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울타리를 없애라
울타리를 없애라
익히 알고 있겠지만 ‘노마드’란 말은 ‘유목’, ‘유목민’을 지칭하는 말이다. 노마드의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제 3의 물결”을 쓴 앨빈 토플러이다. 그 책은 1990년대 초에 한국어로 번역된 걸로 기억한다. 그 책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시간과 공간이 짧아지고 좁아진 포스트모더니즘적 경제와 사회 문화에 대한 예견서였다. 거기서 지구는 점점 더 좁아질 것이고 지역간의 이동이 빨라지고 활발해지며, 기업과 문화 등이 더 이상 지역적인 국가의 경계선에 제한 받지 않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동’, ‘활발한 교류’,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음’, ‘패러다임의 급변’ 등을 의미했다. 그러면서 노마드라는 개념이 다양하게 파생, 파급되었다.
본서의 제목이 왜 “노마드 교회”일까? 노마드 교회는 어떤 의미일까라는 궁금증으로 본서를 읽어 갔다. 그리고 15장에서 “노마드 교회”라는 제목의 글을 만나게 되었다. 저자의 의도와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해하기로 노마드 교회는 ‘이 땅에 정주와 정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교회’, ‘자신의 안정과 확장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 등으로 이해되었는데, 저자는 223페이지에서 “성전이 모여 공동체적 교회를 이루고 다시 흩어지면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노마드 교회다.”라고 정의했다. 즉, 노마드 교회는 모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교회로서 다시 흩어질 수 있는 교회, 복음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 등의 의미로 이해된다.
하나님 나라와 질서
저자는 교회라는 용어보다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듯하다. 그 이유로는 이 책의 앞부분의 많은 분량을 ‘하나님 나라’의 개념, 형태와 세속적 나라의 모습을 설명하고 비교하는데 할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보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데, 그것은 ‘통치 질서’를 의미한다(구조적 관점이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고, 그 법이 지켜지는 땅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확장은 종교적 개념의 교회를 넘어 사회와 제도, 문화 등의 전반적인 영역에까지 하나님의 법과 질서가 적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 청년...
이 책 전체를 통해 저자는 특히 오늘날 청년들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 시대의 청년들이 누구일까? 이 책을 통해 본다면 이 시대의 청년들은 ‘약자’, ‘소외자’, ‘아웃사이더’ 등이며, 교회 안에서 청년들은 ‘봉’, ‘호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년들의 진짜 정체성은 무엇일까? ‘우리 자신들의 미래’이다. 정말 청년 수련회나 집회 등의 설교에서 ‘요셉’, ‘다니엘’ 등을 언급하는 것들을 볼 때 목회자들과 교회가 정말 청년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청년들을 이용할 마음만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이러한 모습들을 볼 때에 나는 교회가 청년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척 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청년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청년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에 중독되면 정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초월적 사고에 빠져버린다. 즉, 하나님의 존재 외에 다른 모든 존재들을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자들을 ‘종교 중독자’들이라고 부르는데,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종교 의존을 넘어 중교 중독에 빠진 청년들이 과거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느낀다. 왜 종교 중독인가? 종교 중독도 다른 중독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도피이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교회의 잘못된 청년 지도 방식과 관계 방식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성경과 세상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조건으로 첫째,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언급하고, 둘째, 정결법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저자는 구약의 ‘접촉’에 대해 ‘부정함’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접촉’에서 ‘정결함’으로 새로운 혁명적 사건으로 설명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구약의 제사장 위임식에서 제사장이 속죄제를 매일 드렸던 이유와 제사장의 의복과 관의 흉패 등은 제사장의 접촉을 통해 부정한 것들을 정결케 하기 위한 목적의 의식과 복식이다(참조: 출 29장). 물론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안식일 준수와 강도만난자를 부정하다고 여긴 것이 1세기 당시 유대교의 모습이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당시 유대교의 전통과 유전이 율법적으로 틀렸음을 지적하며, 사마리아인이라 할지라도 강도만난자가 부정하지 않음과 사마리아인이 부정케 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며, 예수님 자신이 또한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병자들과 약자들에게 직접 손을 데심으로 구약의 정결케 함의 접촉을 성취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정결법에 대한 설명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매일 스스로를 정결케 함으로 세상과의 접촉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을 부정하다고 보며 교회 안에 숨어버리고 종교와 교리라는 높은 울타리로 세상과의 접촉을 막는 것은 폐쇄적 예루살렘 성전주의 선민사상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보내어진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 보내어진 빛과 소금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는 세상과의 접촉에서 확장되어지고 나타나는 것이다. 즉,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정한 곳을 정결케 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로서 부정한 것들과 접촉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물론 교육과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울타리와 노마드
저자는 노마드의 뿌리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모형으로 둔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를 유목생활과 농경생활의 비교를 통해 설명을 한다. 이 땅을 자기의 거주지(소유지)로 삼고자 하는 농경생활(세상적 잉여추구)과 하나님이 주신 땅을 관리하는 자로서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적 삶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지만 이 땅이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 또한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삶을 비교한다.
담과 울타리를 쌓는다는 것은 그 울타리 안의 땅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자 하는 행위이이다. 즉, 자기교회, 남의 교회 울타리를 세우는 것 또한 자기 소유를 주장하는 행위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안다면 굳이 울타리를 세우는 수고를 하지 않을 것이다. 노마드는 소유에 집착하여 울타리 안에 갇히지(정착) 않는 삶이다. 하나님의 소유 안에서 자유(유목)하는 삶이다. 또한 이 땅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인도(자기의 필요가 아닌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사는 삶이다. 저자는 한국의 교회를 향해 노마드(자유)의 회복을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