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코로나19와 기독교인의 응답
코로나19와 기독교인의 응답
전세계가 코로나19라는 무서운 질병 앞에서 불안에 싸여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고 목숨을 잃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전염을 두려워하여 서로 만남을 피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모임마저 중단하고 있다. 이 엄청난 상황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고민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한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나님, 이 땅을 고쳐주시옵소서.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옵소서.
수고하는 의료진과 방역 관련자들에게 지혜와 건강을 주시옵소서.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평안의 길을 알려주시옵소서.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백성을 기억하셔서 순종하는 삶, 경건한 삶으로 돌이키게 하시옵소서.
주일에 모일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예배에 충실하게 하시옵소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 땅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저자는 감염자가 확산하는 가운데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번 주일은 우리 둘만 예배드리는 것이 어떨까요?” 이유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지만 선뜻 찬성할 수 없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하는 날이 아닌가? 모태 교인으로 평생 주일 예배에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저자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일 예배를 중단해도 되는가? 게다가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주일 예배를 중단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내 고등학교 시절 영어 참고서 지문에서 읽은 내용이 무겁게 다가왔다. 그 내용은 중세에 전염병이 널리 퍼지고 있을 때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 이를 이길 수 있다고 교회로 모이게 한 결과, 전염병이 더 악화되었다며 지식 없는 믿음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10-11쪽).
마침 어느 교단에서 주일에 교회에 모여 드리는 예배를 중단하는 것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발표했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대유행병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했다.
저자는 먼저 ‘판데믹(Pandemic)’의 뜻을 설명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의 위험도에 따라 전염병 경보단계를 1단계에서 6단계까지 나누는데, 최고 경고 등급인 G단계를 ‘판데믹’(pandemic; 전염병의 대유행) 이라 한다. 그리스어로 ‘pan’은 ‘모두’, ‘demic’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모든 사람이 감염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참고로 판데믹 외에도 에피데믹, 엔데믹, 신데믹 등의 전염병이 있다”(15-16쪽).
판데믹(대유행병)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퍼지는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심각한 증상을 일으키는 질병이 발생해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퍼지는 전염병이다. 에피데믹(epidemic; 유행병)은 판데믹치럼 대륙을 넘나드는 넓은 영역에 걸친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넓은 영역에 퍼지는 전염병이다. 엔데믹(endemic; 풍토병)은 외부에서 유입되지 않은, 지역 내 감염원에 의해 옮겨지는 풍토성 전염병이다. 신데믹(Syndemic)은 두 개 이상의 질병이 결합되어 퍼지는 전염병을 말한다.
“현재 인체에 영향을 주는 1,400여 가지의 병원체가 알려져 있으며 모두가 에피데믹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수백 가지의 동물 질병도 있어서 종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판데믹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22-23쪽).
저자에 따르면 지난 역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판데믹(대유행병)에 관하여 다섯 가지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영향력이 충격적이다.
판데믹을 통제하지 못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 판데믹은 1년 동안 5천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에이즈는 1981년 최초 사례 보고 이후 39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판데믹은 사회와 경제를 파괴하고 광범위한 2차 피해를 남긴다.
2) 불평등하게 닥친다.
판데믹은 가난을 좋아한다. 판데믹의 분포는 소득, 주거, 직업 등의 영역에서 박탈이 심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빈곤은 위생 불량, 영양 불량, 집중된 주거 환경, 의료 서비스 부족, 공중보건 인프라 부족 등으로 이어지고 판데믹에 대한 취약성이 높아진다.
3) 불확실하다.
판데믹의 발생 조건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여전히 특정 판데믹이 나타날 것은 예측할 수 없다. 새로운 감염원의 전파성과 심각성은 초기 단계에서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4) 통제 가능성이 낮다.
현재 대부분의 판데믹은 사스처럼 통제 가능하다. 단 하나의 예외는 인플루엔자에 의한 판데믹인데, 기존의 치료 방식은 제한적 효과만 있을 뿐 백신을 개발하여 보급하는 데는 수개월이 걸린다.
5) 패닉/분노를 일으킨다.
새로운 위협이 닥쳤을 때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판데믹 앞에서는 이런 반응이 종종 패닉과 분노로 바뀐다. 이런 반응을 관리하는 열쇠는 위험에 대한 효율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전염병이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다. 2) 말세의 징조일 수 있다. 3)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함일 수 있다. 4) 그러나 특정 판데믹이 발생하는 정확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위에서 제시한 이유들, 특히 앞의 두 가지는 전통적으로 교회가 제시해 온 이유였고 성경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이런 이유들을 지금 우리가 당하는 일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이것은 성경의 일반적 진리를 특수 사건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일이다. 성경에 나오는 보편적 진리가 반드시 이 특수 사건에 적용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코로나19가 반드시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확정을 지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33-34쪽).
저자에 의하면 이런 전염병은 타락한 세상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일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목적을 가지고 질병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질병도 세계적인 판데믹도 단순히 타락한 세상에 사는 결과일 수 있다는 견해다. “우리는 어떤 판데믹이 어떤 영적 이유 때문에 발생했는지 정확하게 확정지을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안다(롬 11:36).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안다... 그러므로 판데믹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섣부른 판단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의 상황에서 우라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판데믹이 닥쳤을 때,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여 도피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부름을 받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되,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현장에 필요한 의료 봉사나 물질적 필요를 사랑으로 채우는 일에 적극 참여하거나, 이들을 격려하고 응원하여야 할 것이다”(47쪽).
저자는 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목회적 모범을 예로 들고 있다. “1519년 8월에서 1520년 2월 사이에 스위스 취리히의 인구 4분의 1 이상이 흑사병으로 죽는 일이 일어났다. 부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전염병을 피해 도시를 떠났다. 그러나 과로로 건강이 나빠져서 180Km 떨어진 한 온천에서 휴양 중이던 츠빙글리는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취리히로 돌아가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전염병에 걸렸고 목숨이 위태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앞둔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48쪽).
그때 그는 그 유명한 기도시 <역병 찬송> (plague song)에서 “주 뜻대로 하소서, 저는 부족함 없사오니. 회복되든 멸망하든 저는 주의 그릇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그 후 그는 놀랍게도 병에서 회복되었고 더 열정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1527년, 흑사병이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크를 비롯한 주위 도시들에 다시 나타났을 때, 개혁자 루터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도피해야 하는가?”라는 편지에서, 전염병 유행 시기에 일반 시민의 임무를 다루었다.
루터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과 관련된 사람들은 누구든지 도피하지 않아야 할 소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역자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루터는 병든 자를 돌보는 일을 전문가들에게만 한정짓지 않았다.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은 병든 자들을 돌볼 수 있는 역할을 찾을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섬기듯 병든 자를 돌볼 수 있는 기회를 찾으라고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한다(49-50쪽).
저자는 초대 교회가 보여준 본을 언급한다. 고대 사회와 종교는 병든 자와 죽어가는 자를 돌보지 않았다. 로마를 포함하여 고대 사회에서는 병든 자와 죽어가는 자를 내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로마 종교는 추종자들에게 무력한 자들을 돌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가족들은 때로 만성적인 병에 걸려 죽도록 버려졌다. 로마에서는 병든 자와 늙은 노예는 늘 티버 섬에 버려져 죽게 했다. 원하지 않은 아기들은 종종 죽도록 버려졌다.
3세기에 유행병이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서로마를 휩쓸 때, 환자는 거리에 버려졌고 시체는 묻히지 못했다. 그 때 카르타고의 주교 키푸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환자와 죽어가는 자를 돌보자고 격려했다. 그리하여 병들 것을 무릅쓰고 죽은 자를 묻어주고 환자를 돌보았다. 이런 일은 유행병이 생길 때마다 반복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들은 병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의 기준을 도입했다.
저자에 따르면,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ianity, 좋은씨앗 역간)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병든 사람들에게 보여 준 보살핌과 동정 덕분에 초대 교회가 눈부신 성장을 했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기도는 이 상황에서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특히 현장에서 분투하는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특별히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52쪽)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한다면 후방에서 간절한 기도로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 작은 책은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의 전파에 대해 기독교인이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대응)해야 하는지를 개괄적으로 보여준다. 코로나19와 관련된 교회의 공예배 문제를 상세히 다룰 수 있는 분량의 책이 아니므로, 이후에 신학자들의 학문적 응답(저작)을 기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