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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 빛

책속의 명언

화려함이 아닌 성숙함으로

강도헌 | 2005.08.21 07:26
  화려한 연주자로 대형 교회의 파이프 오르가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이 꿈이던 아내, 독주회와 청중의 박수갈채에 익숙하고 바흐와 오르간이 우상이었던 아내에게 연길의 생활은 그녀가 원하던 음악과 문화를 빼앗아 갔다. 피아노 앞에서 딩동거리는 반주자 양성 시간, 유행가를 가르쳐야 하는 수업 시간, 초라한 키보드로 반주를 하는 예배시간, 그 모든 것이 괴로웠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하게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감동을 받는다. 예배가 끝나면 속도 모르는 분들이 그녀를 찾아와 반주에 은혜 받았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그 말을 들을때 마다 아내는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그 세월이 이제 10년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 아내를 위하여 이웃에서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빌려와 함께 보았다. 홀로코스트의 잔혹한 장면에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는 간간이 흘러나오는 쇼팽의 녹턴 피아노 선율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끝가지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클라이막스에서 자신이 학창 시절에 가장 잘 치고 좋아했던 곡을 주인공이 치기 시작했다.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을 무엇에 홀린 듯이 듣고 있던 그녀는 영화가 끝나고서도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양손을 펴서 내려다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피아니스트도 오르가니스트도 아니라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어느새 변해 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자각하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러던 아내를 지난여름 아주 오랜만에 보스턴에 데려갔다. 고색창연한 아치형 교회 건물과 현대식 빌딩이 조화를 이룬 보스턴의 아름다운 시가지는 여전히 청명한 하늘 햇살 아래서 신비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보스턴이었기에 아내가 오랜만에 마음껏 만끽하기를 내심 기대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아내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보스턴 이야기만 나와도 가슴이 설레던 그녀가 정작 보스턴 땅을 밟고도 심드렁하여 별로 웃지도 않았다. 자신도 왜그런지 모르겠다며 이제 하나님이 자기 마음속에 있던 보스턴에 대한 그리움마저도 거두어가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옛날에 그녀가 다니던 학교는 한번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서 후배의 도움을 받아 찰스 강변을 따라 보스턴 대학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건물들을 찾아갔다. 어린 의영을 뒤에 태우고 차를 몰며 바삐 다니던 옛 추억이 새로새록 피어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피곤한 듯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그녀가 오르간 독주회를 했던 마쉬 채플 앞을 자나다가, 옛 생각이 나서 아내의 손목을 잡아끌고 차에서 내렸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엄숙한 채플 안은 10여년 전 모습 그대로 여전히 고풍스런 분위기 속에 남아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이 전면을 감싸고 우리를 맞이 했다. 중앙 복도를 가로질러 앞자리에 앉아 잠시 기도를 했다. 옛날 아내가 이곳에서 연주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의영을 데리고 뒤에서 기다리며 나도 모르게 웅장한 오르간 음악에 심취하곤 했던 시절. 그녀도 그때가 생각이 나는지 조심스레 단위에 올라가 오르간을 기웃거렸다. ‘아마 다시한번 쳐 보고 싶겠지’ 하는 생각으로 있는데, 집사 인듯한 분이 다가와 아내에게 무슨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자신이 이 학교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오르간을 잠시 만져 보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는 너그럽게도 흔쾌히 허락했다. 아내는 미끄러지듯 오르간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중국에 처음 이삿짐을 풀던 날 가지고 간 연습용 전자 오르간으로 정신없이 바흐를 쳐 대던 아내의 뜨거운 열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인생과도 같았던 바흐, ‘또다시 바흐를 치려나?’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조용한 찬송가 반주였다.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찬송가를 메들리로 치고 있는 그녀의 성숙한 모습에서 10년의 세월 속에 늘 감추어진 눈물이 느껴졌다. 오르간 선율 속에 담긴 그녀의 아픔이 파도처럼 내 가슴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또 울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뚝 그치며 그녀가 일어섰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울음을 꺾어 버린 것이다. 안심과 안도, 눈시울이 붉어진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나오는데 그녀가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걸어가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가 그동안 가르친 제자들이 인근 도시들에서 교회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고, 그 중에는 오르간을 배우고 유학을 다녀와서 중국 최초의 오르간 반주자를 꿈꾸는 제자도 있다. 언젠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아내의 눈물이 씨앗이 되어 자란 그 제자들에 의해 중국의 교회가 부흥하고 곳곳에서 찬송이 차고 넘치는 그날이 오면 후세 사람들이 아내가 중국 교회 음악의 어머니였다고 기억할 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그녀의 거칠어진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떡의 전쟁 /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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