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18)

채천석 | 2004.10.31 21:42

사람들의 마음에는 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가 하면 죽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죽고싶은 본능 가운데는 죽고는 싶으나 죽임은 당하고 싶지 않은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가 그렇습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 크게 승리한 사람입니다.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여 메마른 땅에 비를 내리게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크게 승리를 거둔 사람이 이세벨의 추적 앞에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살고 싶어서 도망한 사람이 이제는 죽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고는 싶으나 죽임 당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는 죽고 싶어합니까? 첫째로 열등감 때문입니다. 그는 "나는 내 열조보다 못하나이다"라고 자기 자신을 표현합니다.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무능력한 자기 자신을 책망합니다. 둘째로 승리감 뒤에 오는 허탈감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큰 일을 이룬 다음에는 허탈함을 갖게 됩니다. 엘리야가 바로 이런 문제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천사가 준 음식을 먹고 힘을 얻은 다음에는 그는 이세벨과 싸우러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호렙산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열심히 특심하오니"라고 자기 자랑을 합니다. 언제는 내 열조보다 못하다고 말하더니 이제는 자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심적인 불안과 조울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힘이 없을 때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음식을 먹고 힘이 났을 때에는 자기 자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은 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마음의 병이지요.

 

그뿐인가요? 그는 매우 고독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무도 없고 자기만 남았다고 여깁니다. 모두 도망갔고, 이세벨과 대적할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으니 너무 지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끊지 아니한 7,000명의 사람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엘리야는 휴식과 음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용기를 얻습니다. 내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세미한 음성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다시 힘을 얻습니다. 이 위에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너는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을 삼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그리고 너를 대신하여 엘리사를 세우라. 이 말씀에 엘리야는 벌떡 일어나서 사명을 완수하러 그곳을 떠납니다.

 

엘리야에게서 이런 변화는 어떻게 온 것입니까? 그에게 내적인 변화, 즉 영적인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존재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존재의 변화가 없이는 모든 일들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은 What are You doing이라고 묻지 않고 Where are You라고 물었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네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냐?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는 어떻습니끼? 낙심과 고독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입으십시오. 존재의 변화를 받으십시오. 존재가 변하면 내적인 능력이 생기고, 이 내적 원동력은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의 일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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