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영생(eternal life)

강도헌 | 2017.08.14 19:35

영생

 

헬라어에는 생명을 말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비오스’이고, 다른 하나는 ‘조에’입니다. 조에는 내연적인(intensive) 생명을 의미하고, 비오스는 외연적인(extensive) 생명을 의미합니다. 비오스는 개역성경에서 ‘생활(living)’이란 말로 번역되면서 생명의 본질을 지칭하기 보다는 생명의 지속과 생명유지의 방편 및 수단이란 의미로 쓰입니다. 즉, ‘조에’는 생명의 핵심과 본질을 말하는 반면, ‘비오스’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및 생명의 껍데기를 의미하는 곳에 쓰입니다.

 

‘영생(조에 아이오니오스)’이란 말은 ‘조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3:15,16, 요한일서 1:1,2). ‘살아 있는’ 생명의 껍데기로서 ‘비오스’는 성경에서 생명의 본질로서 ‘조에’에 연결되지 않을 경우, 살아 있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살아 있는 존재에 불과한 겉도는 생명체의 유지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즉, ‘비오스’는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에너지로서 음식과 물질을 필요로 하는 육신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생식하는 힘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질과 생식에 집착하는 ‘비오스’적인 생명은 결국 사람을 거짓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본연의 가치인 ‘조에’가 없는 이생의 것들에 집착하는 생명을 껍데기 생명에 해당합니다(누가복음 8:14, 21:34).

 

그래서 비오스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카르디아)인 정서가 염려하게 되고 염려는 불안과 우울, 그리고 회의에 빠지게 만들고 종국에는 어리석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요한일서 2:16절은 비오스를 자랑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비오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염려에 빠지고, 많다고 자랑(사치, 과시)하는 자들은 어리석음(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부자)에 빠짐으로 모두 부질없는 껍데기에 생명 유지에 해당합니다.

 

영생(eternal life)에 해당하는 ‘조에 아이오니오스’는 요한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매개된 구원과 동의어입니다. 헬라어 사전에서 ‘아이오니오스’는 ‘영원한’, ‘우주적인’, ‘종말적인’, ‘신(Divine) 적인’ 등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인 ‘아이온’은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서의 ‘영원’(고린도전서 2:7),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누가복음 1:70, 사도행전 3:21), ‘코스모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마가복음 4:19, 히브리서 1:2). ‘아이온’은 시간적 연장선상에서 영원과 만나는 지점으로서 종말론적 위상을 가지기도 합니다(히브리서 6:2,5, 데살로니가후서 1:9, 베드로후서 1:11).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전우주적인 삶을 의미하고, 또한 질적으로는 신적인 삶으로서 종말론적으로 영원하고 무궁한 삶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생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시간의 폭을 넓혀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좁은 시간의 범주에서 사는 삶이 있는가 하면, 영원의 시간까지 시야를 넓혀 사는 폭넓은 삶을 사는 삶도 있습니다. 찰나적 쾌락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먼 미래를 보며 사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현재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의 일생전체의 폭을 고려하는 삶, 더 나아가 다음 세대와 그 다음 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며, 장소적 차원에서는 자기자신만을 위한 자기중심적인(egocentric) 좁은 삶에서 인류중심적인(anthropocentric) 삶을 넘어 우주적인(cosmic)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좇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의 성공과 잘됨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와 만물의 잘됨을 염려하는 ‘조에 아이오니오스’(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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