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나는 사변하느니 차라리 경배하리라
나는 사변하느니 차라리 경배하리라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근본조항과 비근본조항이 있는데 전자는 기독교의 서고 넘어지는 분수령과 기준이 되는 교리이고 비근본조항은 성경을 따라 각 교단이 원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비교적 열려있는 교리이다. 그중에서 삼위일체는 바빙크의 표현대로 기독교의 심장과 본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하여 신학(기독교)이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 진행되며 하나님으로 귀결되니, 모든 신학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방의 교부들은 삼위일체가 신학이고 나머지는 거기에 포함되는 경륜으로 보며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행동(구원사건)에 절대적 우위를 두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삼위일체는 어렵고 사변적으로 여겨진다. 실제 어떤 학자들은 삼위일체는 기독교와 복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라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는 인간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추상적인 진술이고 하르낙은 그리스 신화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런 신학자들의 신성모독적인(개인적인 느낌) 발언이 있듯이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도 삼위일체에 대한 첫 인상은 어렵다는 것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대상을 바르게 알아야하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고 성장하고 인격의 변화와 성숙을 향해 갈 수 있는데 어쩌다 우리는 이 삼위 하나님을 어렵다고 단념해 버린 것일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독교의 본질과 심장인 삼위일체를 교회와 우리 마음속에 뿌리 내리고 더 충만하게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불가지론과 불가해한 영역으로 밀려난 이유가 무엇일까? 이 원형신학의 기원과 형성과정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시대에 이 심장과 같은 교리는 교회와 사회를 향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와 내재적이고 경륜적인 삼위일체와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우리가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현대 교회 안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반이성적이고 몰이해적인 현상을 반성하고 있다. 유일신론적으로 이해되어 왔고 은연중에 양태론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우리의 신론에 커다란 광명을 던져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바르게 알 때 찬양 받으시고 우리의 존재가 변할 때 영광 받으시는데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가득하게 만든다.
사고의 전환
필자는 이 책을 통해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특징을 세 가지로 나타내고자 한다. 우선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사고 전환 및 혁명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고 저자 또한 여기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는 교부들과 공교회의 정교한 연구와 체계적인 진술로 정립된 후 가르쳐 진 것이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초대 교회 예배 속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기도와 찬송을 정확한 논리로 설명을 붙인 것이 삼위일체지만 그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심장과 본질은 초대교회의 하나님 체험과 구원 경험을 통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즉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과 위대한 사랑을 경험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공동체에 임재하셔서 예배 때마다 십자가와 구속의 의미와 그분이 말씀하셨던 진리를 기억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너무나 생생하게 체험한다.
또한 성령님의 현존하시는 은혜와 체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와 그의 아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게 되고 공동체와 지체들을 하나로 묶으셔서 생명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며 현재적이고 반복적인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교회와 학자들의 탁상공론으로 시작하고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결코 교회 안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반이성적이고 몰이해적이며 사변적이고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배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존재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에 대한 진리를 고백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사랑과 구원과 보호의 손길을 찬양과 경배와 송영으로 높여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삼위일체가 신학자들과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삼위일체는 예배와 송영을 위한 것이고 성도들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이해와 체험과 삶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부족한 이해를 수정하다
두 번째는 이 책은 삼위일체에 대한 여러 가지 부족한 이해를 수정한다. 우선 삼위일체 교리는 일반 성도들에게 전제군주적인 이해가 보편적이다. 그 이유는 서방 교회의 삼위일체 기원과 형성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한 후 하나님의 속성을 살피고 이어 삼위일체를 증거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우위성이 강하고 짙다. 이어서 이런 영향은 계몽주의와 연결되면서 하나님의 유일신적인 개념이 보편화 된다.
이런 유일신적인 인식은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의 철학과 신관이 반영된 개념이다. 만물과 생명의 근원이 되는 부동하는 일자로부터 만물이 출생하게 되었다는 그러한 종교적 문화적 그리스 철학과 신관이 계몽주의를 거쳐 지금까지 커다란 그림자로 흘러오게 된 영향이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어긋나는 일신론적인 현상이 왜 지금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고 바르게 수정한다.
그리고 그동안 삼위일체의 위치는 신론 자체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신론의 부록 격으로 가르쳐지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그리고 삼위일체를 다루는 이런 신학적 위치의 특징은 어거스틴으로 시작해 아퀴나스에서 절정에 이르고 이후에도 지성사의 흐름을 따라 가르쳐져 왔다. 이렇게 한 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리 밑에서 삼위가 다루어지니 인간과 세상과 관계하시는 구원사적인 측면이 약화되고 사변적으로 흘러왔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자신의 “교회교의학”에서 삼위일체를 맨 앞에 위치시키고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신앙론”에서 맨 마지막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이 두 가지도 부족한 이해인데 전자는 삼위일체를 다른 교리들로부터 고립시키고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의 전제적 선취로 축소시키게 된다. 후자는 신학의 마지막에 위치했다고 종합 및 요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리들 중 가장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저자는 독일의 신학자 빌프리트 예스트의 제안을 따라 서방 교회의 이해에 따른 신학구성과 삼위일체 이해가 아니라 성부론, 성자론, 성령론을 차례로 다룬 후 그것들의 토대 위에서 삼위일체를 다루고, 이어 그 삼위일체의 토대 위에서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등을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교의학과 삼위일체에 있어서 부록과 축소의 위험을 벗어나 바르고 풍성한 이해에 적합하다.
그리고 1970년을 넘어서면서 삼위일체의 르네상스가 발생하는데 몰트만, 보프, 라쿠나 등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 삼위일체론은 단지 내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형과 삶이라고 한다. 그중에 니콜라스 페도로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우리의 참다운 사회적 프로그램이다”라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주장하게 된다. 세 위격의 일치성과 다양성과 연합과 친교를 통해 존중과 수용과 환대와 사귐을 배울 수 있고 이런 것이 인간과 사회 가운데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페도로프의 주장이 세 위격의 일치성과 사회적 일치성 사이에 엄존하는 경계선을 무시하고 전자를 후자에 투영한 것이라 본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엄격한 선이 있는데 전자를 후자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일 뿐이라는 것이고 결코 짝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페도로프의 주장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인간과 만물과 사회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이상적 사회를 그려가기를 제안한다.
차이를 설명하고 균형을 잡다
책에서는 지금까지 논의되어온 삼위일체의 궁금증과 어려움을 해결하고 이것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도와준다. 그중에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에서 이해되어온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다. 동방의 삼위일체는 동방의 세 교부에 의해서 정교하게 성립되는데 세 위격의 구원 경륜으로 시작하여 어떻게 삼위가 하나됨을 이루는가를 설명한다. 즉 세 위격을 먼저 강조하고 상호간의 사귐과 연합과 하나됨을 다룬다. 이것은 현대에 와서 사회적 삼위일체의 밑바탕이 된다.
이에 반해 서방은 어거스틴에 의해 개진되고 아퀴나스에 의해 정교하게 성립되어 오늘날까지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가르침인데 먼저 하나의 본질을 다루고 세 위격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즉 한 분이신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을 전제하고 이 하나님이 어떻게 세 위격으로 존재하고 활동하는지 설명한다. 이 한 분 하나님이 삼위의 신성의 기원과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완벽한 삼위일체라 하기에는 부족하다. 동방의 경우는 성부에게서부터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말하게 되니 삼위일체의 내적 구성에 있어서 성부의 전제군주적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다보니 어거스틴은 동방의 삼위일체에서 종속론의 위험을 발견하고 비판한다. 서방의 경우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것을 너무 강조하니 이 하나님의 본질이 양태로 나타난다는 위험이 발견되어지고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동방이 종속론을 강조하기 위해 성부가 신성의 근원이 된다고 강조한 것도 아니고 서방이 양태론을 강조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이 신성의 근원임을 강조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동방과 서방은 종속론과 양태론을 거부하고 삼위일체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대치되는 게 아니라 상호보완적이고 이 둘의 방식은 동방과 서방이 분열되기 전에 이해되었던 공동의 고백이다.
그리고 이 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방에서는 종속론에 대항하는 “페레코레시스”- 상호 침투, 상호 내주, 상호 사귐으로 세 위격의 동등함을 설명한다. 즉 삼위가 서로에게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받아주고 내어주는 친교적이고 연합적이다. 서방에서는 양태론에 대항하는 “아프로프리아치오”-전유 교리이다. 즉 창조와 구속과 성화에 있어서 세 위격의 전유성과 개별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와 균형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본질적인 삼위일체로서 창조 전부터 존재하셨던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안으로부터의 존재와 사역을 다루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내용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창조와 구원 역사에서 드러난 삼위 하나님의 사역과 활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밖을 향하여 활동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역동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이고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에게 익숙하게 가르쳐진 것은 그리스 철학과 신관의 그림자 아래 내재적적인 삼위일체이다. 고전적인 견해는 이 둘을 구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 없다고 하지만 구분이 강조되다 보니 분리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인간과 세상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적 신비를 파악하려는 관념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삼위일체가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흐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성과 역사성이 약화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칼 라너는 “라너의 법칙”이라고 불리우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다”라는 명제를 세운다. 그리고 이 진술은 몰트만, 판넨베르크, 라쿠나, 보프, 지지울라스 등이 수용하여 내재와 경륜을 분리하는 고전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삼위일체를 구원의 역사 속에서 경륜적으로 먼저 보아야 한다며 기존의 고전적인 견해를 수정하고 심지어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종말적 완성(몰트만, 판넨베르크)이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없다고까지 한다(핸드리쿠스 벌코프, <구원사건의 구조에 대한 묘사>, 에베하르트 윙엘<경륜의 개념화>, 라쿠나<구원역사의 내적구조에 대한 설명>).
그러나 이 주장도 온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성경적으로 창조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적으로 선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강조를 통해 역사와 사회와 인간에게 침투하고 참여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고 삼위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기반이 되는 내재적인 삼위일체를 축소하고 폐기하게 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로스키나 홀스트 게오르트 푈만은 경륜에 대하여 피조물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삼위이셨다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독자성이 확보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인식론적 관점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 내재적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존재론적 관점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가 나왔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여기서 내재와 경륜 사이에서 온전한 균형을 찾아야 하는데, 바로 칼 라너의 명제가 수정이 된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보다 크다.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으며, 더 부요하다”는 명제이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다”라고 하게 되면 존재적으로 우선이 되는 전자가 후자로 축소되고 폐기되며 하나님이 세상에 종속되는 오류가 발생하고 그분의 자유와 통치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결론
필자는 이 책 한 권을 통해 그동안 잘 이해되지 않았던 삼위일체의 기원과 역사와 그 형성과정 등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어서 참으로 유익했다. 물론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거울로 보는 듯 희미하게 파악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안다 한들 그것은 어거스틴에 관한 이야기에 나오듯 해변가에 구멍을 파서 바닷물을 담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나그네의 신학이 멈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알아가는 하나님의 지식은 한 순간의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와 관계하셔서 역사하시고 우리의 삶에 들어오셔서 구원하시는 역동적인 지식이다. 이 하나님의 지식은 결코 무시간적이고 무역사적이고 무공간적이지 않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다고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과 세상을 향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이고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 때 예배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에 참여하며 성령님의 현존가운데 거듭되는 충만함을 통해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였듯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구원하시는 삼위 하나님으로 가득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하게 된다. 지금도 치유와 건짐과 구원의 손을 펼치시는 경륜의 하나님을 보며 내재의 하나님으로 나아가 우리의 교회와 삶의 삼위의 하나님으로 풍성해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