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독서는 권력(權力)이 아닌 권력(勸力)이다

고경태 | 2018.02.24 13:24

김하윤 교수(배재대)독서에 권력(勸力)하자는 에세이를 중부매일에 발표했다(20174). 그 글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조선의 책벌레조생(曹生)에 대한 내용은 재미있다. 조선 시대에 책은 권력(權力)이었다. 그러나 조생은 간서치(看書癡)로 권력(權力)을 추구하는 시대에 책을 권력(勸力)했다.

 

우리 사회도 학문을 숭상하는데, 목적이 권력(權力)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 같다. 사법시험 폐지를 사다리를 제거하는 수준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면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골방에서 몇 년 법률을 공부하는 것은 수직 사다리로 권력(權力)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갈망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독서를 권력(權力)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 조선시대의 비극이라고 생각하고, 그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은 순수(純水)를 지향하고 순수에 머물러야 할 가장 기본 분야이다. 그런데 그 순수한 가치를 권력(權力)의 방편으로 삼을 때 일어날 폐단은 상상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모든 계층이 권력(權力) 지향으로 점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勸力)하지 못하고 권력(權力)을 탐하고, 권력(權力)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호령하는 불편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자기 분야에 권력(勸力)하는 자가 사회에서 우대를 받아야 하는데, 권력(權力)을 가진 자가 숭앙받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 사회에는 자기 분야에 권력(勸力)하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권력(權力)은 항상 지탱하는 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고려가 왜 망했고, 조선이 왜 망했는가? 고려와 조선은 왕권 상실 때문에 망했다. 고려는 토지를 소유한 토호세력 때문에, 조선은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 왕권을 발휘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나라가 망해도 전혀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로 갈 때에는 백성들이 궐기를 하며 항전했다. 우리나라에서 주인이 바뀌는 것은 용납해도, 다른 나라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우리를 다스릴 권력(權力)은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그 힘은 국민 모두가 자기 분야에서 권력(勸力)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복지가 국민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복지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힘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 자각하지 않으면 국가는 존재 이유가 없다. 국민 없는 국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국민이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자기 분야에 권력(勸力)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독서권력(讀書勸力)에 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목적이 출세지향이나 취업방편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이제는 그렇고 더욱 그렇다. 공무원 합격이 인생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분야라도 자기 분야에 권력(勸力)하는 인생이 행복하고 의미가 있다. 그리고 독서에 행복이 있다. 한 가지 깨우침이 의미가 있다. 소유와 쟁취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환호한 선수들을 보라. 금메달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우리는 권력지향적인 것이다. 4년 혹은 10년의 땀을 보아야 한다. 의성마늘소녀, 컬링국가대표들이 그렇다. 그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컬링을 했고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현재 스타를 보지 말고 그들이 불모의 분야였던 컬링을 갖고 몸부림(勸力)했던 시절을 보자. 독서권력은 10년이 아니라 100년을 보아야 할 수 있다. 교육은 백년대계이다(百年之大計). 교육의 기본이 독서이다. 독서에 권력(勸力)하는 간서치(看書癡), 책벌레들이 많기를 기대한다. 아주 작은 분야에 권력(勸力)하는 숨은 인재들이 많기를 기대한다. 그들이 드러날 때 모두가 기뻐할 것이다. 교육의 달콤한 열매를 확인한다면 우리나라는 초일류국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시작과 마지막은 독서(讀書)이다. 독서에 권력(勸力)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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