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최후의 심판이 있다
최후의 심판이 있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백보좌 심판이라고 불리는 심판은 반드시 있다. 최후의 심판에서 행위의 역할이 어떤가하는 논쟁도 필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 더 강조되어야 될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논쟁이 생기는 것은 자신의 죄를 가리고 구원을 보장하기 위한 꼼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행위에 대한 책임과 심판을 흐릿하게 하여 자신의 죄책감을 가리기 위한 이기적인 성격해석 같다.
책에서는 크고 흰 보좌 심판에서 행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논쟁하고 있다. 각자의 신학을 따르는(세대주의, 개혁주의, 새 관점, 가톨릭) 4명의 기고자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다른 세 명의 학자가 논평하는 방식이다. 각 기고자가 성경을 따라 믿음과 구원과 행위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다. 각자가 다른 주장을 하는 것도 있고 같은 주장을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글을 읽으며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기존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아쉬움이 보인다. 믿는 자에게는 어떤 심판도 없다고 하여 특혜를 주는듯한 편협한 해석과 주장도 보여 눈살을 찌푸린다.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놀라운 이신칭의 교리를 협소하고 제한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제 사라져야 할 논리이다. 종교개혁의 가치와 정신을 모르는 주장이고 루터의 신학을 훼손하는 것이다.
은혜의 우선성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필자는 각 저자의 주장과 논지를 요약하고 서로의 강점과 약점을 설명하기보다 이 책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서술하고자 한다. 우선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위보다 은혜가 먼저 역사하고 작용한다. 사람의 의지와 결단이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의 심령 속에 심겨진 믿음이라는 것은 자생적이지 않고 하늘에서 주어지는 선물이며 성령님께서 심어주시는 열매이다.
즉 복음서나 야고보서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구원에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무효화시키고 구원을 인간화시킨다. 인간에게 허락되는 놀라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은혜의 역사로 존재의 변화와 삶의 변화가 나타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힘과 은혜의 역사를 발견하지 못하고 행위로 치닫는 가르침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을 훼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의미를 궁핍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믿음은 기계적이지 않고 계산된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 믿음은 진공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다양한 관계를 맺어서 가변적이다. 그래서 큰 믿음을 발휘하여 행위가 활발히 일어나기도 하고 믿음이 약해져서 행위가 미비할 때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다. 마른 나무 가지에 수액을 줘서 열매를 맺으려는 시도가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그 나무에 수액을 공급하는 것이 믿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은혜의 우선성을 놓치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과 은혜가 초라해지고 보기 흉한 인간의 바벨탑만 솟아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필연성
성도의 생애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강조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을 왜곡하고 편협하게 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루터도 칭의를 통해 아름다운 행위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진시켰지 결코 행위와 삶을 배제하지 않았다. 종교개혁 당시 공로와 신비와 업적을 강조하는 가톨릭에 반대하여 믿음이 강조되었던 것이지 결코 인간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삶을 무시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행위로 증명이 된다. 성도가 받은 은혜는 존재와 삶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스며들게 되어 있다. 믿음은 구원의 기초지만 삶은 믿음의 열매이고,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삶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이지만 삶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믿음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지만 삶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즉 믿음은 삶으로 반드시 연결되어진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짖는다. 구약에 나오는 이방의 왕들도 천지의 주재시고 왕중의 왕이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 신약에서 거짓선지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가짜이고 이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믿음은 삶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편지이고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우리의 믿음이 지금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는 늘 점검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본질
믿음의 본질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대를 피할 수 있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주님께서 행하셨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시하신 삶으로 행하는 동력이다. 그러니 서구신학의 영향만 받아서 지식적으로 멈춰버리는 믿음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는 삶이 되어야한다.
믿음의 본질은 성도에게 심판대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대를 더 생생하게 경험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믿음은 구원과 심판과 관계없이 살게 하지 않고 오늘을 그날처럼 살게 하는 종말론적인 역할을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이 우리가 가진 믿음과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 아뢰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몸으로 행한 것을 다 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믿음의 본질은 심판대와 직결되어 있고 우리에게 경건하게 살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믿음은 성도의 행위를 돕고 성도의 구원을 위해 일한다. 우리의 믿음에 십자가가 묻어나지 않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운 흔적이 없다면 내가 만든 믿음일 수 있다. 우리의 믿음에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과 눈물과 헌신이 없다면 십자가 위에 예수님만 믿은 것일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의 위에 있는 예수님만 믿어서 속죄와 심리적 안정과 치료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지기까지 삼위의 하나님의 협약과 이 땅에 오신 성육신과 주님의 세례받으심과 모든 사생애와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역동적이겠는가....
결론
끝으로 이 책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도움 받을 수 있고, 각자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출판사와 저자와 편집자의 의도와는 벗어날 수 있지만) 최후 심판대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심판대를 바라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하나님 있다고 믿으면서 심판대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네 명의 저자의 뛰어난 성경인용과 화려한 논증을 보는 것도 볼거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의 행위는 어떠한지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은 이 딱딱한 책이 주는 또 다른 은혜이다. 믿음과 행위와 상급과 보상 등 우리가 성경적으로 신학적인 내용을 정리해야 될 것이다. 이 책은 그 정리를 도와주게 될 것이고 자신이 어느 위치에 가까운지도 점검하게 해 줄 것이다.
사탄은 심판대 앞에서 항상 우편을 차지하려고 발버둥친다. 그래서 우리를 향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벌하시라고 정죄하고 고소한다. 그러나 그 옆에서 이는 불에 그슬린 나무라고 하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십자가와 무한한 사랑을 떠올려 본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행위는 주님의 긍휼 앞에 초라할 뿐이다. 너무나 큰 은혜 앞에 너무 작은 내 모습이 작아질 뿐이다. 주님 앞에 참된 믿음으로 선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길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