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수동과 능동의 미학

이성호 | 2017.04.01 18:49
수동과 능동의 미학

12세기 일본의 헤이안시대가 막을 내리고, 가마쿠라시대라는 무사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서 일본 불교는 여러 갈래로 분화하여 종파가 난립합니다. 이때 등장한 ‘명혜 상인’은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위해 한쪽 귀를 자르면서까지 불심을 찾겠다고 맹세한 인물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법연스님이 염불만으로 불심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자 이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참선' 즉 묵상을 통하여도 얻을 수 있다는 반박문을 내걸면서 일본 전국에서 유명해집니다. 그는 '타력'에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의 노력, '자력'도 중요하다는 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장을 기독교 맥락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권능이나 성령충만을 구하는 수동적인 자세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찾기보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신앙적 생활태도, 성경적인 인생관과 가치체계, 그리고 나의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편견 중에 하나는, 고대인들이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편견입니다. 그들이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를 믿었을 것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겁니다. 

물론 어느 시대나 대다수 사람들은 복잡한 사유보다는 단순한 쪽을 택하지만, 고대 시대에서도 합리성이 결핍되지 않은 정교한 사상체계들이 있었고 더구나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다양한 사상체계들과 마찰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갱신과 성장의 기회로 삼아 적극적인 태도로 신앙적 편향성과 타성을 뛰어넘어 균형 잡힌 신앙을 정립하며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비방하며 하찮게 여기는 일본 불교가 이 정도인데 하물며 한쪽 귀는 못 자를지언정 말끝마다 하나님을 붙인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일까요? 우주적 진리, 유일하신 절대자, 하나님을 따른다는 우리의 진짜 수준은 어떠할까요? 

자기성찰이 없는 신앙, 자각이 없는 의존적 기도, 반실존적인 무책임성이 개신교회를 병들게 하고 무력하고 타성적인 종교인을 만듭니다. 개신교는 외적 형식이 강조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면의 믿음을 살아내는 종교입니다. 교인들이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 삶이 바뀌는 건 한두 번 설교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능과 역할을 찾는 것은 당연하며 너무나 타당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있는지 자기 점검의 시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정적인 상태가 아닌 역동적인 거룩한 삶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므로 어떻게 사는가”의 영역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예수 믿고 복 받으라 거나, 교회 다니면 좋은 일만 생긴다거나, 천국가기 위해 예수 믿으라는 그런 수준에 있다면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웃의 한숨과 신음에 아무 감정이 솟지 않는다면, 악함과 선함에 대한 분별이 여전히 막연하다면, 이간질과 거만함과 난폭함에도 나의 가슴이 격분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날로 커지는데 기독교적 삶은 날로 작아지며, 목회자는 갈수록 많아지는데 사역은 날로 엉터리가 되어갑니다. 우리는 자신을 기만하고 이웃을 꺾어야 하는 생존 방식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인 성경은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성경이 나를 읽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 같으나 실상은 성경이 나를 읽는 것입니다. 나를 읽어내는 성경.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봄입니다. 그것도 이전과 다른 전혀 새로운 봄입니다. 거짓은 쫓겨 가고 가라앉은 배는 떠올랐으며, 꽃은 만개하여 향기와 더불어 고운 빛깔로 밤까지 훤합니다. 오지 말라 해도 거리마다 사람들로 넘실거립니다. 한국교회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향기에 취해, 고운 자태에 끌려 교회로 교회로 밀려오는 무리들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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