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독서 단상, Y.C. Eliot Choi의 페이스북에 게재한 단문을 보면서

고경태 | 2017.05.28 13:09

소장학파는 합법적으로 책을 학대하는 사람이다. 책장에 책을 가두고 뿌듯해 웃는다.” 상당히 재미있는 문장이다. ‘학대(虐待)’라는 부정적 의미를 책을 소장함의 현상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도 않고 소장하는 장서가의 고뇌와 함께, 읽지 않거나 않을 책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애서가의 이해할 수 없는 심리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책은 나를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이 책이 주는 미덕이기도 하다.” ‘()’이 무엇일까? 본래 문자()’는 상업 거래와 정복자의 영웅담을 보존할 목적으로 창안된 것 같다. 그런데 다음에 사상을 담는 도구로 사용했다. 책을 바라보면서 좋아할 수 있는 정신 구조는 상당이 독특한 면이 있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딱딱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구조는 아닐 것이다. 필자가 출판업자는 아니지만,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소장하는 것에 가치를 둔 독서가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한다. 장서가들이 소장하고 싶은 높은 가치의 책들을 많이 제작해주기를 바란다.

 

한 덩어리로 묶은 종이 더미가 책이다. 서점에 갔던 날의 가쁜 숨, 활자가 종이에 눌려 새긴 자국의 살가운 촉감, 두꺼운 책을 펼치면 밀려오는 나무 숲 냄새, 발품 팔아 연구하고 고심하며 써 내려간 저자의 마음이 내 손에 들린 책에 담아져 있다.” ‘을 생각할 때, 죽간(竹簡)’을 생각한다. 책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치도 필요하다. 필요없이 넓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목사후보생들에게 이렇게 권면한 적도 있다. “여러분은 큰 교회를 구하지 말고, 큰 서재를 구하라. 큰 서재가 있는 교회는 반드시 큰 교회이다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작은 교회에 있고 작은 서재를 갖고 있지만, 몇 곳의 책 소장처를 소유(임의 처소)하게 되었다. 결국 책을 안전하게 소장할 위치를 찾는 것이 애서가에게 큰 숙제이다. 나의 많은 책이 있어야 할 큰 집이 나의 집이다. 나의 작은 집에 맞추기 위해서 책의 소장 규모를 다운사이징할 필요와 요구가 없다. 반드시 더 많은 책이 소장될 소장처에서 내가 살고 싶다.

 

내가 독서를 하는 이유라면,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보니 뒷골에 잠재된 내용을 끌어내 응수해야 할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살아도 순탄하지 않은 인생인데 택시기사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정말... 말이 안 나온다독서의 목적,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생은 그 자체로 풍성하다. 책을 필요로 하는 인생은 평범하지 않고 고귀하다. 디지털, e-book이 등장하면서 종이책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e-book과 패드가 발달해도 종이책에 대한 효용성은 더 증대되고 있다. 이 책이 주는 촉감과 안정감을 e-book이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십만 권의 책을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아이패드로 즐겁게 독서하는 애서가와 십만 권의 책을 서재에 저장하고, 종이를 넘기는 애서가를 상상해 보라. 전자가 스마트에 보일지는 모르지만 지적(知的)이지는 않다. 종이 속에 숨 쉬는 책벌레가 하드디스크 속에서 달리는 스마트보다 더 유익하다. 나에게 십만권을 소장할 클라우드와 아이패드도 너무 필요하다.

 

택시기사인 내 꿈은 다른 택시기사가 운전하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주변 경치를 여유롭게 즐기는 거다.^^” 이런 멘트는 택시기사의 사치이고, 윗 사진에 있는 밀러로 보이는 석양을 보면서 만족하는 것이 애서가의 감동이다. 그 택시에 타는 사람에게 그 책의 향취가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거울에 보이는 사물은 실제보다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모든 문장에서 감동을 받아 보자. 시끄러운 문자 속에서 조용한 감동을 줄 문장이 우리 마음을 여유롭고 풍성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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