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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의 저자 김용주 목사 인터뷰

크리스찬북뉴스 | 2018.10.31 09:45

-목사님, 반갑습니다. 근래에 목사님께서 쓰신 책 3권을 보았는데,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남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어떻게 공부해 오셨고 루터를 전공하게 된 이유도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위에 책들이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하겠다라는 생각에 이렇게 인터뷰를 합니다. 먼저 신학을 하게 되고 루터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된 과정을 말씀해 주시고 현재의 사역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가장 적절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루터를 공부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칼빈의 신학을 주로 가르치는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학교는 칼빈의 신학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학교이므로 루터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대원 3학년 때까지도 루터의 신학에 관한 책이나 루터 자신의 저술에 대해서 거의 읽어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3학년 때 루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해방신학자들이나 정치신학자들 같은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책들을 읽고 있었는데, 1980년대는 민주화 투쟁의 시대로서 정치적 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제일 큰 관심을 갖고 읽었던 책은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윤리학등이었습니다. 이 두 신학자들은 아시다시피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매우 실천적인 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신학자들의 책들을 읽어 가는 중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 대하여, 비록 그의 신학의 한계에 대하여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굉장히 존중하면서 인용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신학자는 루터 외에 다른 신학자들은 거의 인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루터에 대하여 아는 것이 고작 15171031일에 발표했던 95개조 논제 외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 칼빈주의 쪽에서는 루터를 미완성의 개혁자로 폄하했고, 진보 쪽에서는 루터가 농민전쟁 때 기득권 세력의 편을 들었다고 폄하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칼빈주의 쪽에서는 성만찬론을 가르치며 루터의 공재설을 지독히 비판했기 때문에, 그리고 칼빈이 가장 완성된 개혁자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굳이 루터의 책을 읽어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 저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분들이 루터의 글들을 존경스럽게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몰트만이 자신의 책에서 인용한 발터 폰 뢰베니히가 지은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라는 책을 영어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리를 꽝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나름 규정하고 있던 내용에 대하여 너무도 잘 설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루터에 대하여 좀 더 공부를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루터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대학원을 다니다 본격적으로 루터를 전공하기 위해 루터의 본고장인 독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소재 훔볼트 대학교에서 “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08년에 한국에 귀국한 후에 여러 신학교들에서 강의를 하다 지금은 안양대학교에서 교회사 겸임교수로 섬기고 있고, 분당 두레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본래 독일에 있을 때도 저는 베를린에 있는 반석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박사학위공부도 겸했는데, 지금도 이렇게 하는 걸 보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특별한 복이고 사명인 것 같습니다.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를 보면, 루터가 시편과 로마서 강의를 통해 발견한 라는 개념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여겨집니다. 루터가 중세 사고 속에서 가지고 있었던 와 성경을 통해 발견한 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루터 하면 칭의론을 떠올립니다. 칭의론이 그의 신학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서 그의 신학에는 칭의론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알 정도입니다. 물론 칭의론이 그의 신학의 중심이고 또 개신교를 잉태시킨 조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루터의 칭의론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어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먼저 그의 칭의론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 의에 관한 그의 새로운 이해 때문이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스콜라 신학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안셀름에 의하여 씨가 뿌려지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만개한 스콜라 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속에 담아서 빚어낸 신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 스콜라신학자들의 문제는 구원을 이해하는 데에서까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라는 것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우리 안에 정착된 습성(habitus)이었습니다. 그는 의의 소질(Anlage)은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인간이 반복적으로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면 의가 자라나게 되고 의가 우리 안에 습관으로 장착된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습성적 의개념을 차용해서, 우리가 의의 소질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동의하지만 은혜가 먼저 오지 않으면 의가 깨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일단 은혜가 와서 의를 깨우면 인간은 의를 행할 수 있게 되고 의를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시작된 의에 대하여 또 다시 은혜가 덧붙여집니다. 이렇게 은혜와 의의 행동의 반복을 통하여 마침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의이고, 이 고유한 의에 의하여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루터 역시 이런 스콜라 신학의 가르침을 따라 의인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의를 행하려 하면 할수록 의에 도달할 수 없고 도리어 더욱 죄인으로 드러나는 모순적인 현실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까지 들어갔지만 그는 점점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무서운 죄인으로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 체험을 통하여 그는 지옥의 고통을 처절히 느끼게 되었고 인간이 가진 고유한 의로서는 그런 심판을 견뎌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처절한 절망과 시험 가운데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어거스틴의 책을 읽으면서 바울에 눈을 뜨게 됩니다.

 

바울에 의하면, 의는 우리 안의 의의 소질의 발전이 아니고,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깥에서부터 선물해주는 의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런 의를 낯선 의라고 부릅니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공적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해주시는 의입니다. 인간은 이 낯선 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볼 때 바울과 어거스틴은 칭의에 대하여 스콜라 신학자와 다르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루터의 칭의론을 바로 이해하려면 이런 중세신학적 배경과 루터 개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루터의 칭의론 논쟁에서 아쉬운 점은 바로 이 점입니다.



 

-루터는 칭의가 교회의 서고 넘어지는 조항이고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한 것에 비해, 오늘날 칭의의 개념은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만큼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울러 바울신학에서 칭의가 부각된 것은 그 시대의 교회와 역사적 배경 때문에 두드러진 것이지, 그의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또는 화해, 평화, 십자가, 구속 등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루터가 말하는 의란 무엇일까요?

 

신학이 시대 시대마다 강조점이 달라진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루터 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루터가 당시에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이라고 여겼던 칭의 조항도 우리 시대에 와서 중심 조항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신학자들이 루터의 칭의 조항을 소홀히 하는 이유는 신학자들의 고질적인 게으름과 무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픕니다.

 

우선, 오늘날 신학에서 칭의 교리를 소홀히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의 일부의 학자들은 루터의 칭의론이 한국 교회의 신자들의 행위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톰 라이트와 같은 일부의 세계적인 신약학자들이라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중세의 루터나 칼빈보다 더 깊은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법정적 칭의가 무슨 사이비 진리나 되는 것처럼 비판합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법정적 칭의는 라틴 문화권속에서 사는 그들의 문화적 한계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법정적 칭의를 가르침으로 행위를 없앴습니까? 로마서 12장 이후를 읽어보시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루터가 법정적 칭의를 가르치면서 행위를 없앴습니까? 그는 면죄부 판매와 같은 쓸데없고 악한 행위들은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설교나 고리대금업에 대하여 비판하는 설교를 읽어보면, 그는 당시 독일의 술 문화를 비판하면서 술고래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하여서는 오늘날 교회에서 그대로 선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루터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십시오. 루터가 법정적 칭의를 주장하면서 톰 라이트만큼도 못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당시 그리스도의 지상대리자로서 지상 교회의 목양권을 부여받고 천국 열쇠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피를 팔아 면죄부를 만들어 팔아 민중의 영혼을 유린했던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며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신성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고 신부직에서 파면되고 유배되고 평생을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았습니다. 오늘날 베스트셀러를 써서 잘 먹고 잘 살면서 루터의 법정적 칭의론이나 비판하는 그런 신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다 간 사람입니다.

 

루터는 법정적 칭의론이란 말도 본인의 입으로 말한 적도 없습니다. 그의 칭의론을 법정적 칭의론으로 프레임을 씌어서 매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식과 악의에서 나온 말입니다. 루터는 칭의론을 가르쳐서 행위를 약할 의도가 조금치도 없었습니다. 중세기는 칭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서 공로 구원론이 나오고 면죄부까지 판매하고 교회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칭의 교리가 잘못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인의 행위가 약화되고 있습니다. 루터의 개혁은 칭의의 개혁을 통하여 행위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칭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잘못된 행위를 양산하여 교회를 도리어 망하게 한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칭의를 설교하기 이전에 율법을 반드시 설교하여 인간들의 위선적 행위들을 폭로해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는 의인도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는 칭의를 바울과 어거스틴식으로 낯선 의의 전가로서의 칭의를 가르쳐야만 공로주의의 위선과 망령에서 빠져 나올 수 있고 순수하고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적어도 루터가 칭의론을 가르쳐서 행위를 없앴다고 말하는 분들은 그의 대표적인 책인 선행에 관하여를 읽어보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칭의를 바로 가르쳐야만 행위가 바로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루터는 칭의는 행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올바로 세운다는 명제를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루터 평전을 보면 그의 신학의 특징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특징과 똑같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위상과 위치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십자가신학이 참 은혜가 되었는데, 루터를 통해 더 발견되고 연구되어져야 할 주제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교회사를 깊이 공부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비텐베르그 대학은 생소합니다. 하지만 이 대학이 개신교 최초의 대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1518년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콜라 신학자들의 신학들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편성되었던 비텐베르그 대학의 전체 커리큘럼을 갱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갱신 운동의 핵심은 신학 갱신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스콜라신학을 축출하고 바울과 어거스틴 신학으로 돌아가는 대학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는 바울이 외쳤던 십자가를 바로 알고 바로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스콜라 신학은 십자가보다도 우주 만물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였던, 소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점들, 즉 지혜나 능력 등을 강조하다 보니 환난, 시험, 비천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 당시의 교회 안과 밖에서 일어났던 여러 신학 운동들 역시 십자가를 잘못 해석했습니다.

 

루터가 볼 때는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그런 다음 신자에게 환난과 역경, 핍박과 시험 등을 허락하셔서 신자를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일(성화)을 계속해 나갑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르지만, 그런 고난이 결국은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된다는 관점입니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거나 잘못 해석하여서 신자의 고난을 저주로 보는 관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임과 동시에 신자를 거룩하게 만드는 수단이 됨으로,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야하고 또 신자의 고난의 필요성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교회가 되자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부르면서 영광의 신학을 전하는 스콜라 신학자들에 맞서 싸웠습니다.

 

-“자유주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그들의 장점과 단점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책에 보면 목사님께서 이들의 매력에 푹 빠졌다가 치명적인 위험을 발견했다는 것을 기억하는데, 어떤 점에서 하신 말씀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땅에 유일한 신학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들과 공존하고 협력하여 더 나은 신학의 길과 방법을 모색해야 된다고 봅니다.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리고 좋아하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있으신지요?

 

제가 루터에 관한 두 권의 책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익투스)칭의, 루터에게 묻다(좋은 씨앗)라는 책을 쓴 이후에 루터 연구를 잠시 멈추고 자유주의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좋은 씨앗)라는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19세기 이후에 개신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된 운동인데 칸트로부터 씨가 뿌려지고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해 싹을 틔우고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꽃을 피운 신학입니다. 이 신학은 계몽주의 이후에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의 기독교에 대하여 실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도덕적 차원으로 환원해서 인류의 도덕의 발전을 통한 사랑의 나라의 실현을 하나님 나라로 보고자 하면서 기독교를 구원하고자 했던 신학입니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은 이성을 진리의 척도로 내세우면서, 기술의 발전으로 세계의 주인 자리를 양보해야 했던 인류에게 이 세계의 주인 자리를 찾아주고, 인류의 도덕적 진보를 전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습니다. 특히 개신교 정통주의의 원죄나 십자가 칭의 등등의 시대에 뒤떨어진 가르침들을 중심 진리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성인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복음을 왜곡시킨 운동이고 인류를 결코 구원할 수 없는 운동이었음으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계몽주의 이후의 인간으로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통하여 신앙의 방향을 잡아주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정통기독교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진리들인 원죄나 십자가와 같은 진리들을 믿지 않거나 왜곡시키는 잘못을 범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교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고, 세계의 주인으로서 교회를 세우려 했지만, 도리어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세상으로 나가게 해서 교회 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연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유주의 신학을 비롯한 현대신학 연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목사님의 저서가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루터가 더 읽혀져야 하는 이유와 이것을 통해 한국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리고 앞으로의 사역(저술, 번역, 강의, 목회)과 관련한 계획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독자들이 궁금해 하실 것 같습니다. 목사님,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개신교에는 칼빈, 바빙크, 에드워드 등 배워야할 신학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의 스콜라 신학의 문제점들을 파악하는데 루터 신학만큼 도움이 되는 신학자가 없습니다. 제가 볼 때 가장 큰 강점은 그의 신학의 실존적 성격입니다.

 

현대의 루터 비판가들이 루터를 가장 많이 비판하는 지점이 루터가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루터야 말로 인간에 대하여 가장 깊이 이해한 신학자입니다. 루터가 신학이란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관한 학문이다고 정의하는 것처럼, 루터는 죄 아래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는 인간을 어떻게 하면 구원할 수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장 깊이 고민했던 신학자입니다.

 

95개 논제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십시오. 로마교가 면죄부 교리를 만들어 민중들의 영혼과 삶을 황폐화 시켰기 때문에 루터가 저항한 것입니다. 그는 그런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해방시키기 원했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인으로 살도록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신자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깊은 인식을 제공하고 해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신학자는 읽으면서 추론하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죽으면서 된다고 말할 정도로 신학자 자신의 현실에 뿌리 내린 경험적 영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신학이 가장 하나님 중심이면서도 가장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신학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인 신학자라고 봅니다.

 

앞으로 저는 십자가 신학을 중심으로 루터 신학의 실존적 성격에 관한 연구서를 계속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터를 대중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그의 대표적인 생활에 관한 설교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가 인간과 인간의 삶 세상에 대하여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는지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칼 바르트의 신학(내년 1월 출간 예정)과 현대 신학자들에 대한 몇 권의 책도 계속 집필하여 21세기 우리 한국의 신학이 어떻게 나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좋은 시간 갖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대담: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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