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걷기를 되찾다
나는 지금 현재 걷기를 정말 싫어한다. 물론 원래부터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지금도 왠만한 곳은 걸어서 가려고 한다. 그러나 등산이나 산책과 같은 목적지가 없고, 목적이 없는 걷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아내가 가자고 하면 같이 간다. 아내가 나는 무척 좋기 때문이다). 나란 사람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걷는 것 하나에도 비논리적이고, 복잡한 정서와 행위가 뒤엉켜 있다. 그렇다 나는 의식적으론 ‘걷기 싫다’가 현재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론 걷는 것이 싫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걷기에 대해서 나 자신을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걷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군생활 하면서 두 번의 천리행군을 하면서 생긴 것 같다. 그 이전에는 걷기가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원래 운동을 좋아했고, 잘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 놀리는 걸 가급적이면 피한다.
그런데 요즘 ‘걸어 볼까?’라는 생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가족들은 체중을 좀 줄여야 된다고 오래전부터 아우성이었다(그 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님 지금 딱 좋아요”라고 말해 주신다. 그래서 이 부분에 있어서도 나는 가족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 내가 편한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걷기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이다. “아! 걸어 볼까?” 생각을 넘어 이것이 마음으로 느껴질 때 스스로 내심 놀랐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나는 어떤 유혹이 와도 걷기를 싫어할 것임을 나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걷기에 대한 호기심
나는 스스로 이제 순수함을 넘어 노련함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이미 속물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좋게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스토아 철학자들과 불교, 힌두교 고승들이 추구하였던 ‘아파데이아(평정심, 무념무상)’의 한 발치 앞에 다다른 자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즉, 남의 말을 지독히 듣지 않는 완고한 자이다. 상술이나 ‘카더라 통신’ 등에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걷기를 싫어한다고만 알고 있는 나 자신 안에 걷기의 욕망이 함께 있었다는 새로운 부분을 발견케 해 주었고, 또한 이 책의 어떤 부분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욕구를 불러 일으켰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는 책이다. 이 부분은 지금도 살피고 있는 중이다.
목적 없이 걷기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는 30대까지 매우 목적 지향적이고, 목표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능력은 있는데, 인간미는 없는 사람이었다. 뭐든지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물론 지난 시간의 삶에 대한 후회는 없다. 융이 언급한 인생의 발달과 충족 주기에 딱 맞는 삶을 살았고, 나의 자녀와 청년들에게 30대까지는 목표지향적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목표를 제거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도 나중에 보니 40대 이후의 삶은 목표를 성취하는 기쁨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가까운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마음과 삶에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감과 충족감을 느낀다는 심리학적으로도 매우 일치된 인생의 주기에 해당함을 발견했다.
이 책 안에는 ‘걷기의 철학 = 속도의 철학 = 과정의 철학 = 현장의 철학 = 행복의 철학 = 창의의 철학’ 등이 녹아있다. 나는 이 책에서 특히 시속 3마일에 강한 각인을 받았다. 물론 걷기는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인체를 설계하고 만드신 속도이다. 즉, 인간의 시간은 ‘걷기의 속도’인 ‘시속 3마일’로 흐른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철학자, 사상가들뿐만 아니라 영성가들도 ‘걷기의 달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래서 개신교회에서는 잃어버렸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걷기’는 다양한 방법으로 영성수련에 사용되어졌다. 현대 대부분의 한국개신교회가 철야기도, 통성기도 등에만 집중함으로 인해 ‘자기 욕구’와 ‘자기 목표’에 집중되어, 다분히 신앙이 기복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기복중심적 기도(중보기도조차 매우 현실적 기복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의 대안으로 ‘걷기의 기도’와 ‘걷기의 묵상’은 자신을 성찰하고 발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적 기도를 하는 방법으로 매우 유익하다. 이러한 관계적 기도가 훈련이 되었을 때 침묵기도에서도 더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목적 없이 걷는다는 것은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며 모험적인 걷기이다. 효율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적 사고에서는 매우 낭비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은 ‘자연’과 ‘두 다리’이다. 자동차와 높은 마천루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항상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은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자동차 드라이브를 통해 쉽게 목적지에 돌아 볼 수도 있겠으나, 목적 없는 시속 3마일의 걷기는 그 길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존재들의 만남과 소통은 우리에게 창조적 영감을 준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이 책을 읽고 3주째 매일 40분씩 천천히 걷고 있다(사실 4주를 채우고 쓰려다가 조급함을 이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