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나는 십자가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십자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고안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처형이었다. 로마는 자신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그들의 법에 불순종하는 국가적인 반역자들에게 이 형을 선고한다. 평범한 죄수에게는 선언하지 않고 국가수범에 해당하는 흉악한 죄인에게 내리는 벌이다. 그래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를 처형함으로 로마의 권력을 보여주고 황제에게는 절대 순종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유대교에서도 신명기 말씀에 근거하여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법이 있었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들의 종교를 흔들고 체제를 허무는 자와 외세의 힘을 빌려 민족을 위협하는 자는 나무에 죽인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와 헤롯이 전에는 원수였으나 예수님의 사형에서는 하나가 되었듯이, 로마의 심판을 지지하며 예수님을 향해 자신들의 종교와 신앙으로 십자가 죽음을 적극 찬성한다.
이렇듯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와 죽음의 상징이다. 고대 앗수르에서 패잔병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공포의 도구가 로마까지 이어져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사형 제도가 되었다. 유대교에서도 율법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자가 죽어야 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이런 죽음의 십자가가 오늘날은 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고대 십자가의 이미지와 오늘날 십자가의 이미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인데 이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너무 깊고 풍성하다.
위에 글은 필자가 알고 있었던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인 내용을 적은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신학적인 내용을 서술한다면 속죄의 의미를 부각할 수 있겠고 치유와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십자가와 관련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는 십자가의 신학적인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기술하기 전 십자가가 무엇이었는지 역사의 기록과 흔적을 보여준다. 신학적인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는 그 기반이 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십자가 처형에 대한 보고를 읽으면 그 현장이 정말 처절하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직하다. 그 고통은 지옥의 공포를 느낄 정도이고 그 수치는 차라리 죽음이 나을 정도이다. 죄인을 바로 나무에 매달아 못을 박는 것이 아니다. 나무에 달기 전 살이 뜯겨지고 뼈가 드러나도록 심한 매질을 하고 그 다음은 자기가 매달릴 나무를 짊어지고 사형의 현장까지 걸어가게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의 지치고 불쌍한 모습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인물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알고 있던 십자가의 역사적인 의미는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저자는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고대의 소설과 신화와 법과 공적 문서 등을 통해서 다양하게 설명한다. 로마시대에 이 형벌은 고위직은 피할 수 있고 반역자들과 노예들에게 해당하는 줄 알았는데 모든 계층에게 다양한 이유로 적용이 되었던 것이다. 가장 큰 고통과 모욕이지만 또한 가장 큰 수치를 주기 위해 나무 위에 매달아 조류의 먹이가 되게 하기도 하였다.
고대세계에서 이 십자가 처형은 놀라우리만치 널리 시행되었고 가장 잔인하고 지옥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처형임에도 불구하고 약화되기는커녕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고위직은 물론이거니와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에게 시행되었다. 나라의 기강과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범죄억제 및 예방을 위해서도 시행되었고 백성들의 잔인함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베풀어지기도 했다. 마가복음 15장에 기록된 대로 어쩌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를 십자가에 넘긴 것은 무리들의 피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런 흉악한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혀 죽은 것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고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한 것은 단지 아버지와의 영적단절이 괴로워서가 아니라 이토록 잔인하고 극악한 형벌이기에 그것을 감당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신이지만 인성을 지녔기에 너무 버겁고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그 나무에 달려서 당해야 되는 수치와 조롱과 멸시 또한 스스로 저주받은 자라고 인정해야 되는 것이니 가혹한 현장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세계에서 십자가는 이렇게 처절하고 참혹하고 저주를 상징하는데 기독교의 십자가는 어떻게 생명의 상징이 될 수 있었을까?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광이 없으며 십자가 없이는 신령한 생활은 없는데 우리는 십자가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했는데 이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를 보며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고 성도는 그것을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이다. 십자가를 알아야 구원을 알고 은혜를 알아 성도답게 살 수 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현존을 인식하고 깊이 회개하여 성도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질문해 본다.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고 회심한 사람들인데 우리에게 그런 경험이 있는지 점검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두려움이 없으니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하며 교만하게 살게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구경하는 물건이 아니고 호기심으로 달고 다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수치와 조롱과 지옥의 고통을 감당하며 죽은 곳이다. 그 피흘림으로 인해 우리는 깨끗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고 모든 이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였는데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놀라운 복을 받은 사람이 된다. 사도들은 이 십자가를 두렵고 떨림으로 전파하였고 그 복음전도로 인하여 십자가는 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 나는 십자가를 어떻게 알고 있고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잔인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주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오늘 나는 그 십자가를 방관하고 있는가, 울며 따라가고 있는가? 성도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인데 죽음의 경험 없이 모두가 가짜로 살아있는 것 같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이 될 뿐이고 자기자랑과 의만 드러날 뿐이다. 모든 저주를 짊어진 십자가, 오늘 나는 그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