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토론을 위한 요한복음 강해 : 성령의 수여자 예수(7:37-44) 마지막

강도헌 | 2018.01.31 16:01

요한복음 7:37-44 성령을 주시는 자

 

지금 살펴 볼 요한복음의 이 본문은 대부분의 성도들과 설교자들이 38절의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는 말씀에 초점을 많이 두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성령에 관한 말씀으로 많이 인용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37절에서 “명절 끝날”이라고 요한복음은 언급합니다. 그리고 명절 끝날을 “곧 큰 날에”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명절은 초막절을 의미하고 초막절은 언약 갱신의 절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초막절 마지막날은 안식일로서 가장 큰 날에 해당합니다. 그 날에 예수님께서는 “서서 외쳐”(37절) 이르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37-38절) 이 선포는 요한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매우 독특한 표현이자 은유입니다. 39절에서 ‘생수’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는데, 요한복음은 성령에 대해 생수로 표현하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목마름인 ‘메시아 대망(갈망)’에 대해 ‘바로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생수=성령=메시아’라고 언급하셨을까요?

 

이것은 요한복음이 기록되어지고 그 요한복음을 읽는 당시 독자들인 교회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대략적으로 주후 70년(예루살렘 멸망) 이전까지 대부분의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순교하고, 그리스도교가 태동한지 한 세기가 되어가면서, 그리고 그리스도교 1세대에서 2-3세대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감이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성령의 수여자로 그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고대 2세기 교부들에게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생수의 근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처는 고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론을 다룰 때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흐르게 했다는 출애굽시대의 한 장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그 바위는 고대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았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린도전서 10:4) 출애굽의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교부들은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요한복음은 출애굽 내러티브로부터 나온 상징을 종종 즐겨 사용합니다(1:29의 유월절 어린양, 3:14의 놋뱀, 6:31의 만나, 6:16-21의 홍해 도하). 또한 반석에서 물이 나왔다는 주제는 시편 105:40,41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증하는 요한복음 6장과 7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과 ‘반석에서 나온 물’의 출애굽 내러티브 배열로서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길딩은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는 내용을 다루는 이사야 43:20, 44:3, 48:21, 신명기 8:15 중 여러 개가 초막절을 지키는 달에 회당에서 낭독하는 본문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7:38의 배경으로 인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또 하나의 중요한 구절은 스가랴의 두 번째 부분 14:8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푀이에는 요한계시록 22:1,17을 통해 요한복음과 스가랴를 연결시킵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레이몬드 E. 브라운, 앵커바이블 요한복음1)

 

그리고 요한복음 7:37,38과 요한계시록 22장의 배경으로 가장 주목되는 성경은 에스겔과 스가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계시록 22:2=에스겔 47:12, 계시록 22:3=스가랴 14:11).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강은 게스겔 47장의 강 상징을 재사용한 것이며 “생명수”는 스가랴 14:8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요한복음은 암시적으로나(2:16) 명시적으로(19:37) 스가랴서를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으므로 스가랴서는 요한복음의 배경으로 적합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생수의 강을 설명하고 있는 이 시점은 초막절의 큰 날(마지막 날)입니다. 초막절은 솔로몬 성전 봉헌식이 초막절에 이루어졌으며(열왕기상 8:2), 이것은 초막절의 중요성이 포로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 절기가 성전과 틀별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서서 외쳐 이르시는 것입니다. 또한 초막절은 “승리의 여호와의 날”과 관계가 있습니다. 스가랴 9-14장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야훼의 승리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가랴에 나타나는 여호와 날의 모습은 복음서에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들과 일치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초막절은 9월 말이나 10월 초에 해당함으로 고대 농업적 배경으로 기우제 성격을 가지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 비가 오면 풍성한 이른 비를 확신했으며 따라서 다음해의 풍작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10:1에서 비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있으며, 14:17에서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비가 없을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흘러넘칠 물의 샘은 초막절 기간 중에 하나님이 보내시는 풍성한 비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변론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40절),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41,42절) “예수로 말미암아 쟁론”이 일어났습니다(43절).

 

이러한 쟁론은 초막절에 성전에서 생수를 선포하신 메시지에 관해 혼란이 야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혼란은 바로 갈릴리로부터 온 선생이 성전 뜰에 서서 자신이 생수의 원천이라고 선포하셨는데, 스가랴 14:8은 생수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에스겔 47:1은 성전 아래에 있는 반석으로부터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생수의 강이 새로운 성전(2:21)인 예수님 자기 자신의 몸으로부터 흐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이 아니듯이(6:32) 반석에서 나온 물도 이런 양으로부터 흐르는 참 생수의 예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7:17, 22:1).

 

여기에서 ‘생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구약의 지혜문학에서 그 배경을 찾습니다. 요한복음 4:10-14에서 생수가 성령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나 가르침에 대한 언급임을 확인하였고, 이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구약의 본문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간단히 요한복음 7장 37,38절과 유사한 이사야 55:1의 초청만을 볼 때에도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는 이 구절이 지혜를 얻어라는 초청인 것처럼 생수는 예수님의 ‘지혜’,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쿰란과 랍비 사회에서도 생수가 율법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지혜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물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계시에 대한 상징이라면 39절이 밝히는 대로 이 물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실 성령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 5:7은 성령과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으신 피와 물을 결합하고 있습니다. “증언하는 이게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가르치심(물), 예수님의 죽으심(피), 예수님의 부활하심(성령)이 하나로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개의 메시아 사상

왜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에 대한 견해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을 까요? 서동수의 “유대교의 두 메시아 사상과 신약성서”의 논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것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은 유대인들에게 복잡한 메시아 사상을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세기 당시 유대교 안에서 믿어지고 있었던 메시아 사상은 세부적으론 복잡하였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과 비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입니다. 신약의 복음서에 다수 등장하는 다윗의 자손 예수는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본문에 해당하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2절)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신약성경은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적 관점에서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의 첫 출발은 시편 2편과 110편에 나타나는 제왕적이고 현세적인 정치적 메시아 관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가 이사야 11장에 와서 이상적 시대상이 강조된 종교적 특성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 상에 부가되고, 주전 7세기 말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예레미야 23:5-8에서는 후대에 도래할 공의로운 국가 건설자로 묘사됩니다.

 

비다윗계열의 메시아 사상은 다소 복잡하게 나타납니다. 주전 6세기 전반부터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은 퇴조의 흔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정치적으로 멸망한 다윗왕조의 몰락을 통해 왕과 제사장이 통치하는 미래의 이스라엘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34:23,24과 37:24-26에서 “내 종 다윗”이라는 호칭이 등장하지만, 이 호칭은 혈통적 다윗의 자손이 아닌 정치적 ‘이상적 다윗’으로 변경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주전 538년 고레스 칙령에 의해 주전 521년 바벨론 포로의 유대 귀환이 성취되었을 때 에스겔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가랴는 귀환 행렬에서 귀족의 대표인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는 도래할 왕적 메시아와 제사장적 메시아의 실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에스겔 43:18-27에서 사독계열의 제사장과 다윗계열의 왕을 언급하며 두 메시아 사상이 암시되어 있고, 스가랴의 다섯 번째 환상 4:11-14의 두 감람나무는 두 메시아 사상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속적으로 스가랴 6장에서도 두 메시아 사상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단일 구원자 메시아 사상이 현저하게 퇴조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후에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열게 되는데, 메시아의 기능이 단지 정치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적(이상적) 영역으로 확대 되는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메시아 사상은 쿰란의 두 메시아 사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4초인과 메시아 사상

또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는 또 다른 메시아 사상을 낳게 되는데, ‘초인’적 메시아 사상입니다. 이 초인적 메시아 사상은 크게 4명으로 나타나는데,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페르시아 시대 2명, 페르시아 이후 2명으로 설명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엘리야’입니다. 말라기 4:5,6에서 엘리야는 왕도 제사장도 아닌 선지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이전의 구약성경의 전승에서는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한 불사의 존재로서 종말에 이스라엘을 치유하기 위하여 천상에서 지상으로 하강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신약성경은 이 구약적 전통을 수용하는데 마가복음 9:11-13, 마태복음 17:10-13에 나타납니다.

 

두 번째로 초인적 특성을 지닌 인물로 ‘에녹’입니다. 구약성경 전통은 엘리야처럼 에녹의 승천기(창세기 5:24)를 알고 있습니다. 구약 유대의 전통은 그 에녹이 마지막 때 다시 지상으로 파송되어 계시의 전달자가 됩니다.

 

페르시아 시대 이후의 초인으로 ‘멜기세덱’이 나타납니다. 2에녹서 71:29에서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묘사됩니다. 마지막으로 ‘인자’인데 에디오피아 에녹서 비유의 책(37-71)에 등장합니다. 이 모든 초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서 출현하고 행동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기능의 소유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메시아

1-2세기 당시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을 살펴본 이유는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메시아로 보기가 너무나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다윗의 혈통에 두고 있지만,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다윗의 혈통은 정치적 메시아였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통해 다윗계열의 메시아가 이상적 시대상을 묘사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 또한 정치적 메시아이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정치적으로 실패로 보여졌고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비다윗계열의 제사장(쿰란공동체)의 메시아관은 정치적 성전중심에 반대한 예수님의 입장에 동조할 수는 있겠으나 쿰란공동체의 배타적(율법적) 성격에 반하는 새로운 가르침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으로 인해 비다윗계열의 메시아관을 가진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성령의 수여자

신약성경은 두 개의 메시아 사상에 대한 통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왕적이고 제사장적인 메시아 사상을 통합하려 하고 있고, 누가는 세례요한의 마지막을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 세례요한이 당시 제사장적 메시아가 아님을 언급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왕적이고 제사장적인 메시아로 통합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4개의 복음서가 동일하게 예수를 왕적이고 제사장적인 메시아로 통합시키고 있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수여자’로서의 메시아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초막절 예수님의 선포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는 선포가 가장 결정적 뒷받침을 해주는 대목입니다. 요한복음은 성육신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육신과 육신의 죽음을 초월한(에녹과 엘리야가 아님) 부활하고 승천한 메시아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수여하심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통치하시며, 또한 이 세상을 잘못된 정치와 죄로부터 구원하는 왕적이고 제사장적인 메시아직을 수행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44절에서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는 마무리는 성령의 수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두 개의 메시아 사상을 통합하고 있는 진정한 메시아 되심을 붙잡으려는 자들조차 수용하고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전통은 그들이 살아온 역사 한가운데 임재하시고 역동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과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이 경험한 하나님은 서로 간에 일치점을 가지기도 하고 차이점을 낳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차이점들이 모여 계시의 통합을 이루는 점진적 발전을 이루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도식을 가진 그리스도교에 대해 유대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관점에서만 율법을 해석하고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유대인들의 관점과 예상을 초월하는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관점 안에 갇혀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이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즉, 빛이 왔으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적 공방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간에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비록 완전하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약속된 언약의 성취자로서의 메시아임을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현세적(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유대의 메시아관을 초월한 그의 부활과 승천은 새로운 성령(생수)의 수여라는 새로운 메시아적 언약을 낳게 되었고,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정치적)이고 제사장(종교)적 메시아의 통치적 하나님 나라를 수행해 가고 있습니다.

 

비록 38절의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신 ‘그 배’가 시리아 교부들이 좋아하였던 ‘개개인의 성도’들인지 아니면 라틴 교회가 해석해 왔던 ‘교회’인지를 확정하려고 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속한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와 교회) 안에서 성령이 흘러나올 것을 약속하셨고, 우리가 이 땅(현실) 가운데서나 깊은 마음 속에서나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목마를 때 예수에게 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지혜, 가르침, 성령)을 수여하심으로 우리로 생수를 마시게하고 또한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생수(지혜, 가르침, 성령)를 이 세상에 흘려 보냄으로 하나님의 나라(공의)를 세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한자들의 통치와 제도로부터 해방되고, 또한 정의로운 인격과 인품으로 거듭남으로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음으로 우리의 안과 밖에 복된 구원을 이루는 메시아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 좀 더 원고를 정리하여 요한복음 강해집으로 출판할  계획이라 요한복음 강해는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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