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공공신학의 문을 여는 책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공공신학과 현대정치철학의 대화'를 읽고
좋은 책을 접했는데 소개하기 위해 리뷰를 쓰려다가도 어떻게 소개할지 난감하고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런 어려움은 각각의 책에 따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분야에 대해 내 전문지식이 부족함 때문이기 일쑤고 워낙 지식이 미천한 내 자신의 한계의 경우가 많다. 관심 있고 나름 설익은 선지식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그것을 논할 기본바탕과 체계적인 지식이 없기에 논하고 평하기에는 내 오만함과 책의 주제에 대한 왜곡만 드러내가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글을 서평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읽은 소감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번에 읽은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공공신학과 현대정치철학의 대화(최경환, 도서출판100)’도 그러하다. 8, 90년대를 거친 386 세대로서―이미 30대는 지났지만 그 지식과 기능은 아직 386 pc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는 386세대란 말이 내게는 어울릴 듯 싶다―암울한 한국 사회현실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사회참여에 대한 책들에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던―실천 없이 책만 몰두―한 개인으로서 군부정권과 독재정권의 낙진과 피폭을 답답해하는 삶을 살았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돌아보니 그래도 그런 속에서 정치와 사회는 변화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변화 때문일까? 이전에 비하면 강한 투쟁과 구호와 최류탄으로만 가득했던 거리는 시위도중에도 유머와 질서, 차분함이 차지함을 보게 된다. 과거에 외국학자에 의해 쓰여진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정치관의 책을 볼 때마다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토대 속에 쓰여진 그들의 책이 당시 우리 현실에 접목시키기에는 많은 괴리를 느끼곤 했는데 이젠 우리나라와도 그 거리를 줄여가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기독교에는 기독교 사회참여보다는 공공신학이라는 좀 더 순화되고 사회체제 속에서 함께 가는 듯한 공공신학이란 말이 그 영역을 넓혀가는 듯 하다. 로날드 사이더나 제임스 사이어의 자리를 이젠 미로슬라브 볼프가 그 대중성을 넓히며 자리하는 듯 싶다.
그렇지만 뭔가 공공신학이라는 말은 모호하고 개혁적 주체로서는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이번에 나온 최경환의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공공신학에 대한 개론적인 답변과 길을 보여준다.
공공신학이란 말이 갖는 의미와 그 정의를 정함에서 나타나는 영역들을 소개하고 그 공공신학이 우리 현실에서 갖는 위치와 의미를 보여준다. 또한 그 공공신학의 역사와 발전과 논쟁과 중요한 화두를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서 잘 담아내는 책이다.
특히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의 부제를 ‘공공신학과 현대정치철학의 대화’라고 기술한 것처럼 이 책은 공공신학이 정치철학과 신학과의 관계성과 교류를 보여준다. 예컨대 공공신학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사회의 체제 내에서 일부 모순과 오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체제 순응적이고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듯해 보인다. 하지만 ‘공공’이란 말 자체만 본다면 그럴 수 있지만 그 ‘공공’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에 ‘신학’이 더해진다면 그것은 부분적 변화가 아니라 그 공공성에 있는 사회와 사람들을 정의하는 방법이 단순히 사회이론이 아니라 성경과 기독교 세계관으로 재해석해나가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그 근간을 흔들고 뒤집어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관점과 철학을 넘어 하나님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 나갈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정치신학과 유리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신학은 어떤 것일까? 신학과 교회가 지나치게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신본정치라는 이름하에 정치를 흔들고 교회 밑으로 두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정치에 교회가 종속되는 문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 광화문에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히틀러에 굴종했던 목사와 교회의 부끄러운 기록도 본다. 그들도 어떤 형태로건 간에 정치신학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그런 정치신학의 왜곡과 부정적인 면을 본다고 해서 정치신학을 멀리한다면 결국 그것도 썩어가는 환자의 환부의 상처에 대한 치료는 외면하면서 일회용 거즈만 갈아대는 역할을 공공신학은 행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그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우리 현실을 공공신학을 행해나가면서 풀어갈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은 그에 대한 답변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맛보기와 길을 보여준다. 이것은 저자의 한계나 책이 불충분하기보다는 이 책의 역할이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기 위한 인도자의 책무로 한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미로슬라브 볼프가 ‘광장에 선 기독교’를 쓴 후 그 실천 편으로 ‘행동하는 기독교‘를 쓴 것처럼 전자의 역할을 이 책은 하는 듯 하다.
물론 저자가 그 후속작을 쓰고 있는지 또는 쓸 것인지는 나는 알지 못하지만 설혹 그가 담고 있는 생각과 마음을 책이란 매체로 가시적으로 내어놓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로 우리를 이끌었고 또 누군가는 그 길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가야할지를 보여줄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책은 좋은 책이지만 내 지식의 미천함으로 이 책을 평하거나 논할 재주는 애초부터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읽는 이들에게 유익함을 더해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고 또 한국교회의 무진기행 같은 현실 속에서 하나의 빛을 더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