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서평
그림이 없는 퍼즐 맞추기
존 브래드쇼의 상담이론 비평/데비 드바르트/전병래/CLC/[강도헌]
바깥 세상에 어두운 편이라 존 브래드쇼라는 사람의 이름은 본서를 통해 처음 접하였다.
본서의 원제(존 브래드쇼의 거짓 복음을 바르게 보고 해석하는 방법)를 통해 직감은 했지만 처음부터 매우 살벌한 분위기에 놀랐다. 물론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저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학부 시절에 6학점과 신대원에서 4학점이 내가 배운 상담심리에 관계된 전부인 터라, 책을 펴면서 ‘내가 서평이 가능할까?’라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나오는 압도적인 상담심리 주제들은 더욱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다음 장을 넘기면서 우려했던 염려는 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말해 본서는 상담심리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본서를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존 브래드 쇼가 현대인들의 전반적인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읽고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아주 시원하게 긁어주는데 뛰어 났다는 사실이다. 아동학대를 경험한 사람들, 불륜을 경험한 사람들, 이혼, 자기 중심주의, 반 기독교적인 정서, 삶 속에서의 실패 경험, 자녀 양육, 심지어 동성애자들과 같은 부류에 이르기 까지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적인 사상과 죄책감을 반박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브래드 쇼는 모든 상담 이론을 사용하면서, 우리들의 실수나, 죄, 좋지 않은 경험들을 모두 문제가 없는 것들로 만들며, 특히 성경을 인용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성경적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와 자기 합리화라는 출구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처럼 우쭐대고 있다. 여기에 본서는 우쭐 대는 그 모습들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이 존 브래드쇼의 숨겨 놓은 허점들을 찾아내고 있다.
본서를 쓰게 된 동기를 저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반 기독교적인 이러한 이론에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현혹되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 형제자매들이 걱정스러운 나머지 어쩔 수 없이 좀 심하게 비판하게 되었다. 브래드쇼의 이론은 정신보다는 육체에 관심이 많은사람 그리고 특히 어떤 형태로든 아동기에 학대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환영을 받을 만한 부분이 있지만 성경의 관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혀 드리고 싶다.”
브래드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체계와 관련하여 비본질적 사랑 또는 신비화된 사랑 등 두가지 형태의 사랑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아폴로적 유형으로서 일의 형식적 구조를 중시하는 특성이 있다. 아폴로는 형식의 신으로서 모든 사물을 정의하고 그 사물의 한계를 지어놓는다. 이러한 유형은 권위주의적이며, 억압적이고 폐쇠적이며, 법률을 중시하고 심판적이며 정서적으로 억압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완벽함을 끊임 없이 추구하면서 추종자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지 항상 감시한다. 여기에는 의지의 예속이 항상 존재한다. 즉, 사람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브래드쇼는 단식이나 자기 부정, 금욕 등과 같은 행동을 비롯하여 이와 같은 의지의 상실은 일종의 변환된 정서 상태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스스로 올바르다고 느끼는 자기 정의감 역시 일종의 중독상태라고 본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사랑이 학대 또는 잔혹행위와 혼동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유형으로 제시한 디오니소스 체계 역시 아폴로 체계 못지 않게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 체계는 창조의 중심에 있는 아직 분화되지 않는 에너지를 일컫는 말이다. 디오니소스는 환희와 술, 중독, 흥분의 신이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열정적이며, 표현을 잘하고 기분의 변화가 빠르며 중독적으로 열중하는 편에다 배타적이고 심판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은 방언을 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몹시 혼란스런 상태와 다시 태어난다는 느낌을 경험하기도 한다.
브래드쇼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개념을 비판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 그러한 사실이 나와 있다. 브래드쇼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하신 일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영원불변하며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신성함은 정말로 규범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브래드쇼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브래드쇼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적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재하셨지만(엡 1:11) 브래드쇼는 믿지 않는 자로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주재하고 통제하신다. 브래드쇼는 인생이 참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면서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생각, 감정이 바람직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마법에 가까운 기대를 가져보라고 권한다(브래드쇼 역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스스로의 세상을 통제하기 위해 다소 마법적인 정신능력을 고양해보도록 권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실 아이러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훨씬 위대한 도전을 해보라고 말씀하신다. 즉, 오로지 하나님만을 충실하게 믿고 온갖 시련과 위험과 시험을 기쁜 마음으로 견디라고 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브래드쇼의 말은 매우 화려하고 웅장해 보인다. 상담심리, 철학, 신학적인 부분들을 넘나들며, 거창하고 화려한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조각이 맞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모양만가지고 맞춘다 하더라고 그 속에는 그림 즉 내용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현대인들의 비위에는 맞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바깥 세상에 어두운 편이라 존 브래드쇼라는 사람의 이름은 본서를 통해 처음 접하였다.
본서의 원제(존 브래드쇼의 거짓 복음을 바르게 보고 해석하는 방법)를 통해 직감은 했지만 처음부터 매우 살벌한 분위기에 놀랐다. 물론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저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학부 시절에 6학점과 신대원에서 4학점이 내가 배운 상담심리에 관계된 전부인 터라, 책을 펴면서 ‘내가 서평이 가능할까?’라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나오는 압도적인 상담심리 주제들은 더욱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다음 장을 넘기면서 우려했던 염려는 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말해 본서는 상담심리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본서를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존 브래드 쇼가 현대인들의 전반적인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읽고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아주 시원하게 긁어주는데 뛰어 났다는 사실이다. 아동학대를 경험한 사람들, 불륜을 경험한 사람들, 이혼, 자기 중심주의, 반 기독교적인 정서, 삶 속에서의 실패 경험, 자녀 양육, 심지어 동성애자들과 같은 부류에 이르기 까지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적인 사상과 죄책감을 반박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브래드 쇼는 모든 상담 이론을 사용하면서, 우리들의 실수나, 죄, 좋지 않은 경험들을 모두 문제가 없는 것들로 만들며, 특히 성경을 인용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성경적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와 자기 합리화라는 출구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처럼 우쭐대고 있다. 여기에 본서는 우쭐 대는 그 모습들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이 존 브래드쇼의 숨겨 놓은 허점들을 찾아내고 있다.
본서를 쓰게 된 동기를 저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반 기독교적인 이러한 이론에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현혹되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 형제자매들이 걱정스러운 나머지 어쩔 수 없이 좀 심하게 비판하게 되었다. 브래드쇼의 이론은 정신보다는 육체에 관심이 많은사람 그리고 특히 어떤 형태로든 아동기에 학대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환영을 받을 만한 부분이 있지만 성경의 관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혀 드리고 싶다.”
브래드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체계와 관련하여 비본질적 사랑 또는 신비화된 사랑 등 두가지 형태의 사랑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아폴로적 유형으로서 일의 형식적 구조를 중시하는 특성이 있다. 아폴로는 형식의 신으로서 모든 사물을 정의하고 그 사물의 한계를 지어놓는다. 이러한 유형은 권위주의적이며, 억압적이고 폐쇠적이며, 법률을 중시하고 심판적이며 정서적으로 억압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완벽함을 끊임 없이 추구하면서 추종자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지 항상 감시한다. 여기에는 의지의 예속이 항상 존재한다. 즉, 사람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브래드쇼는 단식이나 자기 부정, 금욕 등과 같은 행동을 비롯하여 이와 같은 의지의 상실은 일종의 변환된 정서 상태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스스로 올바르다고 느끼는 자기 정의감 역시 일종의 중독상태라고 본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사랑이 학대 또는 잔혹행위와 혼동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유형으로 제시한 디오니소스 체계 역시 아폴로 체계 못지 않게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 체계는 창조의 중심에 있는 아직 분화되지 않는 에너지를 일컫는 말이다. 디오니소스는 환희와 술, 중독, 흥분의 신이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열정적이며, 표현을 잘하고 기분의 변화가 빠르며 중독적으로 열중하는 편에다 배타적이고 심판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 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은 방언을 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몹시 혼란스런 상태와 다시 태어난다는 느낌을 경험하기도 한다.
브래드쇼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개념을 비판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 그러한 사실이 나와 있다. 브래드쇼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하신 일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영원불변하며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신성함은 정말로 규범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브래드쇼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브래드쇼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적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재하셨지만(엡 1:11) 브래드쇼는 믿지 않는 자로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주재하고 통제하신다. 브래드쇼는 인생이 참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면서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생각, 감정이 바람직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마법에 가까운 기대를 가져보라고 권한다(브래드쇼 역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스스로의 세상을 통제하기 위해 다소 마법적인 정신능력을 고양해보도록 권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실 아이러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훨씬 위대한 도전을 해보라고 말씀하신다. 즉, 오로지 하나님만을 충실하게 믿고 온갖 시련과 위험과 시험을 기쁜 마음으로 견디라고 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브래드쇼의 말은 매우 화려하고 웅장해 보인다. 상담심리, 철학, 신학적인 부분들을 넘나들며, 거창하고 화려한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조각이 맞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모양만가지고 맞춘다 하더라고 그 속에는 그림 즉 내용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현대인들의 비위에는 맞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 183_breadshow.jpg (0B) (0)
2,659개(102/133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