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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제사장 위임식-속죄제

강도헌 | 2018.03.03 11:22

속죄의식 (29:10-14)

 

제사장 위임식은 지금의 본문인 출애굽기 29장과 레위기 8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장의 모두는 제사장 위임식을 말하고 있지만 레위기 8장은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임직시킴으로 제사장직 제도의 설립을 말씀하고 있고, 출애굽기 29장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임직에 관한 지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장에 나타나는 제식들은 모두 아론계 제사장직의 합법성을 말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론 계열 제식의 합법성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다른 고대 문서들과 같이 왕의 복식이나 즉위식의 예식과 그 방식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제사장의 복식과 임직식, 그리고 제사의 방식들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과 이스라엘 간의 단순한 관점의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 이해의 출발에서부터 차이가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세속적 가치관에서 인간은 스스로 왕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고, 그 왕을 숭배하고 있으며 고대제국에서 신의 존재는 통치자인 왕이나 황제의 직위와 권한을 확증하거나 보증하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왕의 신을 숭배한다는 것은 바로 그 왕을 숭배하는 것으로서 왕의 ‘힘’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왕의 힘을 숭배한다는 것은 결국 왕이 아니라 그 ‘힘’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왕정과 봉건제의 종말로 인해 더 이상 실제적인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은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권력과 재력, 명예와 같은 힘을 숭배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현재의 세속적 가치관과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은 왕이 아니라 제사장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미 앞서 제사장의 세세한 복식에 대해 살펴보았던 것처럼 출애굽기 29장은 제사장의 임직 예식에 대해서도 세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왕이 아닌 제사장을 세우시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근차근 말씀 드릴 것입니다.

 

제사장 중심의 사상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유대교의 핵심 사상이 되는데 그 과정은 사사기 이후의 역사서들을 통해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성경 전체의 맥락적 흐름 가운데에서 두 종류의 제사장 중심 사상의 출현 중 그 하나에 해당하는 출애굽기 29장의 제사장 위임식은 ‘언약적 관점’의 큰 흐름 가운데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약적 관점에서 오늘의 본문은 모세 언약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 있어서 가장 최초는 창세기 3장의 아담 언약입니다. 그 이후로 크게는 노아, 아브라함, 야곱, 유다, 모세의 순서로 언약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세의 언약은 크게 두 개의 언약이 있는데, 하나는 신명기적 언약으로서 ‘율법적 언약(십계명)’입니다. 두 번째로는 레위기적 언약으로서 ‘제사장 언약’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출애굽기 29장 이하는 제사장과 제의적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서 레위기에 속한 제사장 언약에 해당합니다. 또한 레위기에 속한 제사장 언약도 ‘직분적 개념’과 ‘사역적 개념’ 둘로 나누어지는데 제사장직제의 초기 문헌에 속하는 모세오경에서는 뚜렷하게 이 둘이 구분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레위기는 아론계열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고, 출애굽기의 제사장 위임식은 제사장 직분에 집중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거룩해야 하는 제사장

지난주에 살펴 보았던 제사장 위임의 첫 절에 해당하는 29장 1절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할 일은 이러하나니”라는 말씀은 제사장의 임직을 앞둔 자들이 거룩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의 말씀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라고 명령하시면서 위임식을 통하여 제사장들을 거룩케 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거룩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거룩’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동안 북미권의 해석이 많이 알려져 왔습니다. 그동안 북미권에서 ‘거룩(카도쉬)’의 의미에 대해서 ‘구별하다’는 의미 중심으로 해석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데이비스와 같은 학자들이 더 많은 연구들을 통해 ‘카도쉬’에 대해 ‘하나님께 속한’이라는 좀 더 정확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룩’이라는 의미에 대해 세상이나 세속과 구별된다는 의미를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속한’이라는 의미가 더 깊은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하며, 제사장이 되어서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께 속해야 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께 속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구별된’이라는 의미보다 더 분명하고 명쾌한 해석과 적용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소 머리에 안수함(10절)

출애굽기 29장을 통해 볼 때 제사장으로 위임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사의 의식들을 드려야 했는데, 가장 먼저 드렸던 제사가 바로 지금의 본문인 속죄제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송아지 머리에 안수를 한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신 것처럼 자신들의 죄를 제물이 될 송아지에 이전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제물에 이전시킨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몸 안에 있는 죄의 소욕과 뿌리(욕구, 정욕)들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죄에 속하였던 자들이 하나님께 속한자가 되기 위해 죄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소를 죽임(11절)

그리고 11절에서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그 송아지를 잡고”라고 말씀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송아지를 잡은 것은 회막문 앞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아직 제사장의 직분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회막안에서 송아지를 잡을 수 없었고 회막문 앞에서 송아지를 잡아야 했습니다. 참고로 성경은 성막을 회막, 장막, 성막 등으로 표현하는데, 회막이라고 표현 할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를 의미할 때 회막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송아지를 잡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모여 있는 가운데 치러지는 예식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송아지를 잡는 것의 중요한 이유는 앞서 이들이 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자신들의 죄를 송아지에게 이전시킨 것과 같이 죄가 이전된 그 송아지를 자신들이 죽임으로 스스로 자신의 죄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자신의 죄와 싸워야 하며,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피를 제단 뿔에 바르고 그 밑에 쏟음(12절)

12절의 말씀은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을지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네 손가락’과 ‘제단 뿔’은 출애굽기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4 를 사용하면서 그 뒤에 나오는 ‘전부’와 쌍을 이루어 제물의 피를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단의 뿔은 앞서 성막 기물들에 대해 살펴볼 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제단의 4 모퉁이에 세워져 있고 제물들을 고정시키기 위해 놋줄을 묶는 기능을 하였습니다. 또한 제단 밑은 제단을 태우는 장작더미가 있는 곳으로서 모든 피를 하나님께 태워 드리는 것으로서 이것은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물을 단 위와 진 밖에서 불사름(13,14절)

13절과 14절은 잡은 송아지를 불로 태워 속죄제를 드리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한 번에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누어 불로 태울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먼저 13절의 제단 위에서 태우는 것은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을 태우고, 14절의 고기, 가죽, 배설물은 진 바깥으로 가져다가 태워야했습니다. 이것은 내장에 해당하는 것들은 제단에서 태우고, 그 외의 것들은 진 바깥에서 태워야 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내면과 외면의 두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의 내면 안에 있는 생각과 정욕들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 모두를 불로 태워 정결케 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내면에 해당하는 생각과 마음은 회막안 제단에서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회개함으로 정결케 해야 하며, 우리의 더러운 행실과 습관 그리고 교만하고 이기적 탐욕들은 진 바깥, 즉 삶의 모든 영역 밖에서 태워버림과 같이 우리의 행위 밖으로 소멸시켜야 함을 퍼포먼스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성경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지고 심판하는(겉과 속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세속적 법정신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 안에 있는 죄는 인정한다는 것으로서 죄악 된 마음이 있는 한 죄의 행위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들키지 않은 죄는 괜찮다는 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에 대해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시면서 강력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속죄제

오늘의 본문은 제사장 위임을 받기 위해 가장 먼저 드리는 제사에 대한 내용으로 속죄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위임식의 첫 제사로 속죄제를 명령하셨습니다. 속죄제를 가정 먼저 드리게 하신 이유는 제사장이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또한 어떤 일을 하는 존재인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즉, 거룩케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가장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를 가장 먼저 강조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죄에서 떠나지 않고 얼마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도 사역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에서 떠나지도 않으며 죄 가운데서 드리는 그 모든 예배와 사역은 우상숭배와 동일한 것으로서 결국은 그 예배와 사역이 하나님의 힘과 도움을 받기 위해 즉,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숭배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로 나아가든지 사역을 위해 나아가든지 항상 우리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죄와 우리의 행실과 습관 가운데 있는 스스로의 죄를 회개하고 정결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그 제물에게 부어짐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사장 위임식의 첫 번째 제사로서 속죄제의 제물을 잡아 불로 태우는 제사를 요구하심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케 하시기 위함이며 또한 그 제물을 불로 태우게 하심으로 그 죄를 심판하셔서 우리 가운데서 죄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은 죄를 불로 태워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로 태우는 제사를 지금은 드리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과 삶의 더러운 죄악들을 태울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육체의 소욕을 따를 것인지, 성령의 소욕을 따를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제사장 중심의 사회를 강조하시는 것은 권력과 힘을 숭배하는 왕 중심적 우상숭배가 필연적으로 권력과 힘을 얻기 위해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으로 흐르며 그 타락과 부패의 마지막은 심판과 멸망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왕 중심 사회의 필연적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중심의 사회를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은 우상숭배자들의 왕과 같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직분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인(수종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성결함을 이루도록 돕고 섬기는 자이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함으로써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킴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을 통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세상이 강조하고 있는 ‘강력함’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자, 즉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한 첫 의식으로서 자신의 속과 바깥의 더러운 것들을 불태워 없애는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작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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