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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북뉴스 | 2017.06.05 13:47

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 /새물결플러스/이민희 서평   

 

고통

 

스위스 취리히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인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애도(궁리: 서울, 2007)에서 상실을 체험한 인간에게는 이를 충분히 슬퍼할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인간은 죽은 자와의 관계로 형성된 세계가 부서지는 것을 연달아 겪으며 슬픔과 혼란 속에 남겨진다. 정당한 애도는 이러한 고통 속 인간들이 죽음으로 겪는 상실감, 병적인 슬픔,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애도하는 이들은 존재의 의미, 하나님,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의심에 빠지며 간혹 살아야 할 이유 마저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고립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이들이 비정상적인 무의미, 불안, 분노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삶을 회복하게 하려면 애도의 과정으로 이끄는 도움이 필요하다. 충분한 애도는 극단의 고통이 가져온 슬픔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과정이다. 고통과 충분히 씨름했을 때, 불멸을 파괴하는 죽음에서 도망치지 않을 때, 극복의 심지에 불을 붙일 수 있다.

고통과 씨름하다성서의 문학유형과 설교, 증언하는 설교등의 저서에서 성서의 장르별, 내러티브적 설교를 주장한 미국의 에모리대학교 신학대학원의 토마스 G. 롱 교수가 고찰하는 신정론이 담긴 책이다. 목회자로서 성도의 고통에 책임 있게 참여하는 자세를 제시하는 설교적 충언에 가까운 이 책은 조직신학적 전개보다 교리적인 설명은 부족할 수 있지만, 매우 공감을 자아내며 설득적이다. 그 이유는 고통이란 모든 인류가 겪고 해결하기 쉽지 않은 보편적 갈등의 주제이며, 이 갈등은 개인과 사회의 신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함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고통,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의 고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기에 목회자로서 설교를 통해 성도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려는 What Shall We Say?의 원제목 보다 고통과 씨름하다라는 한국어 제목이 훨씬 더 진중하게 다가온다.

 

의심

 

신정론은 위험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나님은 세상사에 직접 개여 할 수 있으므로 모든 길흉화복의 제일원인이었다. 중세시대 유럽인의 삼분의 일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은 과거부터 누적된 죄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근본적 치료법은 하나님의 화를 잠재우는 회개뿐이었다. 그러나 몇 백 년 후, 우주가 운행되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법칙과 자연질서를 발견한다. 태양 중심의 태양계에서 지구가 자전하여 밤낮이 바뀌는 것이다. 병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병균이라는 제일원인이 따로 있다. 물론 세계는 창조 이후 하나님의 보존 안에서 유지되지만 신학과 형이상학만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인간에게는 이성과 과학이라는 새로운 사고 체계가 생겼다. 그러한 18세기 중반을 지나 발생한 리스본의 대지진과 19세기 중반 미국의 남북전쟁이 가져온 무자비하고 처참한 결과는 과거와 달리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자애로운 섭리로 인간들에게 최선의 세계를 만들어주는 하나님과 무고한 인간의 고통이 공존 가능한지 묻게 되었다. 재앙과 참사는 가장 기본적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야 완성되는 신 중심의 세계관을 붕괴시켰다.

 

과거 특별 계시의 세계 속 인간들이 하나님의 의중을 맹목적으로 따랐다면, 탈신화화한 세계에서는 현존하는 고통의 실재 의미를 논리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1. 하나님은 존재한다.

2. 그 하나님은 전능하다.

3.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사랑의 본질이다.

4. 그런데 인간에게는 무고한 고통이 있다.

 

위 네 가지 가설을 각각 검증하여 고통을 겪는 인간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인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전능한 분인지 증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자연스럽게 논리적 고착상태에 이르며, 20세기 말 성서학자였던 바트 어만은(Bart D. Ehrman) 이를 불가능한 체스 경기라고 일컬었다. 네 가지의 가설이 논리적으로 동시에 사실일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하나님이 존재하려면 전능한 하나님과 인간의 무고한 고통을 주장하는 나머지 두 가설 중 하나 이상이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불완전한 가설을 수정하여야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정론을 전개한 이들을 롱 교수는 동료 순례자라고 부른다.

 

동료 순례자들

 

일부의 순례자들은 인간의 무고한 고통을 재정의한다. 어떤 연유이든 인간에게 발생하는 고통은 절대 무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과 반역의 개념을 사용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하나님 의도하신 선의 결핍이라고 정의하고, 절대 악은 하나님의 피조 대상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매우 구원론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만이 타락한 창조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역사이고, 죄와 악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승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근거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세상 속 하나님을 긍정할 때 따르는 한계는 여전히 있다. 태초의 세계에 등장한 사탄과 자연적 악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타락한 자유의지의 결과로 모든 악을 바라보며 향후 알 수 있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 무관심을 지닌 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그리스도 공동체를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제한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 고통의 공존을 정당화하려는 순례자들도 있다. 랍비 해롤드 쿠쉬너(Harold Kushner)는 그의 저서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에서 하나님은 악과 고통의 주체일 수 없고 오히려 악을 생성하는 다른 존재, 하나님이 막지 못할 운명이라는 적극적 힘이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전능함이 축소되고, 운명과 그다지 전능하지 않은 하나님이 대립하게 된다. 결국 착한 인간에게도 나쁜 일은 발생한다. 한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과정사상에 근거한 존 캅(John Cobb) 같은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무로부터 피조 세계를 창조해낸 존재가 아닌 진화과정 중인 큰 체계의 창조 에너지로 파악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악을 둔 이유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의미 있고 도덕적인 선한 선택을 하여서 하나님의 상태로 고양되기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 과정의 모든 고난과 슬픔은 마지막 완성의 시점에서 그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제한하는 쿠쉬너와 과정신학의 자체에서 발생하는 교리적 문제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금세 파악된다. 그리고 결국 세상의 모든 악 가운데에도 있을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답하지 못한다. 이들이 찾아낸 제한된 능력으로 우리의 고난에 함께 하는 하나님은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못하는, 오히려 그의 긍휼과 인간의 분노가 동시에 발생케 하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괴롭지만 전능한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다. 전능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만큼 인간이 믿는 절대자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절망적이다.

 

롱 교수는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철학적 가설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 하나님은 해당 논리 체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설사 모든 가설들이 참이라고 증명되어도 가설들 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공식 안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또한 이렇게 철학적 사유에 근거하는 하나님은 성도가 경험하는 초월적 하나님과 신비로운 신앙의 깊이에 대응하지 못한다. 사유 안에만 존재하고 성도의 삶 속에 신비롭게 거하지 못하는 이신론적 하나님은 절대자에서 거리가 멀고,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은 인간이 맨발로 광야를 걷게 한다. 문명에서 고립시켜 괴로운 사유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돌보고, 매일 만나와 메추리를 제공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인간,

 

새로운 가설에 근거하여 논리적 신정론을 전개하는 대신 고대시대에 가장 크고 많은 고통을 당한 인물, 신정론을 묻기에 가장 적합한 욥의 사례를 소개한다. 욥의 고난사는 그의 불순종으로 야기되지 않았다. 오히려 윤리적인 삶과 온전한 신앙을 소유한 인간에게 가시적인 복을 쏟아 붓는 하나님이 그 체계의 규칙을 어기면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완벽한 세상 속 도덕 규칙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겪는 무고한 고통이 정말 괴로운 이유는 아픔과 상실 그 자체, 그리고 뒤따라오는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체계가 무너졌다는 원망과 처절한 질문 때문이다. 욥의 사례에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욥의 고통을 막지 않은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고통을 직면하는 인간의 두 가지 자세를 배운다. 첫 번째는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로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왜 그러한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하지 않는 묵인은 비극에 대처하는 방법이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침묵에도 계속 질문해야 한다. 이 질문은 기도가 된다. 롱 교수는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숙고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은 기도이고, 지성적 탐구, 합리성을 갖춘 신앙을 추구하는 기도에는 유익이 있다고 가르친다(p.64). 그리고 두 번째는 고통 당하는 자에게 다가가는 인간의 자세이다. 신학적인 설명보다 이해와 공감이 동료 인간을 보는 시각이다. 인간에게는 신학을 근거로 하나님의 판단을 대신할 자격이 절대 주어지지 않았다. 쿠쉬너처럼 고민하는 인간에게도, ‘그래서 당신이 진짜 착한 인간인가요?’라고 반박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마태복음 속 알곡과 가라지 비유의 의미를 신정론 관점에서 꼼꼼히 되짚는다. 마태복음의 문학적 문맥,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목회적 문맥 안에서 파악할 수 있는 악의 존재 이유와 구체적인 영향력, 그러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야 할 인간의 태도를 찾는다. 무엇보다 예수도 항의의 신정론을 긍정하였다. 세상이라는 밭에 가라지로 자라날 악의 씨를 뿌려놓은 주인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은 오히려 신앙의 표현이다. 고통과 악에 대한 항의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고 관계에 근거한 기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비유로 유추할 수 있는 악은 우리를 뛰어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원수인 악, 마귀는 정치적, 인류학적, 심리학적 방법만으로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어두운 영적인 힘을 지녔다. 인간을 초월하는 우주적인 세력으로, 매우 힘있는 존재이다. 특히 인간의 합리적 노력이 완벽할 지라도 전부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목회자는 악과 선이 한데 뒤섞여 분리되지 않은 사회에 사는 성도에게 지혜롭게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주고, 신학을 구현해낼 수 있게 연습을 도우며, 의미 있는 목회적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스스로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악과 고통에 대해 하나님에게 함께 질문해야 한다.

 

신정론

 

롱 교수는 목회자 혹은 교사가 성도와 사회가 겪는 고통의 문제에 어떻게 다가갈 지 알려준다. 그의 설명은 전능하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고도 고통을 바라보게 해준다. 그가 요구하는 신정론에 대한 반응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동시에 지금, 역사의 중간,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악을 다루시기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도 증거하는 것이다(p.228). 롱 교수는 신정론에 접근한 동료 순례자들의 다양한 주장이 모순을 드러낼 때 이를 부족하고 성급한 판단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이해하며 바라보기 어려운 인간의 유한성으로 해석한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신정론에 문제를 제기하게 된 신학과 믿음의 부대낌, 삶의 고난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반면, 모든 설명에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정체성을 우선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인간의 감정보다 격하시키지 않는다. 그의 목회와 설교의 포용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롱 교수의 다각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정론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포괄적인 대안과 달리 개인에게 발생하는 악과 구조적으로 생기는 악에 대한 신학적 접근은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다포 세대로 표현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취업과 결혼을 하지 못해 겪는 고통과 그런 상황을 만드는 부조리한 구조를 동일한 관점으로 파악, 분석하기 어렵다. 또 개인에게 발생하는 고통 중 많은 것들은 구조에 의한 피해, 혹은 파생인 경우도 다수다. 게다가 개인이 겪는 고통의 상황은 감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구조의 악은 특별히 인지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질문이 더 있다. 최종적으로 승리할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그의 수난을 바라볼 때 고통을 낭만적으로 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승리 이미지를 배제하며 고통을 묵상할 때 고통의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구원을 소망하게 할 수 있을까? 고통과 슬픔을 진짜 극복하려면 인간의 고통을 하나님이 함께 겪고 느낀다는 공감 이상이 필요하다.

 

고통과 씨름할 시간

 

물론 신정론이 논리적으로 철학적 설명력을 갖춘다고 하여 복음 전도가 수월해지고, 선교가 확장되리라 확신할 수 없다. 예상치 못한 고난을 맞이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 보내야 하는 이들, 그리고 사회 구조의 사각지대에 놓여 반복적으로 소외 당하는 이들에게 논리적인 신정론을 근거로 고통을 정당화할 교만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신학적 설명에 비하여 고통은 실존이다. 신학적 설명이 끼치는 영향보다 고통이 가져오는 영혼의 결핍과 육체의 아픔은 치명적이게 깊다. 비극의 상황에 놓인 인간을 어루만지거나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지 못하면서 논리적인 신정론을 펼쳐나가는 것은 가끔 게을러 보이기도 한다. 롱 교수의 표현대로 신정론은 논리적 해답보다 의미를 찾는 순례에 가까울지 모른다(p.182). 목회적 관점에서 신정론의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비극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서 하나뿐인 아들을 보낸 창조주를 온 인격으로 인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이 된다. 고통과의 씨름은 패배나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직면하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실존으로 겪는 고통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씨름은 온 감정의 토로와 시간을 요구한다. 결국 고통과의 씨름은 하나님과의 씨름이다. 야곱이 환도뼈를 맞고 이스라엘이 되는 브니엘에서의 씨름이다.

 

악의 상황에서 꾸준히 하나님의 실제적인 존재 의미를 묻고, 계속 걸어야 한다. Sovitur Ambulando 걸으면 해결된다. 추상적인 철학의 문제들에는 현실적인 해결책이 존재할 것이란 롱 교수의 희망을 모두 수용하지는 않지만, 신학으로 제기되는 질문에 신앙의 눈으로 들여다 보자는 의견은 어느 정도 동의한다. 뒤늦게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친구가 있다. 아내와 서너 살 된 딸도 있다. 맞벌이 부부였던 이들은 남편의 늦은 공부에 생계, 집안 살림, 아이 양육이 모두 아내 몫으로 가게 되었다. 주일은 교회사역으로, 평일은 학교 도서관에서 밤낮없이 공부하느라 바빠서 잘 도와주지도 못한다고 했다. 하루는 도서관의 서가 사진을 찍어 도서관에 책 많다. 이 책들 3년 동안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라는 문자 메시지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멋쩍게 담아 아내에게 보냈단다. 돌아온 답장은 여보 3년도, 1년도 아니고, 오늘을 삽시다. 내일 예수님 오십니다.”였다. 논리적인 신학 책들 속에 파묻혀 건조해지는 남편의 영성을 일깨우고 북돋아 준 것은 곧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하루를 충실히 사는 아내의 신앙고백이었다. 안셀무스의 좌우명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aith seeking understanding)”으로 기도하는 삶, 하나님과의 신실하고 지속적인 관계로 특정 지어진 인생을 살다 보면 구체적으로 참여할 방법도 찾을 것이라 기대한다.

 

우여곡절 끝에 20173월 세월호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속에서 잠들어 있던 아이들의 몸이 발견되고 있다. 함께 숨진 기간제 교사들은 마침내 순직으로 인정되었다. 충분히 애도해야 할 시간을 덮었던 시퍼런 물이끼 같은 야만의 더께가 드디어 걷히고 있다. 이제 고통과 씨름할 시간이 되었다.


저자 토마스 G. (Thomas G. Long)

 

Emory UniversityCandler School of Theology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들 중 한 명이다. 그가 집필한 수많은 저서들 가운데 좋은 장례(CLC)증언하는 설교(The Witness of Preaching)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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