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우리가 잘 아는 이 말씀은 복음이 무엇인지 은혜롭고 풍성하게 소개한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읽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둘째 아들(탕자라고 알고 있는)의 비유이다. 책은 세 번째 비유에 대한 설교인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죄와 구원과 십자가 그리고 잃어버림과 찾음과 천국으로 가는 여정과 잔치에 대한 내용까지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주제들로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잃어버린 둘째 아들은 탕자이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잃어버린 아들은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잃어버린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모든 율법과 도적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을 다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잃어버린 사람이고 둘째 아들은 자기의 꿈과 비전을 성취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살기에 잃어버린 사람이다. 전자는 자신의 순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잃어버림이고 후자는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하나님을 벗어나기에 잃어버림이다.
얼핏 보면 첫째는 선하고 착한 사람으로 보인다. 둘째는 악하고 탐욕스럽고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의 모습과 양상이 다를 뿐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은 똑같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하고자 하는 욕망도 똑같다. 둘 다 잃어버린바 되고 자기가 주인된 인생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 품에서 평안과 만족을 누려야 하는데 하나님 밖에서 불안과 불행으로 살아간다.
교회 안에는 첫째 아들이 많을까? 둘째 아들이 많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첫째 아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전통과 익숙함과 종교심에 얽매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수고와 애씀과 헌신을 통해서 기득권을 확보하여 큰소리치며 하나님께 영수증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다양한 종교적 행위와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종교성으로 신앙을 입증하고 증명하는 것이지 복음으로 변화된 성도가 아니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 있고 헐벗은 상태이다. 이들은 기도하고 예배하지만 형식적이고 율법에 순종하는 것일 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 성도로 살아가기보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무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어쩌면 둘째 아들보다 더 심각한 영적질병에 걸려있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은 자신이 몸으로 아버지를 떠나 있고 돼지열매를 먹으며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자신의 죄를 알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죄와 아버지에 대한 깨달음이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자신의 무능함과 구원 없음을 인식하였기에 새롭게 될 희망이 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여전히 불가능하고 새롭게 될 희망이 없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착하게 살고 있기에 구원이 있다고 여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엉망인데 자신의 종교적 행위를 보고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 내면에 종교적 본성과 야심과 주인의식과 자기중심성을 보지 못하니 하나님의 구원과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이 더 심각한 영적질병에 걸렸고 더 죄악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 아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에 구원자로 내려오셨다. 본문의 비유를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떠나는 목자와 여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세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서 떠나는 아버지나 형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둘 다 잃어버린바 된 아들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아무도 버려진 자들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상기시켜준다. 우리의 처절한 죄의 상태와 잃어버린 형편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시고 아버지께로 인도하셨다고 가르쳐준다. 찾는 자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찾으러 온 자가 있다고 기대하게 한다.
첫째 아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스스로의 잘남과 은사와 율법순종과 종교적 활동을 통해 망가진 마음을 가진 자에게 십자가의 사랑이 강같이 흘러 자유와 해방을 주어야한다. 복음의 본질을 오해하여 조건적으로 종교생활 하는 그에게 복음의 핵심이 새겨져야한다. 일그러진 자화상과 차별과 배제와 억압을 가지고 살아가는 첫째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오라고 초청하신다.
그리고 둘째 아들에게도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의 핵심은 돌아온 아들을 내가 대신 돌에 맞아 죽겠다는 심정으로 안아주며 이는 죽었다가 살았다하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고 회복시켜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빨리 죽어 달라는 의미를 가진 재산을 달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땅을 팔아 재산을 주는 아버지, 아들이 왔을 때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뛰어나가는 아버지, 돌에 맞아 죽어야 될 아들인데 내가 대신 죽겠다고 와락 안아버리는 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죽었던 아들이 왔다고 더러운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으로 입혀주어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자기의 반지를 주어서 아들됨을 확증하고 게다가 최고급 요리인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어서 온 마을과 함께 기뻐하는 잔치를 연다. 둘째 아들이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 쏟아지는 현장이고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탕진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감격할 수밖에 없다.
이 잔치는 단순한 마을 잔치가 아니다. 최고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충만한 잔치이고 한 영혼의 돌아옴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보여주는 잔치이다. 이사야가 예언한 새하늘과 새땅에서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잔치이고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슬픔과 근심이 없고 찬송과 영광만 가득한 잔치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질 좋은 포도주가 계속 공급되고 모두가 행복해하는 잔치이다. 하나님을 떠나 있다 돌아온 성도는 바로 이런 잔치를 누리고 맛보며 사는 자이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이 땅에서의 삶은 하늘로 가는 여정임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둘째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과정이 험난하였듯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 여정은 이 땅에서의 삶을 허무로 살게 하지 않고 잔치로 살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영원한 집에 이르겠지만 그 전에 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집에서의 평안과 만족을 맛보며 살게 되는 여정이다.
탕부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 한 번으로 끝날 내용이 아니다. 우리의 가슴을 때리고 적시고 복음에 감격하며 울면서 들어야 하는 메시지이다. 우리의 마음이 냉랭하고 십자가의 감격이 무뎌진 자에게 다시 듣고 회복해야 될 말씀이다. 우리는 죄와 구원과 십자가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자가 제일 먼저 들어야 될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머리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식이고 허세이고 가면이다.
오히려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런 복음을 더 듣기 원하고 행복해한다. 들을 때마다 자신의 영혼에 힘이 되고 은혜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은 큰 죄를 지어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내가 큰 아들이 될 때 시작이 되고 십자가의 감격이 무뎌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덤덤해질 때 시작된다. 교회 안에는 큰 아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회복해야 될 것은 수많은 예배와 위기에도 절기를 고수하려는 고집이 아니라 우리를 찾으러 오신 큰 형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놀라운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