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말씀에 올라타는 사람들

이성호 | 2017.02.08 01:00
말씀에 올라타는 사람들

1.
자전거를 탈 줄 아시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무모한 도전을 해냈고 위험을 무릅쓰고 거듭 시도하고 감행하여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누구도 처음부터 그 괴상하고도 신기한 쇠뭉치에 걸터앉아, 자유자재로 달릴 줄은 꿈도 못 꿨을 겁니다. 우리 중 누구도 넘어지지 않고 단번에 몰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도 한 번에 올라타지 못했고, 무릎이 까지거나 부딪치지도 않고 단숨에 터득할 수는 없었습니다.

‘습득’이라는 저마다의 시간과 횟수의 공을 들여야 한손으로, 혹은 두 손을 놓고도 중심을 잃지 않게 되었던 겁니다. 부모님의 타이름과 친구들의 조롱 섞인 웃음과, 몇 번이나 비명을 지른 후에야 지금의 능숙함을 얻은 셈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위험해 분명히 다칠 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끙끙 앓았던 쑤시고 저린 밤들은 다 흐믓한 추억입니다. 

하지만 아직 자전거에 앉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겁이 나서도 그렇고, 굳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서질 않아서도 그렇지만 이유야 어떠하든 그 과정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자전거 타기’란 영원히 요원할 겁니다. 

2.
쉽게 동의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항상 새롭고 더 나은 방법 배우기를 원하는 존재였습니다.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동굴을 나와 오두막을 지었으며, 산 너머에 있는 바다를 보았고, 더 풍부한 요리 재료를 얻었으며, 새로운 땅과 다양한 인종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험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했지만 점 점 더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발명된 전화기는 아무 의미 없는 장난감 취급을 당했다죠? 영국 체신성의 수석 엔지니어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는 이미 완벽하게 소식을 전달하는 심부름꾼 소년들이 있습니다.” IBM사의 회장은 전 세계를 통틀어 컴퓨터의 수요가 다섯 대를 넘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킹 질레트는 남성들이 면도날을 한두 번 사용하고 버린 다음 새것을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칼날이 긴 구식 면도기를 대대로 물려받아 쓰던 친구들은 그가 미쳤다고 여겼습니다. 소방관들은 안전 후드가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채택된 1916년이 되기까지 턱수염을 길러 물에 적셔 입에 쑤셔 넣은 다음 매연이 가득한 건물로 뛰어 들어야 한다는 충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도 했습니다. 낙하산이 제대로 작동되기까지 많은 죽음이 있었습니다. 암의 치료법을 발견하고자 평생 실험한 끝에 마리 퀴리는 그로 인해 발병한 암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현대식 신문 인쇄기를 발명한 사람은 기계에 몸이 끼여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생활하기까지 수많은 용감한 개인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3.
이런 희생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독 있는 산딸기가 무엇이고,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무엇인지 알려면 용감한 누군가가 나서야 했습니다. 날 것으로 먹으면 죽음에 이르지만, 요리하면 먹을 수 있는 재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런 시도들을 했던 것일까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무슨 생각을 했고, 좋은 아이디어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혁신을 이뤄왔는지, 외면하고  비웃는 사람은 많으나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성경에 갇혀 있거나 들어서 아는 것으로 멈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을 단순히 복음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말씀을 보지만 마시고, 말씀을 듣지만 마시고, 말씀을 읽지만 마시고, 말씀을 사는 사람, 말씀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흔들리며 넘어지고 조금 미숙해 보여도 머지않아 잘 달릴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졌듯, 시대가 비웃든 혹평을 하든, 하나님의 말씀에 올라타고 달려가는 당신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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