걸 누가 그렇게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잘 밝혀 주었다. 그리고 그런 통속적인 말들은 알고 보면 틀린 말이라는 것도 함께 보여준다. 누구는 기독교인이고 누구는 아니라는 선을 긋는 것을 기독교인처럼 좋아할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 욕심을 뒤로 하고 과학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과학 가운데서 기독교가 설 수 있는 자리를 찾고, 특히 영성을 말할 수 있는 탄탄한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이런 핵심적인 관심에서 다른 문제들에로 그 기조를 확장시켜 갔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융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얻게 되고, 또 그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의 책이 시작되는 첫 페이지에는 심리학에도 분명치 않고, 융에 대한 호감을 어떻게 가져야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분명한 문장을 하나 제공한다, “융은 정신분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치료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성숙의 측면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신학으로 말하자면 조직신학자다. 그는 심리학의 형이상학을 분명히 한 사람이다. 즉 그는 심리학을 생물학을 하는 방식으로 전개한 사람이다. 생물이 사물로서 놓여 있듯이 심리도 또한 그렇게 열려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 생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사람의 심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융은 그것이 아니었다. 융이 가진 성향에 대해서는 역자가 역자 후기에서 잘 밝혀주었다. 그는 프로이트와 융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명료하고, 분석적이라면 융의 분석심리학은 때때로 모순되는 듯하며, 통합적이다.” 융이 인간 심리의 연약성과 위험성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그야말로 유년의 시절은 위험하다. 아이는 많은 심리적 위험 가운데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겨내며 이 세상에서 견뎌내야 하는데, 정말 말할 수 없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융은 사람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위험을 뚫고 나가는 가능성은 사람 속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합에 이른다는 것이다.
융이 인간의 의식의 층을 해부학처럼 드러낸 것은 인상적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가장 바깥에 의식의 층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개인 무의식의 층이 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이다. 그런데 융은 그 깊이에는 다시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한다. 융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라는 종이 있는 것은 사실은 이 집단 무의식이 있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융의 심리철학은 바로 이 집단 무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펼쳐진다. 그는 이 집단 무의식을 해명함으로써 분열적 인간이 아니라 통합적 인간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 뿐이 아니라 융은 다시 집단무의식보다 더 깊은 자리에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하였다. 융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종교성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균형을 제공하는 것으로 절대로 날조되거나 적당히 만들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이 엄청난 것을 사람들이 날조해서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융은 그러나 그 세계는 자기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솔직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그로서는 집단 무의식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여간 융은 인간의 무의식도 통합적으로 묘사하고, 또 그 심층에서 종교의 자리를 시인하였다. 저자의 말을 빌면 융은 종교는 자연발생적 실재로서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욕구이며, 인간 존재가 균형을 이루는 데 필수불가결한 정신이라고 분석하였다.
이 책은 그렇게 융의 의미를 알맞게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융에서 끝나지 않는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서는 융의 이런 규정들로 인해서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해 볼 여유를 얻게 된다. 융이 정신분석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프로이트는 비교적 관점에서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거니와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매우 중시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융도 기독교인을 자처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은 차라리 종교에 대하여 매우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되돌려서 집단무의식을 생각하는 그이니만치 그냥 아무 종교나 관계된다고 보기보다는 융 자신으로서는 기독교를 아주 크게 마음에 두었으리라 추론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보면 융은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말을 해준 것이다. 그는 그 세계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는 거기를 분석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아무나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세계가 아니라 경외감으로 응시해야하는 세계라고 밝혔다.
융을 경유하면서 기독교는 이만큼 큰 정신과학적 기초를 얻게 된다. 아무리 우리는 영성 세계에 있다고 말하려고 하여도 과학의 정확성은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데, 그 과학이 융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서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과 관련하여 기독교를 강력히 세워갈 수 있는 도구 같은 것도 제시해 주고 있으니, 융이 아무리 정확히 기독교인을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심층에 기독교인의 의식이 있었다고 할 밖에.
융은 심리분석을 하면서 절대적인 것이나 궁극적인 것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까발리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가치가 큰 것을 인정하고, 그 가치가 사람들에게 신중하게 상정되지 않는 것을 안타까와하였다. 물론 그래서 궁극적인 인생 문제에 대하여 정신과학적으로 어떤 명제를 제안하는 것이 그의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에 융이 이 세계에 대하여 어떤 고백적 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집단 무의식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인다. 그것이 그의 기본 자세이다. 그러나 그 집단 무의식보다 더 깊은 자리에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에 관련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밝힐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가 라이선스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영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로 넘겨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융을 빌어서 기독교를 말하고 영성의 세계까지 말하면서 그냥 융이 기독교를 그렇게 긍정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영성의 세계가 정말 그렇게 모든 심각하고 깊다고 하는 의식들보다도 더 깊은 자리에 있는만큼 정신을 차리고 그 세계를 제대로 인식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욕 수행에 대하여는 “우리는 슬픈 색조를 띠고 있으며, 우울하고 회의적이며 우스꽝스런 금욕을 신중하게 물리쳐야 한다”는 한 영성가의 말을 인용하여 영성의 추구가 잘못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금욕수행에 대하여 그것은 속죄가 아니라 다시 본성을 일으키는 작업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고대의 모든 신중한 영성가들이 찬동할 말이다. 그들이 금욕을 행하면서 속죄를 한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필요없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주로 이 책의 전반부에 의지해서 이 서평을 쓰는데, 그래도 이 책의 인상은 충분히 전한 것 같다. 그 나머지 부분은 그래서 융의 도움을 받아서 영성수련을 진행시켜 나갈 때 심리학상의 큰 개념들을 어떻게 기독교와 영성의 내부에로 수용해 들일 수 있는지 고민한 부분이다. 그 세세한 부분을 말하다 보면 차라리 요약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책의 의미만 소개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이 책의 분명한 의미는 기독교인이 심리학을 더 호의적인 도구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특히 융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융을 시초로 하여 프로이트에게도 가볼 엄두를 내게 한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믿음의 추구와 영성의 추구가 그냥 오직 믿음이라는 외줄타기를 벗어나서 두줄타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줄을 탈 때는 항상 외줄만 타는 사람은 또 한 줄이 불필요하겠지만, 누구라도 들어와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 교회에서 외줄이 아니라 두줄이라는 것은 상당부분 대중성의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물론 이 책이 대중적인 책은 아니지만, 기독교를 과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한 방도를 얻을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 시대를 잘 통찰했던 김지하 시인이 최근에 그의 심리학적 회고라고 할 수 있는 「흰그늘의 길」이라는 책을 무려 세권의 볼륨으로 내어 놓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사람의 시시콜콜한 친족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같지만, 그는 솔직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지하가 매우 담담하게 자기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겨서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흰 그늘의 길은 뛰어난 인간고백이다. 사람들은 그런 고백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자기 아내를 안락사시킨 것으로 인해 기소되었다가 마침내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맑스주의 정신분석가 알튀세의 「미래는 지속된다」는 책도 그런 고백의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빙껠도 그점을 중시하는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런 나의 자리에서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에게 우리의 삶을 맡겨드리는 것이다. 만약에 대체 기독교가 나에게 무엇인가 하고 실존적으로 고민한다든가, 기독교의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빙껠은 사실 그 면에서 융보다 훨씬 친절하게 기독교적으로 말해 주었다. 그에게 감사하며 이 책을 소개한다.
이 책은 프랑스의 심리학자 에르나 반 드 빙껠이 쓴 것을 협성대학교 신학과 김성민 교수가 옮긴 것이다.
이 책을 서평하면서 초두에 이 책의 의미를 강하게 한 번 표현해보고 싶다. 무엇인가를 배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생을 살면서 늘상 득도의 길을 가야한다. 그런데 득도라는 말은 아무 데나 쓰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영원한 길에 대한 통찰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비록 어느 찰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을 향한 창이 된다면 그것은 득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득도의 의미를 가졌다.
경천동지의 대단한 심리학책이 나왔다는 말이 아니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전문화되는 시대도 없을 것인데, 반면에 간학문적 연구는 더 왕성한 것 같다. 저자는 어쨌든 융을 들먹이면서 기독교를 이야기했고, 그것도 영성을 들먹였다. 영성이란 말하자면 기독교의 심층이다. 인간 마음의 보편적 심층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가지고 다시 기독교의 심층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어려운 이야기를 해가는데 융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켰다. 이 책의 가장 깊은 의도를 알고보면 사실 융이냐 프로이트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할 것 같지 않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되고 융에게서 또 한 번의 굴절을 보인 심리학, 그것을 기독교인들은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쉽지 않은 일이다. 교회는 교회대로 프로이트 그놈은 잡놈이라 하고, 심리학은 심리학대로 종교를 미신의 범주에다 분류해버리는 천박하지만 널리 퍼진 정서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그것을 풀어보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또한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저 현대를 떠들썩하게 한 심리학자들을 이해할 것인가 깊이 고민한 것 같다.
그런데 필자가 보건대는 저자는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런 말들은 많이 들었다. 프로이트는 내친 김에 기독교고 무엇이고 볼 것 없이 막나가는 경향이 있지만, 융은 사람이 온건해서 그래도 기독교를 그렇게 함부로 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말은 들어도 대체 그것이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그걸 누가 그렇게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잘 밝혀 주었다. 그리고 그런 통속적인 말들은 알고 보면 틀린 말이라는 것도 함께 보여준다. 누구는 기독교인이고 누구는 아니라는 선을 긋는 것을 기독교인처럼 좋아할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 욕심을 뒤로 하고 과학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과학 가운데서 기독교가 설 수 있는 자리를 찾고, 특히 영성을 말할 수 있는 탄탄한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이런 핵심적인 관심에서 다른 문제들에로 그 기조를 확장시켜 갔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융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얻게 되고, 또 그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의 책이 시작되는 첫 페이지에는 심리학에도 분명치 않고, 융에 대한 호감을 어떻게 가져야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분명한 문장을 하나 제공한다, “융은 정신분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치료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성숙의 측면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신학으로 말하자면 조직신학자다. 그는 심리학의 형이상학을 분명히 한 사람이다. 즉 그는 심리학을 생물학을 하는 방식으로 전개한 사람이다. 생물이 사물로서 놓여 있듯이 심리도 또한 그렇게 열려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 생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사람의 심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융은 그것이 아니었다. 융이 가진 성향에 대해서는 역자가 역자 후기에서 잘 밝혀주었다. 그는 프로이트와 융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명료하고, 분석적이라면 융의 분석심리학은 때때로 모순되는 듯하며, 통합적이다.” 융이 인간 심리의 연약성과 위험성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그야말로 유년의 시절은 위험하다. 아이는 많은 심리적 위험 가운데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겨내며 이 세상에서 견뎌내야 하는데, 정말 말할 수 없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융은 사람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위험을 뚫고 나가는 가능성은 사람 속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합에 이른다는 것이다.
융이 인간의 의식의 층을 해부학처럼 드러낸 것은 인상적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가장 바깥에 의식의 층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개인 무의식의 층이 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이다. 그런데 융은 그 깊이에는 다시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한다. 융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라는 종이 있는 것은 사실은 이 집단 무의식이 있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융의 심리철학은 바로 이 집단 무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펼쳐진다. 그는 이 집단 무의식을 해명함으로써 분열적 인간이 아니라 통합적 인간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 뿐이 아니라 융은 다시 집단무의식보다 더 깊은 자리에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하였다. 융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종교성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균형을 제공하는 것으로 절대로 날조되거나 적당히 만들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이 엄청난 것을 사람들이 날조해서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융은 그러나 그 세계는 자기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솔직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그로서는 집단 무의식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여간 융은 인간의 무의식도 통합적으로 묘사하고, 또 그 심층에서 종교의 자리를 시인하였다. 저자의 말을 빌면 융은 종교는 자연발생적 실재로서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욕구이며, 인간 존재가 균형을 이루는 데 필수불가결한 정신이라고 분석하였다.
이 책은 그렇게 융의 의미를 알맞게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융에서 끝나지 않는다. 특히 기독교인으로서는 융의 이런 규정들로 인해서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해 볼 여유를 얻게 된다. 융이 정신분석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프로이트는 비교적 관점에서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거니와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매우 중시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융도 기독교인을 자처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은 차라리 종교에 대하여 매우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되돌려서 집단무의식을 생각하는 그이니만치 그냥 아무 종교나 관계된다고 보기보다는 융 자신으로서는 기독교를 아주 크게 마음에 두었으리라 추론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보면 융은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말을 해준 것이다. 그는 그 세계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는 거기를 분석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아무나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세계가 아니라 경외감으로 응시해야하는 세계라고 밝혔다.
융을 경유하면서 기독교는 이만큼 큰 정신과학적 기초를 얻게 된다. 아무리 우리는 영성 세계에 있다고 말하려고 하여도 과학의 정확성은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데, 그 과학이 융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서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과 관련하여 기독교를 강력히 세워갈 수 있는 도구 같은 것도 제시해 주고 있으니, 융이 아무리 정확히 기독교인을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심층에 기독교인의 의식이 있었다고 할 밖에.
융은 심리분석을 하면서 절대적인 것이나 궁극적인 것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까발리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가치가 큰 것을 인정하고, 그 가치가 사람들에게 신중하게 상정되지 않는 것을 안타까와하였다. 물론 그래서 궁극적인 인생 문제에 대하여 정신과학적으로 어떤 명제를 제안하는 것이 그의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에 융이 이 세계에 대하여 어떤 고백적 언사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집단 무의식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인다. 그것이 그의 기본 자세이다. 그러나 그 집단 무의식보다 더 깊은 자리에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에 관련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밝힐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가 라이선스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영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로 넘겨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융을 빌어서 기독교를 말하고 영성의 세계까지 말하면서 그냥 융이 기독교를 그렇게 긍정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영성의 세계가 정말 그렇게 모든 심각하고 깊다고 하는 의식들보다도 더 깊은 자리에 있는만큼 정신을 차리고 그 세계를 제대로 인식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욕 수행에 대하여는 “우리는 슬픈 색조를 띠고 있으며, 우울하고 회의적이며 우스꽝스런 금욕을 신중하게 물리쳐야 한다”는 한 영성가의 말을 인용하여 영성의 추구가 잘못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금욕수행에 대하여 그것은 속죄가 아니라 다시 본성을 일으키는 작업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고대의 모든 신중한 영성가들이 찬동할 말이다. 그들이 금욕을 행하면서 속죄를 한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필요없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주로 이 책의 전반부에 의지해서 이 서평을 쓰는데, 그래도 이 책의 인상은 충분히 전한 것 같다. 그 나머지 부분은 그래서 융의 도움을 받아서 영성수련을 진행시켜 나갈 때 심리학상의 큰 개념들을 어떻게 기독교와 영성의 내부에로 수용해 들일 수 있는지 고민한 부분이다. 그 세세한 부분을 말하다 보면 차라리 요약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책의 의미만 소개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이 책의 분명한 의미는 기독교인이 심리학을 더 호의적인 도구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특히 융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융을 시초로 하여 프로이트에게도 가볼 엄두를 내게 한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믿음의 추구와 영성의 추구가 그냥 오직 믿음이라는 외줄타기를 벗어나서 두줄타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줄을 탈 때는 항상 외줄만 타는 사람은 또 한 줄이 불필요하겠지만, 누구라도 들어와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 교회에서 외줄이 아니라 두줄이라는 것은 상당부분 대중성의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물론 이 책이 대중적인 책은 아니지만, 기독교를 과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한 방도를 얻을 수 있다고 하겠다.
우리 시대를 잘 통찰했던 김지하 시인이 최근에 그의 심리학적 회고라고 할 수 있는 「흰그늘의 길」이라는 책을 무려 세권의 볼륨으로 내어 놓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사람의 시시콜콜한 친족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같지만, 그는 솔직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지하가 매우 담담하게 자기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겨서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흰 그늘의 길은 뛰어난 인간고백이다. 사람들은 그런 고백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자기 아내를 안락사시킨 것으로 인해 기소되었다가 마침내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맑스주의 정신분석가 알튀세의 「미래는 지속된다」는 책도 그런 고백의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빙껠도 그점을 중시하는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런 나의 자리에서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에게 우리의 삶을 맡겨드리는 것이다. 만약에 대체 기독교가 나에게 무엇인가 하고 실존적으로 고민한다든가, 기독교의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빙껠은 사실 그 면에서 융보다 훨씬 친절하게 기독교적으로 말해 주었다. 그에게 감사하며 이 책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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