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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11개의 헌금 봉투
11개의 헌금 봉투
1. <높은 뜻 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분립된 교회들 중 한 교회 목회자의 발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주일은 우리 교회에 헌금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공감을 넘어서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한국교회 헌금은 몇 종류일까?” 주일헌금은 물론, 감사헌금과 십일조 봉투는 따로 있겠고, 선교헌금, 여신도 남신도헌금, 장학헌금, 심방헌금, 생일헌금도 당연하겠고 각종 작정헌금과 건축헌금(?)까지... 헌금의 종류를 헤아리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다른 곳에 헌금하라고 할 게 아니라 그 헌금 숫자를 하나로 줄이면 어땠을까. 왜 안 되는 걸까요? 각기 다른 명목으로 걷지만 목적은 하나인데. 헌금 종류를 하나로 줄이면 교회가 망할까요? 그럼 망하라지요. 생각할수록 눈가림처럼 보여 차라리 불쾌했습니다.
2. 청빙을 받고 첫 예배를 드리던 작년, 부임 첫 달 교회정관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헌금봉투를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누구든지 어느 분이든지 주일헌금의 이유든지 십일조의 이유든지 감사든지 무엇이 되었던 우리 교회에서 봉헌하는 헌금봉투는 딱 하나입니다. 교회는 돈을 갈취하는 곳이 아닐뿐더러, 헌신을 명분으로 헌금을 늘려서 재정을 채우는 곳이 될 순 없었습니다. 저에 생각입니다.
무슨 프로그램이나 이벤트와 같이 할인을 남발하는 영업하는 곳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을 때 작을 수록 더 정직한 교회를 세워갑시다. 다르게 보고 바르게 합시다.”고 설득하기 무섭게 온 교우들이 화답합니다. 이런 교회도 있다는 것이 자랑일 수는 없겠으나 한국교회의 천박성이 엇나가도 너무 나가버렸습니다.
3. 무더위가 시작되기 직전 여름의 초입 7월의 둘째 주, 예배시간이 중간을 넘어선 시각에 한 부부가 다급히 참석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이전 교회 건물로 갔다가 돌아오느라 늦었다며 오후 모임까지 참석하신 이 교사 부부가 수요일에도, 그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계속 참석할 동안, 저희는 한 번도 전화를 묻지도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교우들에게도 당부하고 속으로 기도만 할 뿐입니다.
3주째 되던 주일, 공동식사를 마치고 부인되시는 여 집사님이 나가시더니 한 참후에 돌아오셨습니다. “등록카드 있나요?” 그동안 간절하던 교우들이 저보다 더 기뻐합니다. 두 분이 등록을 마치시곤 자신들이 그동안 섬기던 교회와 오늘까지의 일들을 나눕니다. 저는 간략하게 감사를 대신한 환영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4. 그런데 땀이 채 마르지도 않은 손으로 핸드백에서 주점 주섬 봉투 11개를 내려놓습니다. “목사님 그 동안의 저희 가정 십일조입니다. 교회를 정하게 되면 봉헌하려고 통장에 모아둔 것을 찾았습니다. 헌금함이 잘 보이지 않아서...” 함께 앉아있던 교우들 한 분 한 분 눈이 젖어갑니다. 저도 목이 메는 걸 참았습니다. 그 부부도 참 어지간합니다. 봉투 11개, 십일조 11개월분.
지금도 헌금 봉투는 하나지만 앞으로도 끝까지 하나로 갈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는 신앙고백인 줄 믿습니다. 고백은 강요되거나 경쟁이 될 때, 진의를 상실합니다. 그 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공명심입니다. 교회가 그 짓을 부추겨서 되겠습니까? 저는 쪽팔려서 못하겠습니다.
결국 더위가 힘을 잃어 제법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납니다. 모처럼 시원한 잠자리 이루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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